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편지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안문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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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가기로 해서 지하철을 한참 타야 하는데

무거운 책은 나중에 짐이 될 거고... 가벼운 이 책을 넣고 갔다.

지하철에서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세상을 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실감한다.

 

이 책에서는 릴케가 <젊은 시인>과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있는데,

생전에 릴케가 얼마나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을 얻고 싶어했던가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요즘 릴케가 블로그를 열었다면,

정말 많은 젊은 시인들과 여성들이 열화와 같은 공감을 보냈을 것이다.

아니다.

요즘처럼 공감의 기회가 흔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그런 천부적 재능이 시기의 대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발전 과정을 조용하고 진지하게 성숙시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시선을 향하고 바깥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당신의 발전을 심하게 해치는 것도 없습니다.(12)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해명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마십시오.(40)

 

고독한 시인에게

세상의 관심을 얻기 전까지의 시간은 고독을 더 깊게하는 시간일 것이다.

 

자신을 너무 많이 관찰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부터 너무 성급한 결론을 끌어내지 마십시오.

무슨일이 일어나든 가만히 내버려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고 질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63)

 

타인의 시선뿐 아니라 자신의 욕심과 질책 역시 독이 될 수 있다는 충고다.

후배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편지를 읽는 지하철은,

복닥거리는 시정잡배들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쓸쓸하고 한적한 공원의 벤치라 느껴질 만큼 그의 글을 읽는 시간들이 좋았다.

 

마음을 울리는 부인의 아름다운 편지.

그 편지는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는데도 부인께서는 너무나 겸손하게 뒤로 물러나셨지요.

부인은 그 편지 끝에 내가 그 편지를 '친절하게'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실에 더 가까우려면,

부인께서는 '기쁘게'라고 쓰셨어야 합니다.

그 '기쁘게'라는 단어도 대문자로 쓰셨어야지요.

부인이 전하는 소식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를,

부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부인께서는 순수하고 강한 사실의 종을 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인이 그토록 정직하고 확고하게 그 사실의 종을 울리시면

이곳에 있는 나도 음향, 그 종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공간 속에서 어떤 본질을 자유롭고 드넓게 차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101)

 

연애편지도 아닌데,

이렇게 진심을 담은 달콤한 기쁨을 표현한 글을 읽는 일은 복되다.

It's my pleasure!!! 를 넘어서 It's my golry...라는 마음이 철철 넘친다.

편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야 하던 시대의 공감 결핍이 오히려 감정의 과잉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부인의 표현은 그것을 다시 받아들일 때마다 늘 새로웠습니다.

나는 그 표현이 마치 심장박동처럼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을 그 위에 얹어 보면,

그것은 유일하면서도 일반적이고,

그토록 가까우면서도 닿을 수 없고,

풀어볼 수 있는가 하면 동시에 부를 이름조차 없습니다.(116)

 

실제 작가들은 어눌한 경우도 많다.

이토록 뜨거운 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뜨거운 심장의 맥동을 펄뜨덕거리는 펜으로 옮길 수 있었던 대뇌의 힘일 게다.

상대방의 뜨거운 열정적 시선앞에서는 그저 땀에 흥건히 젖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뭐라고 하는지 스스로도 모를 말이나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두 고독한 인간이 각자 내면 확장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는 관계다.

고독과 성숙과 사랑.

이 세 가지 의미의 긴밀한 연관 관계야 말로 릴케의 중심 주제다.(해설, 133)

 

 

시를 노래하는 마음은,

고독에서 비롯하기 쉽다.

고독에서 비롯된 성숙,

그 시선떨림은 사랑 앞에서 비로소 심장박동처럼 살아 숨쉬는 언어가 되어

은빛 비늘을 뽐내는 가을 강물 위로 튀어오르는 은어처럼 아름다이 빛날 것이다.

 

가벼워서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그렇지만 기쁨으로 가득 충만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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