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시집 탐구생활 2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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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탐구생활(探究生活) 



자서전(自敍傳)


자본주의 시대의 시인


시인(詩人) 


마지막 공모전(公募展) 


고시(考試)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 


연금술사(鍊金術師) 


안약(眼藥) 


심플한 삶


빈집


기일(忌日) 


시인(詩人)의 아들


새벽


탐구생활(探究生活) 


족보(族譜) 


형광등


미지(未知)의


시집(詩集)











자서전(自敍傳) 



재미없는 인생이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래

진실과 거짓의 그 중간 어디쯤

무언가를 써야 하지

솔직하게 쓰자는 마음가짐은 무익해


문이 열린 차의 조수석

노인은 입을 벌리고 단잠에 빠져 있어

건너편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꼬마

엄마를 향해 웃으며 달려가


봄의 마지막 날

포플러 나무의 휘어지는 손짓

자서전의 가운데 페이지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시대의 시인


배가 고파서 헌혈을 하러 갔더니
도서상품권과 72색 색연필을 주더군
다정한 말을 기대했는데
언제나 얼어붙은 따귀를 맞았지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하나 살까
시집(詩集)을 한 권 샀어
썩어가는 두부로 써 내려간 시
죽어버린 뇌는 그렇다 하더군

가래 낀 목소리로 잘 팔리는 시를 읽어
단맛이 줄줄 흐르는 자본주의의 시
스테비아 토마토의 맛이 나는 것 같아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72색 색연필의 케이스를 열어
보라색 색연필을 씹어먹지
왜 보라색인지 당신은 묻겠지
그건 당신의 삶이 보라색이 아니기 때문에




























시인(詩人) 



삼거리의 시장에서 나무 판대기에 노끈을 꿰어 목에 건다


시 한 편에 3천 원

주력 분야는 불행에 관한 시

사랑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시를 5편 사면 1편은 덤으로 드립니다


쇠고기를 사 먹으려면 몇 편을 내다 팔아야 하나

시든 채소를 염소처럼 뜯는다


염소는 가끔 하늘을 보면서 운다

오래전 염소에게는 꿈이 있었는데

돌산의 가장 높은 곳에 빠르게 올라가는 것

독수리에게 등짝을 물어뜯기는 동안

돌산이 5개로 늘어나 버렸다


오늘 아침에는 꺼멓게 죽은 뿔 하나가 떨어졌다

한 개의 뿔로 어찌 살아갈까를 생각하다가

나머지 하나도 부러뜨리기로 결심한다

뿔을 갈아내어 마시고는

중단한 달리기 실험을 계속한다



























마지막 공모전(公募展) 



수상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걸 모르는 바보들이 그림을 그린다


심사위원이 말한다


너의 그림이 떨어진 이유는

유기성(有機性)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번번이 떨어진다


30년 후,

늙은 낙선자의 전시회가 열린다

캔버스에는 부서진 치아들이 반짝인다

특별한 금색의 기원은 낙선자만이 알고 있다

그림이 마음에 든 누군가가

그림을 100원에 샀다































고시(考試) 



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이걸 해야하나 생각한다


비 오는 밤에 모기향을 피운다

비가 와도 날아다니는 모기는 있겠지

쓴맛이 나는 내 피를 내어줄 생각은 없다


엊그제는 책상 밑에서

죽어있는 바퀴벌레를 발견했다

10년 만에 보는 바퀴벌레였다

이곳에 먹을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절망으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TV 화면, 소림사의 11살 소년이 말한다

나는 5살에 소림사에 들어왔어요

소년은 소림사를 온몸으로 들이켰다 


창문을 열면 붉은 시멘트가 보이는

이 고시원의 정체성은 고시(考試)이다

나의 손바닥은 고시로 물들었다


창틀에 끼어있는 단풍나무의 씨앗은

퇴거(退去)라고 외친다

천천히 씨앗을 씹어서 삼킨다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 



처음엔 뭐든 게 다 잘될 줄 알았지


잘 써지는 날에는 컴퓨터 자판이 솟구쳐 오르고

안 써지는 날에는 방바닥이 꺼지면서 죽고 싶어

눈을 떠보니 레일이 내 머리 위에 있더군

멈춰 선 롤러코스터


착한 아이처럼 밥을 먹고는

롤러코스터의 끄트머리에서

아무것도 쓰지 않는 벌레의 삶

그저 나뭇잎을 먹고 초록을 토해낼 뿐이지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움직인다

아무래도 내려야겠어

한 움큼의 피를 흙바닥에 쏟아놓고는

유서(遺書)를 쓸 나이는 아니지


스물둘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연금술사(鍊金術師) 



