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 42년간의 한결같은 마음, 한결같은 글쓰기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전집'은 사랑하지만 '선집'은 별로로 친다.

'전집'은 이미 작고한 이의 모든 작품을 가치있는 유산으로 여긴다는 관점이 서린 '예찬'의 마음이 담긴 오마주라면,

'선집'은 상업적으로 팔기 위하여 대중적인 작품들을 골라 가려 실었다는 관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그리운 부석사 중, 111)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 137)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풍경 달다, 140)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수선화에게 중, 141)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폐사지처럼 산다 중, 225)

 

눈이 깊어지면서 좀 현실에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1부의 '서울의 예수'와 '슬픔이 기쁨에게'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기꺼움은

언어 속으로 헤설프게 풀어져 들어가 형상이 약해진다.

 

그동안 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사치를 부려왔다

내 뒷모습에 가끔 함박눈이 내리고

세한도의 소나무가 서있고

그 소나무에 흰 눈꽃이 피기를 기다려왔으나

내 뒷모습에도 그믐달같은 슬픈 얼굴이 있었다.(뒷모습 중, 227)

 

나이가 드는 만큼,

체온은 식게 마련이다.

서늘함을 느끼는 만큼,

세상을 향한 뜨거움도 눅게 마련.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눈부처 전문)

 

이 책에는 실려있지 않으나 이런 시처럼,

삶의 지향을 오롯이 드러내는 시들이 그의 작품들을 어루만진다.

 

시를 좋아하는 이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결국, 상업적인 책-선집-인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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