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불지르다 문학세계 현대시인선(시선집) 189
유영금 지음 / 문학세계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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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게 복부가 찔린 그녀는,

찔린 순간 내일이 사라질 거라 예감했던 그녀는,

제 손가락으로 환부를 후벼파던 그녀는,

환부 깊이 독가시처럼 돋아나는 환멸을 즐긴 그녀는,

혹거머리같이 달라붙는 그것에게 그녀는,

진통제라며 술을 먹이는 그녀는,

과복용할 경우 즉사할 수 있다며 히죽거리는 그녀는,

벼락을 꿈꾸며 폭우 속 비칠비칠 춤추는 그녀는,

내생에도 다시 한번 찔려

환부의 쾌감에 포로이고 싶다는 그녀는,

 

방텃골 외진 산길의 벙어리 검은 술새 그녀는, (인음증의 눈부심, 전문)

 

인음증... 술을 마시도록 하는 증세라는 말이겠다.

왜 그의 인생은 술을 마시게 하는가...

이 시에서 단순한 나열의 의미로 쓰인 콤마가 아닌,

그녀의 삶에 함께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담은,

팽팽하게 잔뜩 긴장한 줄을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는 것처럼,

독자를 어쩌지 못하게 하는 힘으로 가득하다.

 

그 긴장감의 원천은 당연히 그녀의 삶이다.

교통사고로 죽음을 오가는 수술을 하는 동안 남편은 사라진다.

아들은 방황한다.

삶은, 곧 진통제로 술을 찾는다. 결국 스스로 검은 술새가 되고 만다.

 

하늘 귀퉁이 한 뼘 내줘, 죽도록 필게([나도 꽃으로,] 부분)

 

이 시의 제목에도 콤마가 붙어 있다.

이렇게 아파도,

이렇게 늘상 술에 절어 살아도... 나도 인간이야! 이런 비통한 외침이 그대로 들린다.

 

그에게 삶은 늘 죽음을 향한 희망이었고,

굴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 환멸과 고통의 길을 마치고 돌아가는 다비식을 상상하며

마치 국어학자가 사전을 서술하듯...

죽음에 대하여 한땀 한땀 공들여 수를 놓듯...

시를 쓴다.

 

오래 앓던 여자가 발인된다

암자 뒤뜰 봄비가 후련하게 내린다

 

먼 길 떠나기엔 봄길이

수월하다고 입버릇처럼 노래하더니

 

곡기 끊는 일

이승 최고가 희망이라더니

 

똥 싸는 일

똥구멍의 굴욕이라더니

 

사랑

착시 상태의 발광이라더니

 

외로움

씨방에서 발효시켜야 제맛이 난다더니

 

견딤

환멸의 꽃 뿌리가 녹아내리는 일이라더니

 

장작불 위

지글거리는 마지막 발가락, 즐겁다

 

빗줄기를 쪼던 외다리 까마귀

즐거움을 업고 서쪽으로 사라진다(다비, 전문)

 

그의 삶에서 함께하던 것들...

그것들이 사랑스러울 리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천적들이라고 부른다.

 

노리는 놈이 너무 많아 넌덜머리나

 

내가 사살을 음모하는 지도 모르는 등신, 외로움

숨기지 않으면 찌르기도 하는 흉기, 술

도려낸 자리에 혀를 물고 꼬꾸라진 찰거머리, 시

 

이제 세 놈과 등 돌리려 버둥거리지 않아

놈들이 흘리는 페로몬에 빌붙을래, 재수 옴 붙었어

뭇것들이 넘볼까 씨방에 가두어 인두질을 했어 (천적들, 부분)

 

그에게 무슨 처방전이 소용이겠는가?

 

취하거든 저녁달의 살을 깎아

토악질 나는 시를 써 봐(처방전, 부분)

 

외로움에 취해 마시고, 시를 쓸 뿐... 그것도 토악질 나는 시를...

그의 시는 술이고, 몰핀이고 노름이다.

삶을 온통 삼키고 잠재우고 거덜낸다.

 

술이야/ 목구멍 지나/ 세포 구석구석 꿰차고 앉아/ 거짓말을 내뱉지/ 두주불사 돼 아비도 눈에 안 봬//

몰핀이야/ 늪 속 환락가에서 놀아나다/ 진 빠지면/ 눈알 뒤집혀 환장하지/ 끊는 건 급소를 찌르는 것/ 끊느니 즉사하겠어//

노름이야/ 판돈 넘쳐날 땐/ 계집이 죽어나가도 몰라/ 거덜나면 손목을 팔아/ 겨드랑이로 덤벼들지/ 깡그리 말아먹었어(시, 전문)

 

그의 삶이 아닌 삶 속으로도 봄날은 통과한다.

그 봄날에 불지르는 그녀,

찔린 그녀는,

나도 꽃으로,

살고 싶어하던 그녀는...

접혀진 책갈피 사이로 내비치는 폭력적 과거의 일상은 차치하고,

현실의 삶에 아파하고, 갈망하던 그녀는...

그의 봄날에 불을 지른다.

그 불에 타죽고 싶고,

그 불에 활활 타올라 승화하는 삶을 열렬히 갈망한다.

 

그 오르가슴의 순간이 그의 삶이 이어지는 동력이다.

 

머리칼에

신나를 바르고

성냥을 그어댄다

지글지글 타는 두개골

냄새의 찌꺼기가

봄날을 쾅 닫는다

 

누가

나를 맛있게 먹어다오(봄날 불지르다, 전문)

 

아픈 사람에게 힘이 되는 것은,

함께 아파본 사람만이 힘이 된다.

이미 비에 젖은 친구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일은 크게 달갑지 않다.

함께 비를 맞아주는 친구... 그가 진짜다.

 

유영금에게 동병상련의 연민을 품어주게 하는 이들은 자살한 시인 실비아 플라스와 고통을 그린 화가 프리다 칼로였다.

그들의 시를 읽고, 그림을 보는 것으로,

나의 동병상련을 대신한다.

그 수밖에 없다.

 

내 몸은 그들에겐 조약돌이죠, 그들은 마치 물이 흘러 넘어가야만 하는
조약돌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돌보듯 그것을 보살펴 주지요.
그들은 빛나는 주사 바늘로 나를 마비시키고, 나를 잠재우지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여행가방에는 신물이 났고-
까만 알약 상자 같은, 검은 에나멜 가죽으로 된 간단한 여행가방.
가족사진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내 남편과 아이.
그들의 미소가 내 살에 와 박힙니다, 미소 짓는 작은 갈고리들. (실비아 플라스, 튤립, 부분)

 

 

 

 

부러진 기둥

 

 

 

 

몇 개의 작은 상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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