지난주에 방영된 EBS 다큐 시네마는 '춘희막이(2015)'였다. 본처 막이 할머니와 첩 춘희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삶이 담긴 다큐였다. 막이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아들 둘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할머니의 남편은 대가 끊긴다며 딴살림을 나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하는 수 없이 막이 할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첩을 골라서 집안에 들였다. 그렇게 해서 들어온 사람이 춘희 할머니였다. 춘희 할머니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지적 장애를 가진 춘희 할머니가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막이 할머니가 그 아이들을 다 키웠다. 막이 할머니는 춘희 할머니가 아들 하나만 낳으면 내쫓으려 마음을 먹었단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어서 그냥 같이 산 세월이 46년이었다.
막이 할머니의 삶은 일그러진 가부장제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대를 이어야 하는 가부장제적 명분은 막이 할머니의 삶을 춘희 할머니와 엉키게 만들었다. 그 삶의 그늘과 고통은 춘희 할머니도 옥죈다. 장애인의 인권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시대에 춘희 할머니는 자신의 집안에서 어떻게든 치워버려야할 존재였을 것이다. 결국은 누군가의 아들을 낳아주는 도구적 존재로, 그리고 '첩'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로 규정되는 삶을 살았다. 미움과 연민이 켜켜이 쌓인 두 할머니들의 삶을 고작 96분의 다큐멘터리로 제 3자가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다큐를 보고나서 그 후일담이 궁금해졌다. 어린 아이의 지능을 가진 춘희 할머니를 마치 자식처럼 보살폈던 막이 할머니는 고인이 되었다. 춘희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잘 지낸다고 했다. 다큐에서 춘희 할머니는 막이 할머니를 '어매', '어마이', '할마이', 여러 호칭으로 부른다. 춘희 할머니에게 막이 할머니는 유일한 친구이며 삶의 동반자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큐를 만든 이는 박혁지 감독이다. '춘희막이' 이후에 만든 작품이 있나 해서 찾아보니 올해 1월에 개봉한 다큐가 있었다. 제목은 '시간을 꿈꾸는 소녀(2023)'. 어린 나이에 신내림을 받은 무당의 성장기를 담아낸 다큐라고 한다. 다큐의 주인공으로 나온 무당은 이전에도 여러 TV 출연으로 이름이 알려진 젊은 처자였다. 어쩌다가 그 무당 처자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도 보게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무당의 삶에 대해 궁금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짧은 동영상에 담겨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이런 제목도 있었다.
"신(神)발이 떨어진 무당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보살(일반적으로 무당은 스스로를 보살, 제자라고 부른다)은 그런 때가 오는 건 다 신의 뜻이라고 말했다. 공부(무당도 공부를 해야한다. 굿의 사설부터 춤과 노래 같은 것들)를 하거나 기도를 한다고 했다. 내게는 그렇게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기는 하다. 오래전, 종교학 강의를 들을 때 샤머니즘에 관심이 생겨서 굿을 보러 다닌 적이 있다. '진적굿'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무당의 '신(神)발'이 떨어졌을 때에 꼭 해야하는 굿이다. 진적굿은 무당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 하는 재수굿이다. 자신의 손님들과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서 하는 일종의 잔치라고 보면 되겠다. 나는 나이든 만신(巫女를 대접하여 부르는 말)의 진적굿을 보러 갔었다.
만신의 나이는 칠순에 가까웠다. 그 나이에도 무당으로 살아가려면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들에게 공손하게 의탁을 해야한다. 굿당에서 신에 사로잡혀 춤을 추는 만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애잔함이 느껴졌다. 신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삶의 무게란 저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자신을 찾아오는 재가집(무당은 손님을 그렇게 부른다)의 점을 보거나 굿을 해주기 위해서는 신들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다. 그러니 무당들은 '신(神)발'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명산대처(名山大處) 찾아다니며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무당 처자의 유튜브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글발이 떨어진 작가는 무엇을 해야할까? 사실 그것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전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써내던 영화 리뷰들을 내가 써내지 못한 지가 좀 되었다. 이른바 'Writer's Block'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글쓰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직업병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걸 고칠 수 있는 방법이란 것이...'없다'.
누군가에게 답이 되었던 해결책은 나의 것이 아니다. 글의 신이 있다면 제사라도 지내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런 신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뮤즈(Muse)는 그저 신화 속의 표상일 뿐이다. 뭐 어쩌겠는가? 그냥, '악깡버(악으로 깡으로 버티기)'하면서 스스로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잡다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다큐 '춘희막이'를 보다가 시작한 한밤중 생각의 흐름은 결국 이렇게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