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흰 저고리 검정 치마 - 황명걸 시집
황명걸 지음 / 민음사 / 2004년 11월
평점 :
韓國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빛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허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 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 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1965.6>
이 시가 황명걸 시인의 대표작 '한국의 아이'다. 1965년이면 정말 가난하던 나랏적 이야기다.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아라...하고 그가 가르친 것이 어언 40년 전. 이 시집이 그의 작품 15년을 정리한 것이라 하니 그가 시를 쓴 지 50년이 되었다 한다.
외모부터 좀 예술가스럽게 생긴 황명걸은 그림과 음악에도 관심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면서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젊어지는 듯한 그의 삶을 보면, 뭔가를 깨닫게 하는 무엇이 있다.
나이는 시간이 흘러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하듯이, 그는 나이를 먹었으면서도 아는 것 없고 새로이 보이는 것 투성이임을 고백한다. 다행이다. 40이면 혹하지 않고, 50이면 하늘의 뜻을 알고, 60이면 남의 이야기가 귀에 거슬리지 않고, 70이면 맘내킨대로 해도 가로막힘이 없다는 공모씨의 말처럼 사람들이 철들지 않음을 보여 줘서.
나는 이미 40을 훌쩍 넘었으면서도 늘 어린애처럼 단순하고, 어리석다. 호기심 많고, 아직도 내 젊은 날이 새털처럼 많을 줄 안다. 내 나이 스무 살엔 마흔 쯤 된 사람들은 벌써 인생의 뭔가를 깨달았을 거라고 착각했는데도 말이다.
황명걸은 북녁 평양이 고향이다. 대동강을 못잊어 양수리에 집을 얻었다는 그.
2000년 6월에 희망찬 시들을 썼건만, 움직이지 않는 기차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 진다.
그래서 흰 저고리 검정 치마가 늘상 눈앞에 어리는 것인가도 모른다.
그는 '속초행'에서 <눈이 오려면 함박눈으로 내리고, 비가 오려면 장대비로 쏟아지지, 안개비에 설치는 바람은 웬 성화냐>라고 했지만, 그도 알 것이다. 세상은 멋지게 함박눈 또는 장대비만 내리지 않는단 것을. 오히려 속되게 잔바람과 안개비가 눈앞을 가리워 추적거리게 하는 것임을...
'슬픈 지뢰밭'에서는 <사람이 살아야 할 터전 들과 숲에> <무서운 지뢰를 묻은 장본인>도 사람이고, <이제와 뒤늦게 몹쓸 지뢰를 뽑는다고 법석떠는 것도 사람>임을 증오한다. 제네바에서 본 다리잘린 의자가 떠오른다.
흰 저고리 검정 치마
너무 아름다워 흠갈라
운을 떼지 못하다가
생 꽁지머리에 엷은 화장
둥근 어깨에 초승달 눈썹
이밥 눈에 박꽃 미소가
조선 미인의 전형이라서
매끈한 몸매 타고 흐르는
긴 고름끝이 춤추는 듯
걸음새마저 날렵하니
아, 내 사랑하고픈 여자여라
시집 제목을 이룬 표제작이라 역시 그의 생각을 잘 함축하고 있다. 남남 북녀에 대한 그리움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