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물감상자 창비시선 132
강우식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평점 :
품절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애인과의 데이트 약속장소는
늘 원각사 십층석탑 앞에서다.

이 탑에 서면
음경이 없는 부처님의 방 한칸에
전세들고 싶어진다.

부처님의 주소라서
자칫하면 소멸되는 전교(轉交)편지도
틀림없이 배달되리.

국보 제2호와 같은
여자를 맡겨놓고
안심하고 밥벌이를 나갈 수 있으리.

살아가다 피박을
잔뜩 뒤집어쓴 거덜난
인생이 되더라도

여기 와서는 만세를 불러도
동서남북 어느 길목에서나
넉넉함으로, 넉넉함으로 받아주리라.

애인이여,애인이여
이 탑 앞에서
밑바닥이 제일 튼튼한 이치를 배우자.(원각사 십층석탑 인연설, 전문) 

국보 1호가 불타 내려앉는 화면을 눈물 훔치며 지켜보던 시간에,
국보 2호는 그럼 뭐냐고 아들이 물었는데, 그때만해도 나는 국보 2호가 뭔지는 관심도 없었더랬다.
그 국보 2호가 원각사 십층 석탑이고,
그 탑이 탑골 공원의 그 탑이고, 파고다 공원의 그 탑이란 건 국보 1호가 사라지고 나서 찾아본 거였다. 

불시잡변 佛詩雜辯 이란 말을 쓸 정도로 불교에 관심이 많은 그의 생각이 드러나는 시이기도 하다.
1990년대 외국 여행 붐이 일었을 때, 중국 대륙을 구경하면서 쓴 시들도 장쾌하다. 

뭐니뭐니해도, 이 시집과 조금 외따로 노는 듯도 하지만,
강우식의 시 중의 백미는 '어머니의 물감상자'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감장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온갖 색깔이 다 모여있는 물감상자를 앞에 놓고
진달래꽃빛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진달래꽃물을,
연초록 잎새들처럼 가슴에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고 싶은 이들에게는 초록꽃물을,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에게는 쪽두리 모양의 노란 국화꽃물을 꿈을 나눠주듯이 물감봉지에 싸서 주었습니다.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종일 물감장사를 하다보면 콧물마저도 무지개빛이 되는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동저고리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키우기 위해 물감장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지상에 아니 계십니다.
물감상자 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들이라고 물감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물감장사와 물감상자의 음운의 오고감 사이에서
진달래 꽃빛, 연초록 꽃물, 노란 국화꽃물과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를 가득 담아 놓은
어머니의 물감 상자가 눈앞에 환하게 보일 듯도 한 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로 가득한 물감상자,
그 하나로 남은 어머니의 마음을,
그 마음이 없는 자식이 회상하는 모습은 자칫 위태로우면서도 가슴 따스하게 만드는 시.
외로운 세상에서 외롭다는 말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먼 하늘 우러리는 시인의 눈길을 보여주는 시. 

이런 시를 쓰는 시인과 함께 사는 일도 그리 팍팍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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