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0시 5분 문학과지성 시인선 R 9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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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1

 

아픔은 내가 잘 모르는 언어로 말한다.

한참 들어도 감을 못 잡겠다.

가지 잘리고 입을 꽉 다문 나무의 소리 같기도

침묵에서 나오는 소리 같기도 하다.

다시 귀 기울인다.

 

시인의 예민한 귀로도 잘 못 알아듣는 언어가 있다 한다.

세상의 아픔은 귀 기울여 들어도

쉽사리 들리지 않는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 다이빙 수경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겨울밤 0시 5분, 부분)

 

그래.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겠다.

간절한 사람 곁에서 말이다.

반성한다.

 

이 책은 절판된 것을 다시 펴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각 부의 앞에 쪽지를 넣었다.

그 쪽지는 나름 작가 스스로의 리뷰역할을 하는 시 구절이 된다.

그 쪽지가 첨언이기도 하면서,

또한 방향타이기도 하다.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삶의 맛, 부분)

 

면역이 떨어지면 자주 앓는다.

조금만 아파도 참 불편하다.

그러다 낫는 날엔 정말 홀가분하다.

지난 주 내내 기침이 났다.

온 나라가 메르스 여파로 흔들대던 때, 기침은 참 민망했다.

언젠가 스르르 낫는 맛, 제일의 맛일지도...

 

쪽지 3

 

처음에는 꽃을 좋아했고, 다음에는 나무를 사랑했다. 그러다

점점 땅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땅은 꽃이나 나무처럼 쉽게 자신

을 드러내지 않는다. 땅에는 형태가 없다. 받쳐주는 힘이 있을

뿐이다. 아파트와 산책길을 덮고 있는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도

열고 땅을 만져보고 싶다.

 

언젠가 밝은 낙엽이 되어 땅에 입 맞추겠지.

 

낙엽이 될 미래가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기다려지는 심사다.

    

이끄는 발길 따라 조심조심 대웅전 뒤로 돌아가본다.

환하다.

땅바닥에 큰 타원 수놓으며 깔려 있는 저 융단, 저 이끼,

저 색깔!

몸 오싹할 만큼 마음을 쪽 빨아들이는,

그냥 초록도 아니고 빛나는 연초록도 아닌

그 둘을 보태고 뺀 것도 아닌

초록 불길 속에서 막 나온 초록 불길 같은,

슬픔마저 빼앗긴 밝은 슬픔 같은,

이런 색깔이 이 세상 어디엔가 있었구나.(안성 석남사 뒤뜰, 부분)

 

엊그제 읽은 마종기의 시집 제목도 마흔 두 개의 초록이었다.

나이든 이들의 망막에 느껴지는 초록은,

흔한 여느 초록이 아닌가 보다.

이제 막 나온 초록 같은,

밝은 슬픔 같은 초록...

 

 

 

쪽지 4

 

마음을 다스리다 다스리다 슬픔이나 아픔이 사그라지면

기쁨도 냄비의 김처럼 사그라지면

저림이 남을 것이다.

 

통증보다 강렬하지는 않으나,

그 아련한 지속으로 치자면, ‘저림이 더 오랠 것이다.

통증의 지속형이 저림일 듯 싶다.

 

   하루만 석굴 속에서 참선하게 해달라는 내 청을 주지는 받

아들이지 않았다. ‘이곳은 거사 같은 분이 밤을 보낼 곳이 못

됩니다. 젊었을 때부터 돌과 함께 숨을 쉬어본 적이 없는 사

람은 돌 빛에 큰 병 들지요.’

 

손전등 빛 속 바위들의 감촉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속삭

였다. ()가 채 들어와 박히기 전 무 생각의 화강암 무늬

!(무굴일기 1, 부분)

 

마이클 코넬리의 로스트 라이트에 보면, 동굴 속에서 캄캄한 속의 빛을 더듬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 이전의 빛,

생각 이전의 무 생각...

 

이 책을 읽는 맛은,

달콤함이나 향긋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 무미함의 느긋함을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던 듯 싶다.

재미있는 시집은 아니었으나,

읽는 동안,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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