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이 아픈 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476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오페라에 비유한다면

오늘날의 시는 멋진 아리아가 될 수 없다.

시인이 아직도 무엇인가 읊조린다면

그것은 레시터티브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래와 연기를 연결시키며 오페라를 끌고 가는 레시터티브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판소리에서 아니리르 빼놓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으로만 판소리가 될 수 없고,

아리아만 가지고 오페라를 꾸밀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주어진 위치에서 시가 예술로서의 필연적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뒤표지, 시인의 말)

 

멋진 시론이다.

시가 독재자를 벌벌떨게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대학생들이 허리춤에 끼고 다니며 탐독하던 시대도 지나갔다.

이제 시집은 가난한 시인이

탁발승에게나 건네줄 법한 것으로 추락했다.

 

이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 그럼

말로 절을 짓는

시인이 살고 있단 말인가(고금, 부분)

 

종심소욕불유구... 마음에 따라 하고자 하는대로 해도, 절도를 넘지 않더라는 공자의 말에 따라,

70을 종심으로 부르는데,

이제 일흔을 넘은 그의 글들은 해설을 쓴 이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자꾸 죽음을 기웃거린다.

예측할 수 없던 그때의 앞날이

어느새 슬픈 옛날로 굳어버린 오늘

시간의 긴 흔적 간곳없고

온 세상이 조여드는 듯

마음은 왜 이렇게 답답한지(지나간 앞날, 부분)

 

동숭동과 이화동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젊은 날을 돌아보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나이를 먹어 이제 지나간 앞날이 되었다.

 

김치수 선생의 영전에서 웅얼거린 시

 

우리도 곧 갈 터이니

기다려주게 그대 가 있는 곳

어디인지 아직도 모르지만(그대 가 있는 곳, 부분)

 

지독한 아픔도 잠깐

몸이 어딘가 차갑게 굳어졌다

눈앞의 바깥 세상이 덜컥 닫히고

물속에 가라앉은 노란 조약돌이 보였다

조상의 잔해와 같은 색깔

처음 보는 세상의 안쪽

여기까지 오기에 얼마나 걸렸나(여기까지, 부분)

 

삶의 끄트머리가 가까워오는 지점에서 쓴 시들은

날카롭고 서늘하기보다 다소 안온하다.

 

외지에서 포도주를 너무 마셨나

아니면 그 검은 시간이 나에게도

성큼 다가온 것일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다가오는 시간, 부분)

 

비행기에서 잠시 실신한 뒤 쓴 시와

수술실에서 마취당한 기분을 쓴 시들이다.

 

세상이 온통 길인 것 같지만

걸어 다니기 힘든 나라

진실로 사람이 가야할 길은

길 없는 길 아닌가(길 없는 길, 부분)

 

몽골에서 느낀 이야기다.

삶을 살아보면,

주어진 길을 따라 걸어온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캄캄한 밤과

안갯속을 헤치고 온,

돌아보면, 길이 아니었던 곳을 길삼아 걸어온 것이다.

 

밀려왔다 물러가는 파도 앞에서

통곡하는 수밖에 없는가

*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지금까지 '그렇다' 아닌가.(바다의 통곡, 부분)

 

세월호 앞에서

짐승만도 못한 어른들을 돌아보는

치욕이 통곡으로 남아있는 시도 담겨 있다.

 

나이가 들면 오른손만 아프겠는가.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울음이 타는 가을강처럼,

속이 새까맣게 타는 일이 나이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김광규의 젊은 시들이 발산하던 풋풋함과는 다르지만,

삶을 응시하는 눈빛이 훨씬 누그러졌고,

힘은 쫙 빠졌지만,

돌아보는 힘이 느껴지는 시편들이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