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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일기 - 2010년 - 2014년
박용하 지음 / 체온365 / 2015년 9월
평점 :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기행'은
지난 10년간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강렬한 책이었다.
그의 글은 내 피를 자극했다.(29)
여러 날에 걸쳐 막스 피카르트의 '인간과 말'을 읽었다.
매혹적인 책, 그의 '침묵의 세계'와 쌍벽을 이루는 책.(262)
이러면 읽고 싶어진다.
작가의 '오빈리 일기'에 비해
이 일기의 시대는 더 참혹하다.
왜 안 그럴까.
강물은 썩어 들어가고, 세월호는 원한인데...
가고 싶지 않은 섬처럼 떠 있는 이웃들.
내 나라에서는 이웃들,
그것도 이웃이란 이름의 탈을 쓴
양심불량들 때문에 피가 역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142)
이제 시골도 더이상 예전같지 않나보다.
농촌 공동체는 변함없던 시절 이야기고...
사람들 사이의, 그 섬에 가고싶다던 시도 있었는데,
가고 싶지 않은 섬이라니...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네루다)
언제나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을 위해 울어줄 신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155)
그래서 시인은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야 한다.
인간의 문제를 울어줄 '곡비'는 시인이니...
그 조선 위선녀는 자위대 원숭이가 아닌 것처럼 군다.
악평 말고는 할 게 없다.
속이는 기술보다 속지 않는 기술이,
사기치는 기술보다 사기당하지 않는 기술이 먼저다.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고
원군은 당나라 군대다.(164)
자위녀에 대한 이야긴가보다.
주어는 없지만.
요즘에도 악평 말고는 할 게 없다. 완전 썅년이다.
지난 5년간 예민과 과민 상태로
걸핏하면 분노와 고압 상태로
자주 나는 내 일상을 파괴했고 망쳤다.(185)
아, 나도 그랬다.
예민, 과민, 분노, 고혈압이었다.
요새도 화나지만
그건 정당하다고 여겨지니 좀 낫다.
과거 없이는 현재도 없고 미래 역시 없다.
우리는 어제에서 태어나 어제일 오늘과 오늘일 내일로 살러/죽으러 간다.
'화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입에 담는 자나 세력은
가해자거나 가해의 역사를 가진 것들이고,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지금도 죄를 짓는 2차 가해다.
꿈에서라도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죽을 때까지 피해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화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절대 이유.(189)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화해'라는 가해자로 박근해가 떠오른다.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서 불가역적 화해를 내밀던 미친년이 있었으니...
주체, 타자, 라캉, 들뢰즈...를 언급하지 않으면
글이 안 되는 족속들을 뭐라 이름 붙일까?
읽는 시늉을 한다. 질린다.
약간 들린다. 질리는 게 들리는 게다. 닝기리.(208)
맞다.
동서 냉전이 동구의 몰락으로 서구의 우세로 밀어붙여질 때,
세상을 설명하는 저자들이 등장했다.
질린다.
나도 읽어도 모른다.
왜 이리 이 화가에 이토록 끌리는 것일까?
이 화가의 무엇이 단박에 나를 체포한 것일까?(238)
에드워드 호퍼를 늦게서야 알았나보다.
그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호퍼의 그림엔 있다.
전근대와 농촌, 가난의 그늘을 벗어난
현대와 도시, 부유함의 양지에 드리운 또다른 차가운 그림자가 호퍼의 그림이다.
평론가는 박수치는,
편파적으로 박수치는 사람이다.
이름하여 문학 변호사.
시인을 기억하는 건 시인이다.(269)
맞다.
시집 같은 곳에 평론이라고 붙는 글들은
많은 경우 췌언이다.
사족이다.
아니, 변호사가 없으면 1달 만에 기소유예로 나올 거,
변호사 사면 30일만에 기소유예로 나오는 거나 마찬가지로,
문학 변호사는 돈만 들 뿐인지 모르겠다.
그의 시 세계는 어떨지, 기회가 되면 한번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