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153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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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전문) 

내게 오규원은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으로 남아있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란 시집에 실렸던 시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
평범한 아이. 그 아이의 삶이나 왕자같은 삶을 산 아이나... 그게 그거 아닌지...
1995년에 발표된 오규원의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휘어지며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느낌의 달리 그림을 연상하게 된다.

오후 두시 나비가 한 마리
저공으로 날았다 나비가 울타리를
넘기 전에 새가 한 마리
급히 솟아올랐다 하강하고 잠자리가
네 마리 동서를 천천히 가로질러
갔다 동쪽의 자작나무와 서쪽의
아카시아나무 사이의 이 칠십 평의
우주는 잠시 잔디만 부풀었다
다시 남동쪽의 잔디 위로 메뚜기
한 마리가 펄쩍 뛰고 햇빛은
전방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적막이
찾아왔다가 토끼풀 위로 기는
개미 한 마리와 함께 사라졌다
잠자리 두 마리가 교미하며 날았다
어린 메뚜기 세 마리가 차례로
뛰었다 사마귀 한 마리가 잔디밭
구석의 돌 위로 기어올랐다
그 사이에 동쪽의 자작나무 잎들이
와르르 바람에 쏟아졌다 순간
검은 나비 한 마리 서쪽 울타리를
넘다가 되넘어 잠복하고 이 우주는
오로지 텅 빈다 와르르 쏟아지던
자작나무 잎들이 멈추고 웃자란
잔디의 끝만 몇개 솟아오른다 (뜰의 호흡, 전문)


뜰의 호흡, 이라.
화자는 뜰을 망연히 응시하고 있었겠지.
그러면서 자신의 호흡을 상념 속에 담아 두었던 걸까?
거기, 나비, 새, 사마귀, 개미, 메뚜기...
온갖 존재들이 움직이고 날고 기고 뛰고, 아무튼 존재했겠지.
한 호흡 안에. 

이렇게 '뜰 앞에 잣나무' 심고 호흡에 마음을 얹어 두고 있다 보면, 

이 우주는
오로지 텅 빈다 와르르 쏟아지던
자작나무 잎들이 멈추고  

이런 마음의 상태를 만나기도 하는 모양.

나는 하늘과 구름과 공기와
언덕과 나무와 바람을 모두
안고 거울 밖의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방, 부분)

그의 이 시집에서 만나는 시들에서 유독 '공간'과 '시간'을 자주 느끼게 되는 것은,
시인이 그만큼 거기 몰두하고 시를 썼단 이야기겠다.

아파트 단지의 작은 연못에
비단잉어가 꼬리를 흔들며
졸고 있다 더럽지만 그러나
하늘과 한몸이 된 물은 잔잔하고
하늘과 한몸인 물을 몸에 넣고
비단잉어의 몸이 둥글둥글
부풀어있다 (민화 3, 부분)

비단 잉어.
하늘과 한 몸이 된 비단 잉어.
더럽지만 잔잔한 물.
잉어와 물이
같이 더럽고 함께 잔잔하게...
둥글둥글... 사는 삶. 그런 존재. 존재감.

나는 해변의 모래밭에 지금 있다
바다는 하나이고 모래는 헤아릴 길 없다
모래가 사랑이라면 아니 절망이라면 꿈이라면
모래는 또한 반동, 혁명, 폭력, 사기, 공갈이다

수사적으로, 비유적으로, 존재적으로,
모래(사물)와 사랑, 절망(관념)....은
동격이다 우리는 이를
원관념=보조관념의 등식으로 표시한다
그래서 모래는 끝없이 다른 그 무엇이다
오, 그래서 모래는 끝없이, 빌어먹을

