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서 완벽한.
장윤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를 읽고, '가비'란 영화를 만든 감독 장윤현.

그가 천착한 '커피'의 향기를 듣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문 조어가 '문향 聞香'이다.

조용필 노래에도 나온다.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향기를 맡는다...에서는 킁킁, 거리는 속물스러움이 묻어나지만,

향기를 듣는다...에선 고요히 내리깐 서늘한 눈매와 들이쉬듯 내쉬는 정지한 듯 움직이는 고요한 가슴의 움직임을 따라서,

조용한 공기의 흐름이 정지된 공간에서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 하기도 하다.

 

그의 커피 예찬론은 어마지두(놀라서 정신이 얼떨떨하여) 커피의 깊은 세계로 자신도 모르게 따라 들어가게 한다.

나도 커피를 멋모르고 마신 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요즘 맛들인 커피는 에스프레소다.

에스프레소 그 앙증맞은 잔에 담긴 황갈색 액체의 표면에서 우러러 올라오는 향기는,

커피를 마시기 전에 우선 눈으로, 코로 그 향기를 듣기에 충분하다.

아메리카노의 밍밍함에 비하면, 그 톡 쏘는 커피향이 일품인데,

간혹은 두 잔을 거푸 마시기도 한다.

낮잠이라도 잔 날이면, 에스프레소의 향정신성 카페인 성분에 취해 잠을 못이룰 수도 있지만,

대부분 피곤한 날이면 커피와 상관없이 잠들 수 있다.

 

각 지역의 이름이 붙은 커피에 대해서는 맛을 구별할 수준이 못 되고,

라떼처럼 걸죽하거나, 더치처럼 차가운 것은 취향이 아님을 확인한 정도다.

혈압이 높아 다방커피 단맛을 멀리한 것이 몇 년 되었고, 그러노라니 자연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곤 하는데,

가끔, 정말 어쩌다 한국인들이 이렇게 커피에 중독되었는지... 궁금할 때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삶에서 뭔가에 필이 꽂혀 그 뭔가에 천착하는 일도 멋진 일이겠다... 싶은... 그런 것.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한 가지에 몰두하면, 그 한 가지가 너무 좋아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책이 좋아서 책에 몰두하는 줄 알지만,

그건 몰두할 것이 없을 때 여가를 보내는 것에 불과하다.

한 1년 넘도록 피아노에 몰두할 때, 책은 잠시 접어둔 적도 있었고,

이즈음에는 그림그리기에 몰두해 볼까 생각 중이다.

그런 나의 단점은 몰두하는 기간이 그리 오래 가진 않아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뭐, 어떤가. 내 맘이다.

 

술도 몰두하기에 멋진 장르인데, 술은 같이 마시는 사람과 대화의 격조가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형 음주문화는 나를 끌어들이기 힘들다. 1차는 내가 좋아하는 술을 즐길 수 있지만, 노래방과 맥주와 3차, 4차의 한 이야기 또하기 버전의 고통은 다음날, 갈릴레이가 왜 목숨을 걸고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는지 확인하기까지 즐거움은 별로 없다. 하루를 공치는 고통도 크다.

 

담배야말로 남자들의 로망이다. 그것도 짧고 굵은 타르가 1.0 이상 되는 담배로... 그런데, 담배를 피우면 너무 피곤해진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끊은 이후, 냄새도 싫고, 더러워서 싫다. 그렇지만, 대화 도중, 적절한 타이밍에 담배를 자연스럽게 꺼내 탁자에 톡톡 두드리다 깊이 한 숨 들이마실 때의 흡연은 매력적일 수 있다. 어쨌든 담배를 탐구하기엔 몸이 안 된다.

 

커피는, 바리스타가 될 정도로 배울 생각은 전혀 없다. 아무 커피나 즐기는 수준이면 좋다. 장윤현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커피는 굿이다.

 

장윤현의 미감은 '가비'라는 영화에서, '접속'이란 영화에서 보여주듯, 분명히 동영상인데도 '스틸 컷'같은 매력적인 장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가비'에서 장 감독의 앵글은 자주 김소연의 단아한 모습에서 멈추는데,

'접속'에서 전도연과 한석규가 어색하게 비를 긋던 모습들과 오버랩되면서,

장 감독의 '스틸 컷'을 추구하는 동작 화면의 매력을 상상해 본다.

김소연에 대한 장 감독의 애정은, 이 책에서 아주 조금 나온다.

그렇지만 영화에선 김소연을 가득 담은 프레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책도 그렇다.

