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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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없었던 색을 빚어내듯이

나는 이미지와 사유가 서로 스며서

태어나는 새로운 언어를 도모하였다.

몸의 호흡과 글의 리듬이 서로 엉기고,

외계의 사물이 내면의 언어에 실려서 빚어지는 새로운 풍경을 나는 그리고 싶었다.

그 모색은 완성이 아니라 흔적으로 여기에 남아 있다.(개정판을 내며 중)

 

김훈의 초기 수필들이다.

여행 다니면서 남긴 글들도 있고,

시론의 형식을 띤 글들도 있다.

이제는 다양한 소설들을 통하여,

'칼의 노래'도 '현의 노래'도 익숙하고,

'젊은 날의 숲'속에서 헤매이던 시간도,

'남한산성'의 굴욕적 시간도

'흑산'의 검은 빛이 '현산'이 되기까지 농익은 작가가 되었지만,

초기의 글들은 그의 직선적인 사변이 잘 담겨 있다.

 

그의 소설들과 '자전거 기행'을 모두 품고 있는 잠재태가 이 책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필이면 묵어버린 논이나 밭의 가장자리,

경작할 수 없는 야산의 비탈처럼 버려진 자리만을 골라서 서식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습기가 빠져가는 땅이 메말라지면

그 척박한 자리에서 그것들의 삶은 한 해의 마지막 햇볕 아래서 바래어진다.

바래어지는 삶의 고통을 일끌고 그것들은 가벼움을 완성해 낸다.

그것들의 목숨 안에서 무게의 총화가 가벼움이고,

습기의 총화가 메마름이다.

초겨울의 마른 들에서 그것들은 헛것의 투명함과 헛것의 가벼움으로 바람에 흔들린다.

그것들은 빛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숙일 수 있는 머리를 끝까지 숙이지만,

그것들의 뿌리는 바람에 불려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에 시달리면서, 바래고 사위면서,

그 시달림 속으로 풍화되면서, 생사의 먼지로 퍼지고 번진다.(166)

 

'억새 우거진 보살의 나라'에서 묘사한 억새다.

이 억새를 읽노라니, 이제 나이가 든 김훈의 모습이기도 하고,

이 땅의 민중이기도 하다.

마치 김수영의 '풀'을 확장하여 읽는 느낌인데,

그것이 '운주사'와 어울렸으니, 말이 필요없다.

합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없었습니다(서시, 이성복)

 

이성복의 '남해 금산'에 맞대어, 서시를 읊는다.

마지막에 실린 시는 이렇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강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남해 금산, 전문)

 

'한 여자'가 '그 여자'가 되는 과정,

화자가 돌 속의 여자를 만나러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 여자 떠나간 자리에,

나 혼자 남은 시.

그를 둘러싼, 푸른 하늘가,

그와 함께한 푸른 바닷물...

 

이것들은 남해 금산에 오른 사람이면 아~ 하고 느낄 문장이다.

'한 여자'와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멋지다.

 

한 여자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여자로 떠오르기 이전의, 여자의 고통스런 잠재태이다.

'한 여자'는 모든 여자일 수 있지만,

 '그 여자'는 다시 태어나서우리에게 안겨야 한다.(86)

 

한 여자와 그 여자로 두 페이지를 채운 김훈도 굉장하다.

 

저녁 무렵의 바다를 한나절씩 들여다보는 일뿐이었다.

시간과 교접하는 바다는 수많은 색깔로 다만 흘러가고 흘러올 뿐이어서

내 가엾은 친구는

올 여름 내내 기름 물감을 배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택은 곧 배반일 것이었다.

유화를 버리고 수묵화를 해야 할까보다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름으로 그리기를 버리고 물에 찍어서 그려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그것은 물이냐 기름이냐의 문제가 아닐세."

더위와 매미소리가 한도 없이 남아 있는 여름의 한복판이었다.(73)

 

바다를 그리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멈추지 않는 시간을 잡는 일만큼이나.

그래서, 그것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삶도 그렇다.

너희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이' 균형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현종'에 주목한다.

 

잠과 각성 사이의 표정처럼

무서운 건 없다

그 모습처럼

참담한 건 없다

모든 '사이'는 무섭다

모든 '사이'는 참담하다(모든 사이는 무섭다, 전문)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전문)

 

이런 '사이'는 人間의 '사이 간'이기도 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균형은 늘 깨어지기 쉽다.

쨍그랑, 유리가 깨어지듯,

금세 금이 가고 갈라진다.

 

물이냐, 기름이냐의 문제가 아닌 곳.

너희와 우리의 사이가 문제인 곳.

 

그것이 인간 세상인 모양이다.

 

김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초기 그의 문체를 버석거리며 쓸어 보듯 느낄 수 있는 글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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