나는 사랑을 발로 밟는다 밟아도 사랑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그래 사랑은 간지럽다
나는 절망을 짓뭉갠다 짓뭉개지는 절망이 발의 뒤꿈치에서 간지럽다
나는 꿈을 파헤친다 아니다 아니다 꿈의 속을 더듬는다 마른 꿈 밑의 젖은 꿈에 내 손이 젖는다
나는 죽음을 깔고 앉는다 엉덩이만큼 푹 죽음이 들어간다 앉은 사타구니 사이에는 그러나
죽음이 그대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나는 모순을
나는 허위를
나는 공포를 움켜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나는 자유를 다시 움켜쥔다 손가락 사이로 역시 빠져나간다 손바닥을 탁탁 터니 붙어 있던
자유가 날려떨어진다 자유는 정말 가볍다
나는 반동을 쓰다듬는다 손이 지나간 자리에 반동의 매끈한 길이 생긴다
나는 혁명을 밝고 나아간다 혁명은 뒤에 발자국을 팍팍 파놓는다
나는 앉아서 두 손으로 사기를 친다 튕겨나가는 사기와 밀려 쌓이는 사기에 손이 아프다
나는 공갈을 친다 폭력과 공갈이 나를 휩싸며 뿌옇게 나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을 사정없이 덮친다
나는 반동을
나는 혁명을
나는 사기를
나는 폭력을
나는 공갈을 움켜쥔다 움켜쥐는 순간은 감미롭다

하나의 공갈은
하나의 폭력은
하나의 사기는
하나의 혁명은
하나의 반동은 너무 작아 움켜쥐어지지 않는다
너무 작아 간지럽다
나는 해변의 모래밭에 지금 있다
모래는 하나이고 관념은 너무 많다
모래는 너무 작고
모래는 너무 많다 아니다
관념은 너무 작고
모래는 너무 크다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존재적으로,
모래(사물)는 사랑, 절망....에
복무한다 우리는 이것을 인본주의라는
말로 표현한다 오, 빌어먹을 시인들이여
그래서 모래는 대체 관념이다 끝없이
모래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을 반짝이고

모래가 사랑이라면 아니 절망이라면 꿈이라면
모래는 또한 가가호호, 가당, 가혹, 간혹, 갈망, 걸귀, 경멸, 고의, 과실, 기서, 내연, 노스탤지어, 노스 카운트,
다다, 다신교, 독선, 마마, 망극, 모의, 모정, 무명, 무모, 무상, 백수, 불화, 빈궁, 빈약, 사디즘,
사탄, 선교, 섭리, 속죄, 순례, 숭고, 숭고미, 숭고추, 시, 그리고 또 시, 신성, 인티, 앙가주망,애흘, 양가,
양태, 언감생심, 여념, 우울, 유예, 융합, 인종, 입신, 자생, 자멸, 적, 전락, 전생, 정실, 정조, 주
종, 주화론, 천상, 천하, 추잡, 추태, 커닝, 컨디션, 코뮈니케, 쾌락, 통한, 퇴락, 파멸, 평화, 풍요, 프로그램, 프로세스, 하세, 할거, 해방, 호모, 혼돈, 환멸, 흥청, 흥청망청....
모래야 너는
모래야 너는
모래야 너는 어디에 (나와 모래, 전문)

그렇지만, 살아있는 일은, 세상을 살아내는 일은,
편안하고 마음처럼 곱게 지나가지 않는다.
온갖 추악함이 마음을 괴롭히고, 온갖  시공간을 뒤흔들어 버리는 것이 세상이다.
풍요 속에서,
흥청망청 속에서,
앙가주망을 생각하는 시인에게,
모래와
자신은
어디에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인지... 고뇌가 시리게 읽힌다.

버스가 언제 오느냐는 단지 시간의 문제 (외곽, 부분) 

그의 시 '외곽'에서 단지에 윗점을 쾅쾅 찍어 두었지만,
버스가 언제 오느냐는 시간의 문제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잘난 놈들의 리무진은 획획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공연히 나무 밑둥만 걷어차는 청년에게 '단지' 기다리면 버스는 온다는 위안은, 지나가는 리무진 버스를 속절없이 바라보아야 하는 열패감을 안겨줄 뿐.
기다리면 온다는 버스는, 교과서에서나, 공자님 말씀에서나 존재하는 것임을,
현실 속의 청년은 알기에,
단지,
나무 밑둥이나 걷어찰 뿐. 

오규원과 함께 시간과 공간 여행을 떠나는 일은,
많은 사물과, 존재를 만나는 일이고,
그 사물과 존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한 호흡' 속에서 느끼는 일이다.
힘겹지만, 즐겁다. 등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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