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겹의 자정 문학동네 시인선 19
김경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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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시인이 되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며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직 하지 못한 일
지금 시인이 되고 싶은 이유
열두 겹의 자정을 지나
이 말을 박고 싶다. (시인의 말)

 

근데, 김경후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다 못하고,

다만, 자꾸 말을 잃어버린다.

그의 실어증을 증명하는 시들로 이 책은 가득하다.

침묵은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고요한 자정, 그것도 열두 겹 속으로 침잠한다.

 

네 곁에 있기 위해/ 난 네가 필요 없다/

네 곁에 있기 위해/ 너조차 난 필요 없다/

말라 죽은 백나왕나무 냄새가 나는/ 너의 등 뒤/ 그 뒤/ 네 곁에 있기 위해/ 나는 내가 없다(곁,부분)

 

그미의 존재는 누군가의 곁에서 스르르 풀어져 버린다.

그것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미의 존재 방식이다.

 

네가 머물렀던 상처엔 내가 없었지/ 서로 보지 못하는 흔적들/

바닥의 붕대 위로 절뚝거린 발자국/ 서로를 끝없이 기다리며 우리는 헤어진다/

다시는 밤이 오지 않는다/ 이젠 그만(붕대, 부분)

 

나는 끝없이 부정되고,

그 존재 증명에는 붕대처럼 사라지기 위하여 존재하는 그런 소재들이 둘려 있다.

흔적은 남지만 보지 못하고, 헤어지지만 끝없이 기다리는...

세상은 언제나 시인의 의지와는 거꾸로 가는 것처럼 진심을 감추며 돌아간다.

열두 겹의 자정 속으로 진심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검은 웃음을 웃는다

 

그는 좌절한다.

 

유리벽 너머/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시들(밤의 카페, 부분)

 

그리고 그가 직조한 텍스타일들은 언제나 타인의 냄새가 묻어있어 더 눈물겹다.

 

쉿,

상어 가죽 독기 같은 타인의 혀가

나를 훑고 간다.(타인의 타액으로 만든 나의 풍경, 부분)

 

그러면 책상 서랍에 펜을 탁, 소리나게 넣어버리고 닫아버릴 노릇이지,

왜 쓰냐구?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라, 조금씩 자라는... 제로에 가까운 것이라 믿고 싶어서...

 

그믐의/ 마지막/ 빛/ 테두리

버려진/ 뱀 허물을 뚫고/ 자라나는/ 제로(자라나는 제로, 부분)

 

그믐의 달빛은 보이지 않는 은은한 테두리에 불과할지 몰라도, 분명, 기울었던 달이 차오르는 건 확실하고,

제로에 가까워보이는 삶의 피로도 자라나는 제로, 라고 호명하면

빙긋이 웃음지을 수 있는 긍정의 힘을 얻어올 수 있을 것도 같으니깐...

 

(나는) 모래의 악보

(너는) 백지의 탯줄

(그리고 우리는) 입을 다문다

말들의 십팔방위로 짜인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를

단 한 번 내기 위해(모래의 악보, 부분)

 

모래는 허망한 것. 모래 성처럼...

모래에 그려진 악보는 파도가 한번 쓸려왔다 나가면 스러져 버리고,

생명의 원천이었으나, 버려지면 그뿐인 탯줄처럼, 입을 다물고 기다리다,

단 한 번 지르는 비명같은 소리... 그게 그의 시다.

 

생리피로 꽃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 여자에 대한 소설을 쓰는 여자가

내가 아는 그 여자일지 모른다(라고 나는 쓴다)(크리스마스, 부분)

 

시선 안의 시선...

시인인 내가 아는 여자는 소설가이고, 그는 화가에 대해 쓴다.

액자 속의 액자처럼,

삶이란 세상 속의 세상인 셈.

그걸 어떻게 그릴 것인지는...

속절없이 마음만 아쉽게 만드는 '남편의 핀'과 '아내의 시곗줄'처럼

잡히지 않는 선물인 크리스마스 같이, 마음을 허전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을 바늘구멍에 끼우다

손목을 잘린 자가 쥐고 있는 칼

폭발을 견디는 근력

찢어진 나비 날개가 바람을 타고 나비보다 빨리 날아간다

공기에 대해서 시에 대해서 쓰지 않는

공기의 시인

번지는 금 속에서

흙은 처음 흙인 줄 알고 불은 불은 불을 알게 되지만

금만은 금을 모른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흙

가장 오래 묵은 묵음

토막나지 않는 단 하나의

둘(금, 전문)

 

흙 위에 그어진 금.

거기 금은 있으면서 없다.

금을 그어 둘로 나누게 하지만,

모래라는 묵음의 언어 속에서 그 둘은 토막나지 않는다.

여럿의 파도가 결국 바닷물에선 하나가 되듯...

 

대기는 공기로 가득하지만,

'공기'란 말에서 보이듯, 텅 빈 기운이란 곧 부재의 동의어이고,

존재의 증명보다는 존재 부정에 가까운 아이러니한 단어도 세상엔 많다.

 

텅 비어 있다고 말하기 힘든 공기의 시인.

공기에 대하여 쓰지 않는

시에 대해서 쓰지 않는

그러나, 공기에 대하여 쓰지 않아도 세상은 공기로 가득한 존재임은 당연하듯,

시에 대해서 쓰지 않고, 묵음으로 기록하고 침묵으로 가득 채워도, 시인의 삶은 시로 빛나는 것.

 

모래로만 이어진 그 길을// 나는 실크로드라 부른다

지금 나는 부서지는 시를 쓰고 있다//

질식의 리듬, /그게 다/ 그것뿐인/ 시,

모래의 시, (모래의 시, 부분)

 

다시 모래. 날마다 언덕이 바람에 빌려 달라지는 사막의 모래.

단단한 존재로서의 시가 아닌, 모래 언덕의 시를 상정한다.

숨막힐 듯, 숨가쁜 리듬,

부서질 듯 하지만,

그게 다~이며, 그것뿐~인... 시인에게 그것은 존재의 이유다.

 

-- 난 번진다 퍼진다

-- 오늘도 넌 네게 갇히고 난 내게 갇히는 비 내리는 밤(얼룩, 부분)

 

언어는 얼룩이 지는 것과 비슷한가?

얼룩이 서로 번지고 퍼지듯,

너를 표현하지 못하는 너의 언어는 네게 갇히고, 나 역시 그런... 우울한 비오는 밤.

 

-- 너 아니면 내가(아니, 반드시 네가)

-- (아니, 너는) 묵음을 짚으며 비명을 건너고 있다(비밀과 턱)

 

비밀은 번지려 한다.

터은 그 번짐을 막아 선다.

그렇지만, 비밀은 말하여 지지 않아도, 턱을 넘어 선다.

묵음을 짚으며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비밀'

 

그 비밀의 비의를 찾아 나서는 자정의 행보가 이 시집이다.

 

여기서떨어지면시작이다간다(끝)

 

시작은 스타트~의 개념일까? 시 쓰기의 개념일까?

시작했던 일이 다 마무리 된다는 의미일까?

시가 다 써졌다는 의미일까?

 

김경후의 시들은 명쾌하지 않다.

스르르 풀어지는 번짐의 웅얼거림으로,

침묵과 비밀의 중얼거림으로 이 시집은 가득하다.

열두 겹이나 캄캄한 시간 속에서 똘똘 붕대감듯 감아놓은 시들은,

캄캄할수록 도드라져 보이는 별빛처럼... 그렇게 은은한 빛을 낸다.

그 은은한 빛은 두눈 부릅뜨고 찾아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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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5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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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5 17: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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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5 1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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