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엄마, 왜 티셔츠를
쓰레기통에 버렸어?

몰라

23-8은 얼마지?

글쎄다 그 답이
당최 생각이

엄마는 1부터 89번에 이르는
점을 잇는다
커다란 귀상어가
스르륵

얘야, 이건 무섭구나

엄마는 이제 
TV 속 트로트의 나라로

쟤가 새로 나왔는데
노래를 잘하네

사라지는 겨울
엄지손톱만큼 뭉크러진
단감 하나 식탁에
두고 나온다

쥐똥나무 근처에서
멀리뛰기하는 까치
까치 까치 아빠
엄마를 좀 데려가 줘

툭툭
툭 툭툭
투투투 툭
부정맥의 심장
다독이며

오후 6시
시 쓰기에
가장 좋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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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있는 유모차


늙은 여자가
유모차를 끌고 간다
흰색의 작은 강아지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자식들은
지들 밥벌이로
바쁘겠지
어미의 물크러진 마음
강아지 유모차에

아니, 어쩌면
자식이 없었을 수도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 아닌가
그건 아닌가

요양원의 어느 할머니는
질투심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저 할멈은 자식들이
그토록 열심으로
들여다보는데
난 아무도 없어
외로움은
마침내 살기(殺氣)로
어버이날을 기다려
숨을 끊어버린

요양원에서 키울
강아지 한 마리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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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비


아픈 발을 절뚝이며
집을 나선다
우편함에는
관리비 고지서와
부활 판공성사표가
들어있다

오래된 아파트 관리비는
돈을 먹는 하마
성사표(聖事表)는
집 나간 신앙심을
가냘프게 부르지만
호주머니에 구깃구깃

단지 구석탱이의
매화나무
슬금슬금 느린
도둑처럼 내리는 비
사람들 볼까 몰래
가지 하나를 똑

집에 돌아와
유리 화병에 꽂는데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꽃봉오리가 후두둑
가난한 봄을 들여놓는 일은
이토록 모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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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온도


최근 과학 기사를 읽으니
우울한 사람은 체온이
좀 높다고 하더군 

오래전 울화병을 앓았지
매일 청소해도
귀신처럼 쌓이는 먼지
열기는 혈관을 타고
온몸을 들쑤시지

한의사가 길다란 침을
목과 가슴에 비스듬히
꽂았어 작은 침은
손과 발에 수직으로
온 몸뚱이에 핀을 꽂은
박제된 박쥐

동굴 너머의 하늘은
너무 멀어
불안의 온도는
날개를 태우고
눈알만 덩그라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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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위한 문


5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상한 문이 벽에 딱
붙어있었다

그걸 만든 사람은
작가를 위한 문
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5개의 손잡이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른 후
작가를 위한 문에는
단 한 개의 손잡이만
남았을 뿐이었다

건물이 철거되면서
작가를 위한 문은
인정사정없이
뜯겨졌다
부서진 건물 사이를 헤치고
작가는 그 손잡이를 찾아서
들고 나왔다

저 멀리 흐르는 강물에
손잡이를 내어던지니
널따란 그물이 되어
온갖 것들이 걸려들어 온다

한쪽 눈을 잃은 물고기와
낚싯줄에 발이 잘린 거북이
배가 부어오른 복어는
연신 푸른 피를 토해낸다

아무도 너희들을 원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내쉬어 보는
숨의 온기는
손잡이에
작가는 그것을 잊지 않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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