장윤현이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가서 마신 에스프레소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영화 이야기까지 망라되는 역동적인 이야기들 사이로,

마치 조용한 수필집처럼, 또는 단아한 한 편의 시집처럼,

스틸 컷으로 자리잡은 그림같은 화폭들에 시 같은 구절들이 들어앉아 있다.

참 좋은데, 뭐라고 말로 할 수가 없다. ㅋ

 

'낯섦'의 또 다른 이름은 설렘, '두려움'의 또 다른 이름은 떨림이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아무것도 아니지만, 27쪽의 그림을 보면, 설레고 떨린다.

낯설고 두려운 세상을, '설레고 떨림'으로 바꾸는 매력.

커피 한 잔으로도 그런 힘이 주어질 것만 같은...

 

 

 

지금도 나는 에스프레소의 강력한 마법을 믿는다.

그리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절박하고 허약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또다시 그 마법에 의지하고플 것이다.

쓴맛을 왈칵, 듬뿍 안겨준 뒤에 아주 인색하게 아주 잠깐 달콤한 맛으로 위로해주는 에스프레소는 인생을 참 많이 닮았다.

실패의 좌절감, 위기의 순간 느껴지는 긴장감,

그 속에서 거짓말처럼 솟는 용기까지... 지난하고 불확실하기만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우연을,

운명을 마주할 때 삶은 달콤해진다.

그러니 당신, 그 스쳐 지나가는 달콤함을 맛보고 싶다면, 설탕없는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견뎌보길.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는 생각인데,

그는 역동적 시나리오보다, 정지 화면같은 수필을 쓰는 것이 어울리는 남자란 생각이 든다.

 

커피 이야기 중에, 김태정 시인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란 시가 있다.

 

물푸레 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 나무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잔잔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여기서, 조화와 어울림을 생각한다.

조화와 어울림은 넘쳐나는 것을 쳐내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중에도 빛나는 어떤 것을 서로에게 얹어주는 것.

개성이 너무 강한 원두끼리는 피하되,

너무 순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원두끼리 슬쩍 더해보는 블렌드 커피의 기본과도 닮은...

 

그가 최상의 커피를 만들면 물푸레나무의 이름을 붙이고 싶댔지만, 그건 아직이고,

다만, 이 책의 표지에 두툼한 트레이싱지에 풀빛인듯 쪽빛 바닷빛인듯,

비리디언과 인디고 투명한 빛을 섞어 만든 수채물감같은 표지를 만든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지 오웰의 시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커피는 위로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커피나 차는 원래부터 세련, 낭만, 멋과 친했던 건 아니다.

그 옛날, 커피나 차는 힘들고 외로운 사람의 위로제였다.

시공간을 초월해 누구에겐들, 커피는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구절과 조지 오웰을 읽으면서, 왈칵, 서러워졌다.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들어서는 커피전문점은...

결국 힘들고 외로운 삶의 씁쓸한 위로제로서의 은유였단 말인가 싶어서 문득, 외로움이 밀려든 거다.

 

영화 <블루>를 들먹이며 들이미는 커피 이야기는,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녹여낸 짙은 향이 있다.

 

치유 과정의 고통을 묵묵히 참아낸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는

커피의 뒷맛처럼,

상처를 한 꺼풀 덮으며 오래도록 진한 향기를 남긴다.

 

그는 커피를 로스팅하는 과정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그 경지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경지다.

 

가열하지 않은 생두처럼,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는 수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 수분이 몸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바로 죽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생두의 죽음이 원두의 시작이 되듯,

때때로 무언가의 끝은 새로운 변화를 예비하곤 한다.

 

이 남자,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사랑론까지 운운한다. 재밌다.

 

한 웹진에 시인 심보선이 이런 글을 썼다.

"우리는 사랑에 빠져있을 때 약해진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밀고당기기를 하느라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전쟁같은 삶을 버텨왔던 힘이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블루마운틴을 마실 때, 나는 그런 사랑에 빠진다.

그저 한없이 약한 자세로, 모든 찬사조차 생략한 채 평안한 맛의 균형을 즐길 뿐.

 

이 책의 옥의 티, ㅋㅋ

 

다 읽고 나면, 함께 보면 좋을 책들... 을 소개해 준다.

뭐, 뾰족한 구분없이, 장 감독이 좋아하는 책인 모양.

근데, <우리는 같은 병을 고 있다>는 책이 소개되고 있다.

ㅎㅎ 웃자고 쓴 거라면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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