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나는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노래 부르기'를 새롭게 추가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알려주셨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다 보니 나중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으신듯 했다. 그래서 내가 그냥 유튜브를 방랑하면서 이런 저런 노래를 추천하는 식이 되어버렸다. 어제는 문득 아주 옛날 노래가 떠올랐다. 현인 선생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1953)'였다. 어머니에게 그 노래는 어떠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큰글씨의 가사가 나오는 동영상을 찾아서 재생을 시켰다. 하도 오래전 노래라 나는 따라 부르지 않고 그 노래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한 2절쯤 되었을까? 노래를 부르시던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무슨 일인가 했다.

  "노래가 정말 슬퍼서 그런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는 피난민으로 부산에 온 남자가 전쟁통에 헤어진 연인 금순이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에이, 뭐가 그렇게 슬퍼요? 엄마는 실향민도 아닌데."

  어머니는 뭔가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까지 흘리셨다.

  "얼마나 보고 싶으면 저렇게 노래를 하겠냐. 보고 싶은데 만나지도 못하고."

  나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반응에 당황했다. 노래는 이제 3절로 접어들고 있었다. 가사의 화자(話者)는 금순이에게 북진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북진통일(北進統一)'이라니, 내게는 너무나 생경하고 현실성 없는 단어였다. 정말로 그 시대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가사는 이산(離散)의 뼈저린 슬픔을 잊고 싶은 마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엄마, 나중에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 했잖아. 그 사람도 거기서 금순이 찾아서 만났을 거야."

  나는 서둘러 유튜브 창을 닫으면서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에 담긴 정서를 공감할 수 있는 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어머니처럼 생의 황혼기에 서있다. 나에게 이 노래는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대중 문화의 텍스트로 생각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제 계속해서 불려지는 노래라기 보다는 화석화되고 박제된 구시대의 오랜 기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어머니와 함께 부른 윤수일의 '아파트(1982)'도 '굳세어라 금순아'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학창 시절에 이 노래는 학교 운동회 때 응원가 목록에 빠지지 않고 꼭 들어 있었다. 지금 시대의 아파트는 사방팔방에 들어선 흔하디 흔한 건물일 뿐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아파트는 그리 흔한 주거 형태가 아니였다. 청약에 당첨되는 것은 복권 당첨과 같은 행운처럼 여겨졌었다.

  노래 '아파트'는 헤어진 연인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거기에 담긴 정서가 그 시대 사람들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인이 살았던 아파트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선망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노래 '아파트'에는 1980년이라는 시대와 사랑 이야기가 공명하고 있다. 요즘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지나간 시대의 사회사를 탐색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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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겨울의 초입에 작은 석영관 히터를 하나 샀다. 그 제품의 가격은 2만원대였다. 석영관 히터의 장점은 저렴한 가격말고도 또 있다. 비교적 작은 크기에 이동이 간편하다. 그리고 작은 공간의 냉기를 없애는 데에 좋다. 그런 장점만 들으면 석영관 히터가 나름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히터에는 어마무시한 단점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전력 소모량이다. 석영관 히터는 전기를 먹어치우는 조그만 괴물과도 같다. 나는 그 사실을 지난달 관리비 고지서를 받고서야 알았다. 

  보통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석영관 히터의 소비 전력은 800W이다. 그러니까 석영관 히터 1단이 400W의 전력을 소모하는 셈이다. 지난달 전기 요금이 그 이전달과 비교해서 무려 3만원이나 더 나왔다. 나는 그제서야 히터의 전력 소모량을 대략 계산해보았다. 히터를 1단만 작동시키고,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사용해도 전기 사용량이 꽤 되었다. 거기에다 누진제가 적용되니 전기 요금이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전기 요금만 오른 것이 아니었다. 난방비까지 껑충 뛰어버린 고지서를 받고 보니 전열 기구를 쓸 때마다 잠깐 생각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히터를 조심스럽게 쓰던 며칠 전, 히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지지직, 작은 소음이 들렸다. 나는 히터에 무슨 먼지라도 들어갔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그 소리에 이어 뭐가 타다닥, 타는 소리가 이어졌다. 석영관의 중간 부분이 시꺼멓게 변해있었다. 순간 놀라서 얼른 히터의 전기 코드를 빼버렸다. 그렇게 히터의 1단 석영관이 나가버렸다.

