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데 이제 막 담근 것처럼 보이는
김장 김치 한 포기가 버려져 있다 왜 버렸을까?
고춧가루 양념이 적은지 그 배추는 허여멀건했다
맛이 없어서 그런 건가? 고춧가루를 좀 듬뿍 넣고,
젓국도 좋은 걸 쓰고, 갓도 싱싱한 것으로 썰어넣어야지
버려진 김치에서도 나는 엄밀하게 맛을 감지해낸다
2주일째 베란다 우수관으로 흘러내려가는 어느 집
배추 절인 물냄새를 맡으니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제는 아랫집에서 멸치젓국을 끓였는데, 그 역겨운 냄새가
온 집안에 광기처럼 스며들었다 남도 사람인가 보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엄마도 김장을 할 때 그렇게 멸치젓국을 끓였다
이제 엄마는 김장하는 법을 잊어버렸고, 나는
엄마에게서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매운 것을 먹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김치 없이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도 엄마의
친정에서 보내준 남도 김장 김치 한 쪽을 대충 잘라서
밥도 없이 그냥 먹었다 알싸한 눈물이 나는 맛이었다
김장을 해서 택배 상자가 터지도록 꽉꽉 눌러서 보내준
오래전 그 엄마의 마음이 있던 날도 함께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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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베란다 앞쪽 감나무는 올해 그 혹독한 여름 더위를
견뎠다 가을로 넘어가면서 감이 주홍색으로 익어갔는데,
그것이 멀리서 보면 고운 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감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마도 그 감나무에
눈독을 들인 누군가가 죄다 따서 가져간 것 같았다
화단은 주기적으로 수목 소독을 하는데, 독한 농약
뒤집어쓴 감을 따다가 뭘 얼마나 먹겠다고 저러는가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밖에서 웬 남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큰소리를 쳤다
동대표 마누라면 다야? 어디서 경비를 종 부리듯 부려?
울그락불그락한 남자 옆에서 늙고 키 작은 경비 할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네가 뭔데 참견을 해?
여자도 지지 않고 뻔뻔하게 대거리를 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동대표 마누라가 경비에게 감을 따게 시켰던 모양이다
그걸 본 어떤 주민이 분노해서 그렇게 싸움이 벌어졌다
감나무를 보면, 가끔 그 일이 생각난다 올해는 감이
풍년이라 감도 싼데, 소독약 범벅인 감나무에서
감을 악착같이 따가는 사람이 있다 그나마 따기가
힘들었는지 꼭대기에 감 한 개가 덩그마니 남아있다
겨울에 새들이 잠시나마 단맛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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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은 머리를 자르러 가야 한다
시장 뒷편에 있는 작은 미용실은 언제나 손님으로 복작댄다
9시, 미용실 아줌마가 문을 여는 시간이다 시장통(市場通)은
한산하다 그래도 댕기 머리 여자의 가게는 손님이 좀 있다
여자는 십몇 년째 댕기 머리 가발을 쓰고 있다 가발에는 언제나
먼지가 그득했다 하지만 가져다 놓은 채소는 정갈했고, 가격도
저렴했다 그래서 손님이 많은 것이다 전에는 좌판에서 팔더니,
이제는 번듯한 가게도 갖고 있다 여자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아들 하나가 법대에 갔다고 자랑했다 이제 세월이 흘렀으니
그 법대를 졸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자의 먼지 낀 댕기 머리는
여전했지만, 찌들린 얼굴은 조금 펴졌다 조금 지나가면 반찬 가게가
나온다 그 집에서는 전도 부쳐서 파는데, 더럽게도 맛이 없다
어느 해 명절에 엄마는 더이상 제사 음식을 만들지 않겠다며,
그 가게에서 전을 샀다 그 집 전에는 맛의 영혼이라고는 1그램도
들어있지 않았다 주인 여자는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여자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재혼했는데, 새 남편의 재산을
자기 아들 앞으로 해놓으려고 애를 썼다 새 남편의 자식은
구박을 받고 산다고 들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소문이란 연기처럼
흐르며 스며든다 드디어 미용실이 보인다 가게 문 앞에 덥수룩한
머리의 중년 남자가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다 남의 가게 앞에서
저게 뭐람, 그런데 미용실의 네온등이 돌지 않는다 가게 안에는
수건이 줄줄이 널어진 건조대가 보였다 10시에 온대요, 10시
남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남자도 아침 일찍 머리를
자르러 와서는 미용실 문이 닫혀 있으니 짜증이 치밀었을 것이다
남자의 외투에는 허연 시멘트 가루가 묻어 있었다 몸을 쓰는 거친
일을 하는 모양이다 오늘 머리 자르는 일은 글렀네 나는 얼른
발길을 돌린다 다음번에는 아줌마가 제 시간에 나오겠지
늘 TV 조선을 틀어놓고, 야당놈들은 죄다 나쁜 놈이며, 돈 벌어서
땅과 집을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 미용실 아줌마의
정갈한 커트 솜씨는 여전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시장통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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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


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며칠 후,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서
고 3학생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투신
자살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청소년 자살에 대한 다큐를
만들려고 준비를 했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알아낸
중요한 사실은 청소년들이 죽음을 결심할 때 아주 확실한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었다 청소년 자살에서 투신자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느 과학고등학교에서
여고생이 투신자살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죽음의 이유를 캐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좋은 다큐를 만들겠다는 내 결심은 공수표(空手票)가 되어
멀리멀리 날아갔다 아주 가끔, 나는 그 여고생이 왜 죽었을까,
생각하곤 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살아있는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많은 죽음이 어스름 저녁놀처럼 금세 잊혀진다
죽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다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그들은
다른 길을 향해서 걸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부서지고
잃어버리고 병들고 시간에 뒤틀린 다리를 질질 끌면서 묻는다
살아있어서 행복한가? 다른 길이 낫다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어차피 죽음은 뚜벅뚜벅 다가온다 죽음을 향해 더 빨리 달려가지
않겠다고 자그맣게 되뇌면서, 오늘도 옥상에서 바람의 방향을
가만히 가늠하는 너에게 다른 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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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락할미새


과일칼을 씻다가 엄지손가락을 쓱, 베었다
칼이 들어오는 느낌은 너와의 이별과도 같다 이 칼은
주름이 진 칼이라 손가락 안쪽에 주름의 상처를
만들었을 것이다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온다
왜 다쳤을까? 딴 데 정신이 팔려서 그랬을 것이다
널 생각했기 때문이다 엊그제 꿈에 알락할미새가 보였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느리게 빠르게 기울이며 새는
쓰레기통 위에 잠시 앉았다 그러다가 날아가 버렸다
나는 알락할미새의 소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새는
곁을 쉽게 주는 새가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준 손톱 같은
곁을 생각했다 손톱이 부러졌고 너는 날아갔다 나는
쓰레기통 앞에서 붉어진 눈으로 오래도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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