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집 범우문고 53
박재삼 지음 / 범우사 / 198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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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인의 시 중 유명한 것이 두 편 있다. 

'추억에서' 연작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다. 

진주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밑이 깔리는 해다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끝에 남은 고기 몇마리의
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만큼 손 안닿는 한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맞댄 골방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남강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추억에서 67, 전문)

그의 '추억에서' 연작은 가난해서 서글펐던 추억으로 점철된다. 
그 서글픔의 추억은 평생 그를 '울음'의 시인으로 자라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겠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전문) 

이 시는 어렵지 않다.
제삿날 큰집에 내려가 시간이 좀 남아,
가을햇볕, 따가운 햇살 아래, 타박타박 산등성이까지 걸으면서,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동무삼아 올라간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
그러다, 해질녘 노을이 붉게 물든 강물을 본다.
울컥, 서러움이 주체할 수 없이 솟구친다.
첫사랑, 그 다음 사랑, 그리고 미칠 일로 남은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다 와가는 강물의 처지와 동병상련... 

소리죽여 울고 있는 가을강을 눈물어려 바라보는 시인의 슬픈 눈망물이 금세라도 붉게 비쳐 올 듯하다. 

우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고
그것을 멎게 되는 순간부터
어른다워졌다는 것인데,
실상 그때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버린 자식이 되었느니라. (사느님의 버린 자식, 부분)

인간은 울어야 순수해 지는데, 그 울음이 인간을 정화해 주는데,
울음이 멈추자... 하느님의 버린 자식이 되어 버린다. 

꽃이나 잎은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도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은 지고 만다. 

그런데도 그 멸망을 알면서
연방 피어서는
야단으로 아우성을 지른다. 

다시 보면 한정이 있기에
더 안쓰럽고
더 가녀린 것인데, 그러나
위태롭게, 아프게, 이 세상에
끝없이 충만해 있는 놀라움이여. 

아, 사람도  그 영광이
물거품 같은 것인데도 잠시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 빛날 뿐이다.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 전문) 

박재삼의 시는 그닥 길지 않다.
그러면서, 시상이 하나하나 오므려져서 마지막 연에서 확, 오믈리는 부분이 느껴진다.
이 시에서는 '허무의 큰 괄호'가 그것인데,
삶은 허무하지만,  

그러나,
위태롭게,
아프게,
이 세상에
끝없이 충만한 놀라움, 그 기적!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
잠시
빛날 뿐인,
그 기적! 

이런 깨달음의 순간을 제공하는 멋진 시다.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한(恨), 전문> 

내 마음에 오롯이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내 마음을 모른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내 서러운 나무는 그 사람 등뒤로 나지막하게 휘드려질까...
아, 소심한 사람.
그렇지만, 한편 생각하면
그 사람도 날 사랑했을지도 모르고,
내 서러운 사랑의 나무를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상념.
또, 내 사랑만 이렇게 서글플 게 아니라, 그 사람도 세상살이 눈물로 보낸 건지도 모른단,
결국, 인생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이런 것이니, 서로 동병상련 할 밖에... 

한낮에 무심코 보니
길가에 예닐곱 살짜리
아이들 네댓이 놀고 있다.
땅다먹기를 하는
그들의 눈은 전심전력
한 치라도 자기 땅을 만들기에 바빠
곁눈을 팔지 않고 있다.
그런 것이, 비행기가 날아도
군인들이 중무장으로 행군하고 있어도
그들에게는 아랑곳이 없다.
하느님은 홀로 알까,
어른들이 하는 일도
손에 흙묻힌 아이들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공일, 전문) 

공일, 쉬는 날. 아마 국군의 날이었을 것이다. 오늘 같은...
이 정부 들어와서 새로 생긴, 탱크가 테헤란로를 누비고, 전투기가 위용을 자랑하는 서글픈 하늘.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음은, 아직도 분명!하다. 

마흔 다섯으로 접어드니
세월은 '할수없다, 할수없다' 하면서
내 이마에 잔주름을 잡고
허리 밑에 찬바람을 일으키고
머리 위에는 눈발을 날려
영락없는 겨울 나그네의 이 쓸쓸함이여. 

솔잎에 송충이던가,
오장 육부도 갉다가
살갗도 갉다가
아침 밥숟갈 드는 손의 힘도 앗아가고
무엇도 앗아 가고 무엇도 앗아 가더니 

마지막 눈 정신 쪽에는 그래도
남겨 줄 것을 남겨 주었더라는 듯,

막내아이 치는 팽이가
한창 신을 내고 돌아가는 판에
햇빛이 장난치듯 감겨들고 있는 것을,
오, 아이의손에세월이잠깐묶이고있는것을,
눈물겨운 광경으로 환히 환히 내려다보노라. (겨울 나그네, 전문) 

나이를 속일 수 없어, 이런 시들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마흔 다섯이니 마흔이니... 이런 시들이...
온 힘이 다 쇠하여 가는 나이지만, 뭔가 보는 눈은 생긴다는 듯,
아이의 팽이치기에서도,
아이들은 세월을 묶어둘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의 전심전력은 세월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는,
환히 볼 수 있는 눈을 얻음에 서글픔을 잊는다. 

박재삼의 '한'스런 '설움'을 읽는 일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일이기도 하고,
동병상련의 비를 노박이로 함께 맞는 바보같은 웃음이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가을에 딱 마춤한 시들이다. 

이 책을 2,800원짜리 범우문고로 읽었는데, 가벼운 그 책이 옛생각을 떠올리며 서글프다. 

어제 시내에 나갔다가, 버스정류장 앞에서 우연히 서글픈 장면을 목격했다.
부산의 한 복판, 서면의 상징이었던 '동보서적'이 어제부로 문을 닫는 장면이었다.
그 땅값 비싼 곳에 서점보다는 술집이나 요릿집이 장삿속에는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논리나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저 가을이 깊은 날, 우수수 몰아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면 그저 서글프듯,
문화 공간으로서의 서점이 한 곳 폐업한다는 것에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책을 거의 사지 않는 나도 한 몫을 거든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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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1 1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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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1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