  그나마 상단의 석영관은 그동안 쓰지 않아서 멀쩡했다. 봄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히터를 쓰고, 나중에 서비스 센터에 가서 고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엊그제 또 히터에서 좀 큰 소음이 들렸다. 그렇게 석영관 히터는 완전히 고장나버렸다. 히터를 쓴지 2달만에 생긴 일이었다. 아무리 저렴한 중국산 소형 가전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다지 조잡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석영관 히터는 고장나면 수리비가 더 많이 드니까 그냥 버려야 합니다."

  누군가 인터넷에 그렇게 써놓은 글을 읽었다. 고쳐쓰느니 그냥 막 쓰고 버려야하는 제품, 거기에다 전기까지 엄청나게 먹는다. 내가 산 히터는 아직은 무상 서비스 기간이 남아있으니 수리비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석영관 히터를 고쳐서라도 계속 쓰는 것이 나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정도의 형편없는 내구성이라면 얼마 쓰지 않아 또 고장이 날 수도 있다.  


  싼 게 비지떡. 나는 얼마나 많은 석영관 히터가 한철만 쓰고 버려지는지 새삼 헤아려 보게 되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이들이 그 쓰임새와 내구성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저런 제품을 만들어 팔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윤리적인 생산과 소비는 불가능한 일일까? 타들어가서 시커먼 줄이 선명한 석영관 히터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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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지난 2년 동안 치매 환자의 가족으로 지내온 경험을 써보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치매'라는 예기치 않은 일을 겪게 된 환자와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1. 증상의 인지

  대부분의 질병이 그러하듯 치매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퇴행성 뇌질환으로서 치매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치매'라는 질병을 인지하게 되는 주된 증상은 '기억력'과 관련이 있다. 약속을 자주 잊어버린다거나, 물건을 어디에다 두고 찾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이 거기에 해당한다. 치매와 노화에 따른 기억력의 감퇴를 구분하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일상 생활에 불편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내 모친의 경우는 요리하는 일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어머니가 단지 요리를 하기 싫어하거나 귀찮아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어떤 요리를 할 때, 그 순서를 기억해내는 일을 어려워 하셨다. 그 즈음, 어머니는 은행이나 시장을 가는 일도 버겁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점에서부터 어머니의 뇌는 조금씩 변화되어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물건을 정리정돈하는지는 잘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노인의 기억력과 인지 능력에 문제가 생기면 어떤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정리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예를 들면 TV 리모컨이 옷장이나 전혀 엉뚱한 곳에 있는 경우이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자녀라면 주기적으로 방문했을 때, 집안 물건의 정리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2. 검사

  보호자로서 부모님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했을 때, 가장 먼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럴 경우에 나는 각 지역에 있는 치매 안심 센터를 방문해볼 것을 추천한다. 치매 안심 센터에서는 무료로 치매 선별 검사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센터에서 시행하는 이 검사는 간이 선별 검사이다. 심각한 치매 증상을 가진 환자라면 바로 치매 진단을 받고 센터와 연계된 병원에서 세부 검사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초기 치매 환자의 경우 치매 안심 센터의 검사로는 병의 진행 상태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치매 안심 센터를 방문해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센터의 담당자를 만나서 센터에 개설된 인지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른 치매 환자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센터의 간이 선별 검사 보다 더 정확하고 신속한 진단을 받으려면 대학 병원의 신경과에 예약을 해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치매 검사에는 의료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도 있다. 좀 더 정밀한 진단을 위해서 하는 PET-CT 검사가 그것이다. 병원에 따라 다르지만 비급여인 이 검사까지 받으면 진단 비용이 백만 원을 넘어간다. 내 모친의 경우는 PET-CT를 포함한 종합 검사를 받고, 검사 결과 '경도 인지 장애(mild cognitive impairment, MCI)' 진단을 받았다.

