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말 일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동물 다큐멘터리'를 챙겨보는 일이다. EBS 1에서는 토요일 오후 4시에, KBS 1에서는 주말 오후 5시 10분에 동물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EBS의 동물 다큐는 on air 서비스가 되지 않지만, KBS는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다. KBS의 on air 창을 보면 동시 접속자수가 뜨는데 대략 3천 명에서 4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본다. 나처럼 동물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그 시청자들이 때로는 동료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내가 KBS 1TV의 '동물의 세계'를 본 세월은 대략 40년에 가깝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성우 이완호 선생의 구수한 해설이 그리워진다. 내가 왜 그렇게 동물 다큐멘터리를 좋아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에게 동물 다큐멘터리는 일종의 '명상의 시간'이었다. 가만히 넋놓고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동물을 인간의 시각이 아닌, 자연의 생명체로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 것이 40년 동물 다큐 시청이 남긴 깨달음이다.

  그렇게 보았던 다큐들 가운데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첫번째는 새끼를 잃은 어느 어미 치타의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치타는 무리를 짓지 않고 단독 생활을 한다. 어미 치타는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새끼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사냥을 나가기 전에 치타는 새끼들을 풀숲에 숨겨둔다. 새끼 치타를 노리는 포식자들은 많다. 사자와 하이에나가 대표적이다. 초원의 포식자들은 한정된 먹이 자원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사정이 그러하니 육식 동물들은 경쟁 관계에 있는 동물의 새끼들을 보면 본능적으로 죽여버린다. 내가 본 다큐 속 어미 치타도 새끼를 그렇게 사자에게 잃었다.

  힘겹게 잡은 사냥감을 가지고 와서 어미는 새끼를 부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미는 곧 축 늘어진 새끼의 시체를 풀숲에서 발견한다. 황망함 속에 나즈막하게 울음 소리를 내던 어미는 곧 차분해진다. 그러고 나서는 어미는 자신의 죽은 새끼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게는 잊혀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사자는 대개의 경우 치타나 하이에나의 새끼를 죽이기만 하고 먹지는 않는다. 죽은 새끼 치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청소부 하이에나들의 뱃속으로 들어갈 터였다. 굳이 인간적인 생각을 보태자면 이렇다. 어미는 자신의 새끼가 어차피 포식자들에 의해 갈갈이 찢겨 먹히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그냥 자신이 처리해 버렸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충격을 주었던 것과는 다른 애잔함을 느끼게 만든 에피소드도 있다. 늙은 미어캣(meerkat)의 이야기였다. 미어캣 무리의 우두머리는 암컷이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암컷은 그저 무리에서 이런 저런 뒤치다꺼리를 하며 지낸다. 우두머리 암컷이 낳은 새끼들도 돌보고, 다른 미어캣들에게 사냥 기술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 늙은 미어캣에게는 지혜와 따뜻함이 있었다. 무리의 젊은 수컷 하나가 유독 이 늙은 미어캣을 따라다녔다. 철없는 수컷은 늙은 미어캣에게 짝짓기를 하자고 계속 졸라댔다. 늙은 미어캣은 그럴 때마다 계속 젊은 수컷을 밀어냈다. 생의 끝자락에 놓여있는 늙은 암컷은 젊은 수컷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달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젊은 수컷 미어캣은 늙은 암컷을 따라다니며 보챈다. 해가 저물 무렵의 초원에서 두 미어캣이 나란히 서있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저 비정한 약육강식의 모습만 존재할 것 같은 동물의 세계.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거기에도 인간사 못지 않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나는 그 세계에 깃든 조화와 경이로움을 오랫동안 애정해왔다. 가끔은 이런 동물 다큐멘터리가 언제까지 제작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간이 야기한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으로 인해 생물종의 다양성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은 육지와 바다에서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앞선다. 내가 지구와 동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일회용품을 덜 쓰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전부이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내 사유의 근원이 되어준 이 소중한 동물 다큐멘터리를 앞으로도 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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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12 08:08   좋아요 0 | URL
푸른별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동물의 세계 저도 좋아합니다 얼마 전 읽었던 [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 읽으며 저도 그런 생각했어요 동물의 서계 생각도 많이 났구요. 그들 세상과 우리 세상은 지구별이란 한정된 공간ㅇㅔ서 결국 이어져 있잖아요 무얼 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푸른별 2023-03-12 21:06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도 ‘동물의 세계‘를 좋아하는군요. 코끼리들의 애도 의식도 특별하지요. 동료와 가족이 죽었을 때 코끼리들이 보여주는 슬픔과 연민이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지거든요. 아주 오래전 까치글방에서 펴낸 ‘코끼리가 울고 있을 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동물행동학에 대한 책인데 찾아보니 절판이네요. 은하수님이 읽은 책에도 코끼리 이야기가 있군요.
지구와 동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내가 읽고 있는 과학 잡지들에는 육식과 축산업에 대한 논의가 많이 올라와요. 나는 그런 기사들을 보며 육식을 점차적으로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은하수님이 가진 생태적인 마인드가 참 좋네요. 그런 고민들 속에서 작은 실천을 해나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