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빈리 일기
박용하 지음 / 사문난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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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사는 시인, 박용하.

주로 논둑길을 걷다가 뛰고는 한다.

그리고 캔맥주를 여덟 개, 열두 개, 열네 개,

마시고 뻗는다.

 

2009년, 그 해엔 유독 속상한 일이 많았지.

전임 대통령의 죽음을 맞았고,

용산 사고도 있었지.

사대강은 파헤쳐지기 시작했고...

 

그러나, 꽃들은 지천으로 피었고,

열매를 맺어 살구를, 앵두를, 홍시를 매달았으며

쪽파, 마늘, 배추, 호박꽃조차 빗속에 아름다이 피워올렸다.

 

인간처럼

뜨겁고 쓸쓸한 나무도 없을 테지만,

 

내 속에 너무 많은 인간이 들어와 있다

그게 나를 망치고 있다(221)

 

텔레비전이라곤 EBS가 좀 볼만하다는 말도 아프게 들리고,

그의 음주벽은 고통스런 현실을 사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주변에는 욕심없는 노인들로 가득하지만, 세상은 또 뜨거웠다.

 

우리는 아직도 시민 이전에 있고,

시민 의식 이전에 있고

시민 사회 이전에 있다.

이슬만한 양심 이전에 있다.(118)

 

그런 시대였다.

비루한 시대였고, 슬프지만 무릎꿇던 시대였다.

 

하루가 일생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절박한 게 또 있을까(168)

 

오빈리라는 마을에서

하루를 사는 일은 물음표의 나열이다.

 

오후에 오빈리 십만 평 황금빛 들녘을 걸었다.

메뚜기도 심심찮게 뛰었다.

뛰지 말고 걷고 싶은 날씨였다.

천지사방이 그윽한 빛의 잔치였다.

빛이 물들고 있었다.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다. 그리고 멸할 것이다.

저녁에 동쪽 산마루 위로 솟아오르는 보름달을 옥상에서 지켜봤다.(199)

 

그렇게 하루씩 사는 시인의 일기는 슴슴했다.

그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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