멀리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새로운 물질은 붉은색이라고 한다

실패와 불운이 천천히 휘발되면서

나의 실험실 문짝을 누렇게 만들었다


쌀독 바닥에는 직박구리가 산다

삐쩍 마른 이 새는 새끼를 두 마리 낳았다

나는 가끔 뚜껑을 닫아놓는다

배고픈 새가 내 머리를 쪼아먹기 때문에


한 뼘의 정원에는 의심의 풀이 자란다

갈색 두통(頭痛)이 담긴 물뿌리개를 들고

조금씩, 죽지 않을 정도로 뿌려준다

적당히, 평범하게 살길 바라면서


싸구려 홍차에 설탕 세 스푼을 넣는다

시커먼 냄새가 나는 신문을 펼친다

실험실에서 죽은 남자의 사인(死因)은

굶주림이 아니라 공포로 판명되었다


눈가가 짓무른 커다란 개는

울지 않으려고 짖는다

나는 삐걱거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쌀독을 들여다 본다

어미가 잠시 나간 틈

새끼 새의 부등깃 다섯 개를 뽑는다


플라스크에는 푸른색의 물이 끓는다

부등깃을 가느다란 주둥이에 밀어넣는다

익숙하고도 지겨운 음률

희미한 황금의 노래가 들린다




















안약(眼藥) 



누런색의 안약을 넣는다

눈은 매일 조금씩 쪼그라들고 있다

눈이 멀어지면

누런 양말의 흰색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당신의 눈은 멀어


나는 아픈 눈을 찡긋하며 웃는다

외눈박이 의사는 무례를 내뱉고는


이번 안약은 붉은색이야


당신처럼 외눈박이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두 눈이 다 멀어버리는 게 낫지

눈에서 피가 똑똑 떨어진다

손가락에 피를 묻혀서 시를 쓴다






























심플한 삶 



부자들은 진짜 심플하게 살아요


부자 삼촌을 둔 여자가 말했다


복잡한 삶의 악덕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선택에 대한 온갖 경우의 수를 상상한다

통 속에서 쪼그라드는 가난한 뇌가 웃는다 








































빈집 



빈집에 사람이 들끓는다

볼 것도 없는데 왜 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낡은 욕조는 죽지 않을 만큼 피를 흘리고

누렇게 뜨고 갈라진 벽지는 용케도 붙어있지


나는 떠날 거야

귀퉁이가 거칠게 닳은 가구들에게 인사를


분명히 현관문을 잠궜는데

어찌 알고서 사람들이 왔을까


마루에는 나의 내장들이

기다랗게 놓여 있다

불타는 내장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낯선 얼굴의 구경꾼들































기일(忌日) 



새책을 읽는데 후두둑, 종이들이 떨어진다

읽지 않은 페이지, 나는 바닥의 종이들을

그러모으고는 스카치테이프와 가위를

들고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이걸 붙여서 읽을 것인지, 이 책은 어차피 버릴 책이다

그냥 한번 보고 버릴 책, 그리고 잊힐


새벽 3시 반쯤이었다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밤은 고요하고 추웠으며 구불거리며 흘러갔다

할머니가 그랬듯 나의 발은 언제나 시렸다 

맨발로 누웠다가 양말을 신고 잠을 청해 본다



































시인(詩人)의 아들 



H는 시인의 아들이었다 

나는 H의 아버지가 쓴 시들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었다


H야, 그 시에 나오는 아이는 너를 뜻하는 게 맞아?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아버지만 아는 거겠죠


느물거리는 말투로 H는 대답했다


시인은 내가 졸업할 때 축사를 했었다


예술을 하려는 여러분!

