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까만 돌 일공일삼 77
김혜연 지음, 허구 그림 / 비룡소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한 십오 년 전인가보다.

사는 게 참 힘들었다.

힘든 이유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정답처럼 삶이란 게 주어지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해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나날을 영위해나가는 나를 발견할 때,

어쩔 수 없이 힘들었다.

 

그러던 날,

나에게 힘을 주었던 건 돌멩이 하나였다.

그 돌멩이를 바닷가에서 우연히 주웠는데,

동글납작한 돌멩이를 손바닥에 꼭 쥐고서,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이 돌멩이가 이렇게 동글동글해지기까지...

바윗돌이 쪼개지고, 자갈돌이 서로서로 쏠려다니면서 닳고 닳아 지금까지 이르렀는데,

그렇게 보면, 달님이 변함과 함께 물살의 흐름도 변해 이 자갈돌을 닳고 닳게 만든 것이고,

그 시간과 조수의 흐름이 이 돌멩이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보면,

이 세상, 온 우주와 나를 연결해주는 패스워드로 이 돌멩이가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게,

그 돌멩이의 찹찰한 느낌이 내 손바닥을 통해 우주로 뻗어나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고 나면, 나의 가치가 온전한 한 사람으로... 복원되어있다는 느낌을 갖곤 했다.

 

그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하고,

책상 서랍에 넣어 두기도 했는데,

학교를 옮기면서 언젠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나의 가치가 복원되었던 그 오롯한 느낌을 잊어버린 지 또 십 년이 다 되었다.

 

소심한 아이 지호는 엄마가 죽고나서 아빠도 말이 없고, 학교에서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된다.

지호는 온갖 사물과 이야기를 나누며 상상 속에서 위안을 얻는데, 아이들은 그걸 더 놀린다.

지호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내 상상력이 떠올랐다. 외로운 아이들은 상상 속에서 힘을 얻나보다. ^^

 

"이 숟가락이랑 밥그릇 같은 것들도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걸면 알아듣는다고,

동물이건 사람이건 보지 않으려 하고 듣지 않으려 하면 숟가락보다 말귀를 못알아 먹게 되는 거야."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하는 동안, 지호는 말하는 돌멩이를 하나 주워 온다.

그 돌멩이에게 말을 걸면서 지호는 용기를 얻고,

지호 아버지 역시 잘못은 자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찮은 무생물도 사랑을 주고 눈길을 주면

생명이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합니다."

 

스님이 남긴 말은 아빠를 변하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을 쓴 사람은 나랑 비슷한 삶의 궤적을 걸어온 거나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깜짝 놀라게 하는 구석이 많다.

 

지호 아빠는 지호 엄마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너무 크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살았다.

그걸 되새기기도 무서워하던 아빠에게 까만 돌은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용기를 준다.

그리고, 과거에 매몰되어 있기만 하다면 삶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까만 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중간에 끼어들지도, 자기 생각을 말하지도, 야단을 치지도 않았다.

지호 아빠는 까만 돌이 맘에 들었다.

만일 까만 돌이 중간에 끼어들었다면 가슴 속의 도둑고양이는 다시 마루 밑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고양이는 햇빛 아래 온몸을 드러내고 반듯하게 서 있었다.

얘기를 하고 나니 가슴에서 돌덩이를 내려놓는 것 같았다.

눈가에 따뜻한 물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지호는 나중에 까만 돌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다.

그것은 나비 효과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긍정적으로 돌려놓는 결과를 낳게 된다.

 

잘 있어.

나는 이제 우리 집으로 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지호는 까만 돌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까만 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지럽다고도, 웃지도 않았다.

지호는 헤어지는 게 섭섭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별은,

이렇게 쿨해서 더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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