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疊疊山中)


청소기가 고장났다
아픈 것들이 소리 없이 죽는 때가 있다
청소기를 검색해 본다
손잡이에 전원 버튼이 없는 것은 싸구려다
싸구려에 현혹되지 않도록 한다

싼 게 비지떡

인생의 자명한 진리를 오물거리면서
마침내 청소기를 골랐다
싸구려와 타협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으로
자정의 TV를 켠다

이것은 실화(實話)다

아내는 19년 동안 치매 환자였다
노인은 그런 아내를 정성껏 돌봤다
그런 그가 아내를 죽이고 말았다

노인은 치매 판정을 받았다
사건 발생 3일 전의 일이었다

순간, 싸구려 유선 방송이 끊어진다
잡음으로 일렁이는 노인의 울음소리에
접혀진 밤의 겹눈이 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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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出勤)


지뢰를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발가락이 매일 하나씩 날아가고 있다
발목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날도 있는데
한 며칠 절름거리면 뼈가 조금씩 자란다

컴퓨터를 켜고 녹음기의 붉은 버튼을 누른다
새빨간 눈의 계집애가 녹음기를 켜고 덤벼든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마침표를 찍는 인간들
마침표는 쉼표가 아닌데도
그걸 찍는 것을 멋이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들
제대로 된 보고서도 작성하지 못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왔을까
의문이 뭉게뭉게
먹구름이 곧 쏟아지는 소나기로

팀장님은 좀 싸가지가 없네요

점심을 먹다가 체했다
속이 더 쓰릴 줄 알면서도
커피를 들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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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새


죽은 고등어를 먹으며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물음표는 꼬리를 질질 끌면서 창살을 빠져나간다
일부러 울지 않은 것이 몇 해인지 잊어버렸다

이 동물원의 지하에는 하늘다람쥐가 산다
비막(飛膜)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다람쥐가 물었다

다시,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육사의 손을 심심해서 쪼아버렸더니
부리를 망치로 부숴버렸다
마시는 물이 피가 되어 흐른다

그 사막에는 피를 마시고
피어나는 들꽃들이 있다
다리가 부러진 친구들이 모두 떠난 곳

조각난 부리를 그러모은다
죽은 표범의 뼈바늘로 정성스럽게 꿰맨다
하늘다람쥐의 갈라진 옆구리도 이어 붙인다
새벽의 모래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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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거짓말을 잘하는 비결은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하는 것이다

버마비단뱀을 목에 칭칭 두르면
멋진 목도리가 된다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두르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나는 속아넘어갔다
K의 거짓말을 오랫동안 의심했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너무나도 거짓말 같았기 때문이다

K의 거짓말이 두더쥐처럼 튀어나올 때
방망이로 흠씬 두들기면서 진짜겠지, 라고 말했다
하지만 방망이는 닳아졌고

너, 거짓말 맞아

K의 거짓말에는 예술적인 데가 있었다
어제는 아침 일찍 커튼을 열자
매끈한 거짓말의 얼굴이 보였다
20년 동안 삭힌 침을 뱉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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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공모전(公募展)


수상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걸 모르는 바보들이 그림을 그린다

실력에 돈이라는 금칠을 해야 이길 수 있다
금칠, 이라는 단어가 역겨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파리의 삶을 살아라
유명한 선생님의 화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발바닥을 비빈다
떨어지는 흙가루를 캔버스에 칠한다

심사의 과정은 공정하다
그림을 씹어먹을 수 없는 사람을 떨어뜨린다
부실한 치아로 그림을 씹다가
틀니를 끼고 젊은 날을 내다 버린 사람들

심사위원이 말한다

너의 그림이 떨어진 이유는
유기성(有機性)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번번이 떨어진다

30년 후,
늙은 낙선자의 전시회가 열린다
캔버스에는 부서진 치아들이 반짝인다
특별한 금색의 기원은 낙선자만이 알고 있다
그림이 마음에 든 누군가가
그림을 백 원에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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