절벽에서 뛰어내리십시오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만 살아남습니다


오늘은 문득 H 생각이 났다 

H가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절벽 위에 서 있다































새벽 



하얀 팝콘이 가득 찬 종이봉투를 받았다 


새벽에 회사 직원이 죽었어

이제 마흔 좀 넘겼는데, 심정지래 


아침부터 흐리더니 비가 퍼붓는다

나는 새벽의 꿈이 무슨 뜻인지 Chat GPT에게 물어본다 

팝콘은 부풀면서 터지니까 뭔가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요 

흰색은 희망의 색이기도 하구요 


검은색의 죽음이 파근파근하게 걸어오면서 웃는다




































탐구생활(探究生活) 



개학 전날, 탐구생활을 편다

개 혓바닥과 닮은 분홍의 책

방학은 방바닥에 눌어붙어있다


쉬운 문제도 있고 어려운 문제도 있다

복잡한 것을 쉽게 적는 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너무나 늦어버린 오후

찢어진 잠자리 날개가 방충망에 걸려있다

잠자리의 모가지가 뎅겅거리며

14층 창문에서 추락한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날개를 떼어내어

탐구생활의 23페이지에 붙인다


밤이 깊어 가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나가버리는 전등불

어제 마셨던 오렌지주스 캔에다

제사 때 쓰고 남은 양초를 꽂는다

심지가 다 탈 때까지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불에 그을린 얼굴의 꿈을 꾸었다




























족보(族譜) 



아버지가 물려주신 족보를 들여다 본다


고려 말에 중국에서 건너온 조상님들은

조선 초에 나름대로 성공한 일가를 이루었다

괜찮은 벼슬을 했고, 한양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갑자기 집안이 한양을 떠나 궁벽한 시골로 낙향한다

왜란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몰락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조상님들에게 한양은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이었다

구한말, 고조할아버지는 서당의 훈장이었다


할아버지는 사범학교를 나와서 학교 선생이 되었다

그러다 한국 전쟁이 터졌고, 난리통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뼈가 갈리도록 북한을 증오했다


아버지는 월급쟁이로 힘겹게 살았다

평생 소설을 쓰고 싶어했으나,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12권의 족보, 맨 마지막 권

가느다란 선의 끄트머리에 내 이름이 있다

흐린 글씨의 내 직업은 대학생이다

동생들은 아버지처럼 무언가를 팔러 다닌다


족보를 덮는다

내 혈관에 흐르는 어떤 오래된 기운을 감지한다

여느 때처럼 좌판에 글을 늘어놓는다



 


















형광등 



형광등은 2028년에 퇴출될 예정이다

그는 형광등의 집에 산다

마루의 등이 고장났고

큰방의 등도 죽음이 임박했다


작은방의 등을 큰방에 달아줄 계획이다

작은방은 창고가 된다

부엌의 형광등은 전기톱 소리를 낸다

그는 2년째 저녁 요리를 포기하고 굶는다

그의 체중은 현재 47킬로그램이다


효율이 떨어지는 것들은 제거되어 마땅하다

모두가 검은 입으로 추하게 외친다

그는 가치 있는 것을 남기지 못했다

눈꺼풀을 부드럽게 닫아줄 따뜻한 손과 같은


오래전 그는 무덤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밤의 마루에서 더듬더듬 무덤을 짓는다
































미지(未知)의 시 



방바닥을 천천히 긁는다

멸종된 공룡의 뼈가 만져진다

시커먼 세월의 때가 낀 지층 속

화려한 깃털은 보이지 않는다


너는 한때 크게 울었고

땅이 울리도록 달렸으며

보드라운 새끼들을 품었었지


언젠가 내가 죽어서 누울 관을 생각한다

미지의 뼈를 가만히 만져보다가 

서둘러 묻어버렸다




















시집(詩集)


이 숲은 언제나 공사 중이다
임도(林道)를 만들기 위해 파헤쳐진 곳
내가 작년에 심은 나무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나의 나무는 어디에 있는가

새카만 흙 사이로 어린 고사리가 올라왔다
동그랗게 돌돌 말린 줄기를 똑똑 끊는다
50그루의 묘목을 심을 작은 구덩이를 팠다
언젠가 너희들은 말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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