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개새끼들의 면상을 똑똑히 기억해둬라
모두 아시다시피, 어제는 용산 참사에 관해 재판부의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첫 선고가 있었다.
재개발토건공화국 대한민국의 악마성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와중에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망루에 올랐던 이들은 테러리스트가 되고 범죄집단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경찰에게는 물론이지만, 이제 그들은 대한민국 사법부에게도,
절대 '국민'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간다고 할 때 과연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몇 명이나 남게 될지,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계산기'를 잘 두드려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대로는 섭섭했던지, 이에 질세라,
슬픔과 분노와 허탈감에 빠져 있을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오늘은 헌법재판소에서 우리 '국민'에게 큰 웃음 선사하는 한 건을 터뜨려 주셨는데,
미디어법 통과 위헌 청구 심판에 대한 결정문이 바로 그것.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절차의 위법성은 인정되나, 법안의 효력은 유효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금과옥조와도 같은 '시적(詩的) 역설'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는데,
헌재의 이 눈부신 시학(詩學) 앞에서 현대 한국문학의 시인들은 처절하고 철저하게 반성할지어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희대의 히트작을 뛰어넘는 시대의 명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이 극단적 '문학성'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근본적 물음 한 자락:
절차가 위법인데 어떻게 바로 그 위법적인 절차에 의해 통과된 법안의 효력이 유효가 될 수 있을까?
국회 안에서 쟁의 중인 대상은
그 책임소속인 국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소위 헌재의 '점잖은' 소견이라는 것인데,
그럴 거면 헌법재판소라는 국가기관이 도대체 왜 필요한 건지,
헌재는 자신들의 정당성과 당위성, 필요성에 대해 그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 이후 성립된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정부의 기본적 체제를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그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사법부는 그 스스로, 권력의 '시녀'는커녕, 이젠 아예 권력의 '주구'가 되고 있지 않은가.
그럼으로써 사법부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명제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사법살인'의 망령이 부활하고 있음을 느끼는 건, 나만의 공상이며 망상인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오늘> 기사의 표현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헌재의 결정은 "위조지폐는 분명한데 화폐는 맞다는 식"인 것이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864
또한 나의 한 블로그 이웃 분께서 이러한 헌재의 결정에 관해 아주 명쾌하게 정리해주셨다:
http://bookgram.pe.kr/120093684973
정치적으로 부끄럽고 비겁한 판단을 한 것이 분명한데도,
헌재는 이를 스스로 '순수하게 법리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고매하고 고상하며 '법치주의'에 충실했다고 강변한다.
법치(法治)가 법치(法痴)가 되었고 또한 법치(法恥)가 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제의 재보궐 선거에서 강원 강릉과 경남 양산의 '국민'들은
또 다시 한나라당 후보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했다.
부디 '부자 되시길' 빌겠다.
수도권에서는 민주당의 승리라고들 말하지만,
현재 우리가 민주당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상황인 것도 아니다.
자, 이제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고민을 넘어,
이젠 사법부의 비겁함과 삼권분립의 정당성까지 생각해봐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생각과 사유의 재료는 '분에 넘치게' 차고 넘쳐나는 셈이다.
이토록 생생한 정치적 사유의 거리를 던져주는 정부와 국회와 사법부에게
우리 '국민'들은 감사해야 하나? 그것도 세 배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레닌이 1901년에,
이보다 앞서 체르니솁스키가 1863년에,
이미 절실하게 던졌던 물음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오늘 우리는 이 똑같은 질문에 다시 새롭게 대답할 수 있을까?
ㅡ 襤魂,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