  어머니가 치매가 아닌 MCI 진단을 받았을 때의 내 심정은 일단은 안도감이었다. 하지만 MCI는 현 시점에서 치매로 진단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지표일 뿐이지, 치매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보증 수표가 아니다. 의학적 관점에서 MCI는 치매로 이환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예시적 지표로 보는 것이 맞다. 내 모친은 MCI 진단을 받고 1년 후에 치매로 이환되었다. 그러므로 MCI 진단을 받은 환자의 보호자와 가족은 무작정 안심하기 보다, 시간을 두고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며 향후 치매 진단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MCI 환자의 경우 처방되는 약물은 기억력 증진을 돕는다고 알려진 약이다. 이 약은 치료약이 아니라 보존적인 개념의 약이다. 약의 효과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있으므로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다. 약물 치료는 주치의의 판단에 따른다. 그렇다면 MCI 환자의 보호자와 가족이 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인지 학습'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3. 인지 학습

  MCI 진단을 받은 환자는 아직까지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서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이미 뇌에서는 퇴행적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중이므로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지책이 필요하다. '인지 학습'은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MCI 환자 뿐만 아니라 이미 치매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도 필요하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인지 학습은 뇌세포를 활성화시킨다. 물론 인지 학습만으로 MCI나 치매의 증상이 나아진다고 말하기 어렵다. 인지 학습은 치매 증상의 발현을 늦추고, 경도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보호자가 환자를 치매 안심 센터에 개설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시킬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시중에 나온 교재를 가지고 환자를 학습시킨다. 환자의 교육 수준에 따라 알맞은 교재를 선택해서 하루에 정해진 시간 동안 학습한다. 교재는 상식과 언어, 숫자 계산과 같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다양한 교재들을 살펴보고 환자의 교육 수준에 맞추어 선택한다. 거기에 더해 손가락의 움직임을 민첩하게 할 수 있는 색칠하기, 종이접기 같은 교재를 선택하는 것도 추천한다.


4. 치매 진단

  MCI 진단 후, 치매에 이르는 기간은 환자마다 다르다. 치매는 환자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심각한 정서적 충격을 준다.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라 하더라도 주변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감정적으로 동요할 수 있다. 무엇보다 보호자와 가족에게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명심해야할 사실은 '현재의 의학으로 치매는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라는 사실이다. 나을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갖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환자를 잘 보살필 수 있는지에 대해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낫다. 이를테면 환자가 보호자 없이 혼자 지낸다면 낮 시간에 어떻게 보살필 것인지, 집안에서의 안전 사고를 대비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일단 치매로 진단되면, 주치의와 상의해서 장기 요양 등급 판정을 받는 일이 필요하다. 등급의 정도에 따라 국가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금액이 달라진다. 치매 환자는 등급에 따라 정해진 금액 내에서 주간 보호 센터와 요양 보호사의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환자의 개인적 성향이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싫어할 수도 있다. 내 모친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럴 때는 보호자가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일상 생활을 점검하고 인지 학습을 돕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5. 맺는 글

  글을 쓰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지난 2년 동안의 일이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내 모친과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문제는 지나온 2년의 시간 보다 더 길고 어려운 시간이 남아있다는 데에 있다. 인생의 불운한 많은 일이 그러하듯 '왜(why)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일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even though) 어떻게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다.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내가 마음 깊이 새기는 만트라(Mantra)가 있다. 그것은 '오늘이 바로 최고의 날이다'라는 명심문이다. 내 모친의 기억력과 상태는 날마다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치매 환자에게 '오늘'은 최고의 좋은 날인 셈이다. 물론 환자와 가족에게 지치고 힘든 시간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런 시간 속에서도 환자와 가족은 일상의 작고 소중한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부드러운 미소, 인내심, 감사하는 마음... 매일 매일 어머니와 하면서 내가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이다. 치매 환자의 가족들이 힘을 내어 이 길을 잘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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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만 되면 나를 괴롭히는 고질병이 있다. 동창(凍瘡), 영어로는 'Chilblains'라고 부르는 이 질병은 낮은 온도에 노출되어 생기는 피부의 국소적인 염증이다. 주로 찬 공기에 노출되는 손과 발, 특히 발가락에 동창이 잘 생긴다. 일단 동창이 생기면 그 부위는 빨갛게 붓고 가렵다. 피부 조직이 괴사하는 동상(凍傷)과는 달리 동창은 잘 관리해서 치료하면 낫는 가벼운 질병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잘 낫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치료법이라고 해봐야 동창이 생긴 부위를 따뜻하게 해주고, 더이상 냉기에 노출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면양말에 두툼한 수면 양말까지 신고 털실내화를 신어도 동창이 생긴 발가락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피부과 의사가 설명하는 유튜브도 찾아보고, 동창을 앓은 이들의 블로그도 찾아본다. 그러다 인터넷의 어느 댓글이 눈에 띄었다.

  "동창에는 안티푸라민을 꼭 바르세요."

  뭐, 안티푸라민을 바르라고? 그거 근육통이나 타박상, 그런 데에 바르는 거 아닌가? 나는 구급약 상자에서 몇 년째 쓰지 않고 처박혀 있던 안티푸라민을 꺼내보았다. 놀랍게도 효능 효과에 '1도 동상'이 있었다. 그렇다. 안티푸라민은 동창에도 쓸 수 있다. 안티푸라민의 주성분은 살리실산 메칠, 이 성분이 소염 진통 효과가 있으니까 염증 반응인 동창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넘게 써봤는데, 나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사실 동창에 잘 듣는 연고가 딱히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어느 약사는 동창에 쓸 연고를 달라는 손님을 돌려보낸 이야기를 썼다. 그 약사는 어떤 연고나 약을 권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구태여 찾는다면 부기와 염증을 가라앉힐 수 있는 저용량의 스테로이드 연고, 거기에 더해 가려움증을 덜어줄 수 있는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는 연고 정도가 괜찮을 것이다. 결국 이런 저런 정보를 취합해서 내가 쓴 방법은 이렇다. 아침에는 안티푸라민, 오후에는 저용량의 스테로이드 연고, 저녁에는 항생제 연고를 차례대로 발랐다. 이 기이한 자가 처방으로 연고를 며칠 써보아도 그다지 차도가 없었다. 

  물론 나는 이 질병의 특효약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봄'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기온이 오르면 동창은 저절로 낫는다. 겨울 내내 빨갛게 붓고 아프고 감각이 이상해졌던 발가락들은 다시 멀쩡하게 돌아온다. 얼었던 강물이 풀리듯, 발가락에 스며들었던 냉기가 사라진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낫지 않은 발가락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어서 빨리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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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2-14 23:20   좋아요 0 | URL
저도 겨울이 싫네요
겨우내 발이 시려워요 ㅠㅠ
발 아래 히터 필수!
얼른 따뜻한 봄이 와서 푸른별 님 동창이 낫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제발도 시렵지 않게 ...^^

푸른별 2023-02-15 14:15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따뜻한 댓글, 고마워요. 어제 동네 화단의 매화 나무를 보니 꽃이 필 것 같아요. 봄이 그렇게 오고 있네요.
 

 

  1월달부터였던 것 같다. 글을 쓰려고 하면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의 경우 일반적으로 한 30분 정도 가만히 모니터의 화면을 바라보다 보면 첫문장이 써지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1시간을 깜박이는 워드 프로세서의 커서만 들여다보다 컴퓨터를 끄는 날이 이어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영화 리뷰 한 편 쓰는 것도 버겁게만 느껴졌다.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그냥 글쓰는 것을 마냥 미뤄두게만 되었다.

  우연히 인터넷의 어떤 글을 읽다가 'Writer's Block'이란 단어가 눈에 띄었다.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 구글로 검색을 해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지난 1달 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음을. 글 쓰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고질병 같은 것. 'Writer's Block'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전까지 글을 잘 써내던 사람이 글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일종의 잠시 멈춤, 중단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Writer's Block'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기 때문에 무엇 때문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그 원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장벽을 맞닥뜨리게된 당사자일지도 모른다. 글을 쓸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일 수도 있고, 글을 쓰는 공간의 문제일 수도 있다. 글쓰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상의 골치아픈 일들도 장벽의 벽돌이 된다. 문제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워낙 많다 보니, 해결책이라는 것도 각양각색이다. 그 가운데에는 자신이 쓰던 글의 장르와는 다른 것을 써보라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소설을 쓰던 사람은 시를 써보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다잡게 했던 조언은 이러했다. 어떻게든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30분이든 1시간이든 정해진 시간에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어떤 글이든 하루에 조금씩이나마 써낸다. 그래서 나는 영화에 대한 글이 써지질 않으니, 오늘 이렇게 Writer's Block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내 앞에 터억 하고 자리잡고 있는 담벼락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없다면 하나씩 벽돌을 치워가는 수 밖에 없다. 당분간은 어떻게든 무슨 글이라도 써서 이 위기를 극복해야한다고 마음먹었다. 포기하고 미루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혹시 지금 'Writer's Block'을 마주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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