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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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란 영화에 보면,

성탄절을 코앞에 놔두고,

사라와 조나단은 서로의 애인에게 선물할 장갑을 사려고 하다가

서로 만나게 된다.

조나단은 첫눈에 사라에게 반하게 되고,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하지만,

사라는 서로가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수 있을거라면서,

서로의 전화번호를 책과, 지폐에 적고,

책은 헌책방에 팔고, 지폐로는 사탕을 사 먹어 버린다.

정말로 인연이라면, 그 책과 지폐는 서로에게 돌아올 것이라면서.

그때, 등장했던 헌책방에 팔아버린 그 책의 제목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었다.

사실 그 영화를 볼때는, 그 책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을 모조리 읽고 나서야 그 사실을 기억해 냈다.

물론 책 말미에 그 사실에 대한 언급덕분에 말이다.

그렇다. 이 책 말미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세렌디피티의 사랑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는 유사점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겐,

세월이라는게 모든걸 무의미로 돌릴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더라도,

결국 사랑은 이뤄진다고.

결국 사라의 손에는 조나단의 전화번호가 적힌 지폐가 들려지게 되고,

조나단은 그저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에게서 결혼을 목전에 앞두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란 헌책을 선물받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란 제목덕에,

사랑=병 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더군다나 페르미나에게 첫눈에 반해,

편지교환밖에 한 적이 없고,

아무런 이유를 설명받지 못한채 이별을 당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폴로렌티노가 52년의 세월을 펠르미나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없는 억지처럼 느껴진다.

정말로 병이 아니고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듯.

하지만,

사랑이라는거 요새는 화학적 작용이라느니 하면서 모든 신비스러움이 제거되고,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듯 하지만,

아직도 한 사람이 다른사람에게 빠져드는 감정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 내가 생각기엔, 페르미나와 폴로렌티노는 52년후에 진짜 사랑을 시작하게 된게 아닐까 싶다.

그 전의 페르미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모험을 한 것 같고,

폴로렌티노는 감정에 대한 열정만을 지니고 있었던듯이 보인다.

결국 52년후에 다시 만나 나눈 사랑만이 그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그 시간이 되어서야 그들은 서로에 대한 환상을 벗고,

진실한 모습으로 서로를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나에겐 보여졌으니까.

항상 그렇듯이

난 이책을 읽고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니, 무슨 생각이 드는지 정확히 집어낼 수가 없다.

단지 폴로렌티노의 위대하며 병적인 사랑이 놀랍기만 하고,

그리고 "100년동안의 고독"한 권만으로 좋아하게 되어 버린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더욱 좋아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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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 칼비노 선집 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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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라는 이름, 문호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우연히, 민음사에서 나온 칼비노 선집 첫번째권, '반쪼가리 자작 '과 조우했다.

말 그대로 반쪼가리 자작. 무언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거라는 나의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반쪼각이 난 자작의 이야기.

세상물정 모르는 테랄바의 자작(이름은 또 잊어버렸다..휴)은 어느날 전쟁에 나갔다가 대포 총구로 용감히 돌진하다가 발사되는 대포를 껴 안고 말 그대로 반쪼각이 난다.

현실에서라면 그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만, 소설속의 훌륭한 의사들은 반쪽뿐인 그를 소생시킨다. 그리고 테랄바로 돌아온 자작.

야누스의 얼굴이라고, 사람들은 모두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칼 융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억압된 부분의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고, 어느순간 그게 표출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 없이 착하고 순한 사람이 화가 나면 어느 누구보다도 포악해지고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테랄바로 돌아온 자작 그 반쪽은, 자작의 어두운 부분이었다. 한 없이 악한 부분. 자작의 영토에 살던 사람들에게 화가 미칠것은 뻔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느날, 또 다른 반쪽의 자작이 테랄바에 나타난다. 절대악의 반쪽 그것은 당근 절대선.

아마 우리가 어렸을적 읽었던 동화라면, 절대선의 자작은 절대악의 자작을 무찌르고, 마을을 평화롭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세상엔 평화와 선만이 가득 들어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언할 수가 없다. 절대선이 좋은것이다고, 절대악은 나쁜것이라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문둥병에 걸린 버섯 마을 사람들에게 쾌락을 쫓는것은 나쁜짓이라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그나마 잊고 있던 절망스런 상황과 맞딱드리게 만들었을 뿐이고, 죽도록 일만하고, 그에 정당한 댓가를 바라는 위그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해 곡식값을 깍으라는 것은 불공평한 행위로 비춰졌다.

항상 지나치거나 모자란것보다 적당한게 최고라는 중용의 의미는, 여기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 둘은 하나가 되어서, 완전한 자작이 되지만, 세상이 너무 복잡하여 완전한 자작으로서도 훌륭히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결말은 아이러니 하기도 했다.

칼비노는 이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여하튼 이탈로 칼비노의 책과의 조우는 흥미로웠고, 그의 동화같은 이야기는 비교적 재미있었다. 앞으로 남은 책들도 읽어볼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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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까 말까 읽어도 후회 안할까 고민 중이었거든요.님의 리뷰 잘 봤어요.
 
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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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에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끌기도 한다.

언제 생겼는지 알 수없게 생긴 손톱위의 긁힌 자국이라던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굳어버린 나의 말투, 언제나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던 그 음악들... 등등의 수없이 많은것들.

그렇게도 어느순간, 사소한 것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아마 그 사소한 것에 그 동안 깨닫지 못했던,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고도 남을 진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라고 하면 너무 오버하는 걸까??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의(사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런던 스케치>라는 이책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은 생각들은 위에 표현한 그런것들이었던것같다.

이야기 하나하나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저런 것들이 소설로 쓰여질 수 있는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뒷통수를 치는 것같은 둔중한 느낌이란...

사실 환상적이며, 있을법하지 않은, 또는 나로서는 절대 겪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책은 읽는 내내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참새의 행동거지에 대한 네다섯페이지 정도의 설명, 지하철을 타고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동물원 짐승들의 쫓고 도망가는 이야기, 공항 까페에서 두 자매의 대화등등. 이 곳에 나온 각각의 이야기들은 어디서나 있을법한 정말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책을 탐독한 사람이라면,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말로 명료하게 표현하긴 힘들지 몰라도 어느순간, 런던이라는 도시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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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1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 겠네요...님의 리뷰를 읽으니...
 
삶이 있는 도시디자인
얀 겔 지음, 김진우 외 옮김 / 푸른솔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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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다닐때, 설계수업과정중에 아파트 단지를 계획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몇번의 거듭된 고민끝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아파트를 배치했었다. 그 형태는 조형적으로 (내눈에조차)멋들어지게 보였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동소이한 형태들과는 확실한 구별이 되었기에 충분히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었던거 같다. 물론 교수님들의 평가도 좋은축에 속했던거 같다. 그때는 나름대로 그 형태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개념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이 있는 도시디자인'이라는 이 책을 읽은 지금, 내가 설계했던 그 아파트 단지가 실질적으로 그 땅위에 세워졌더라면, 하는 상상을 하면, 얼마나 아찔하게 느껴지는지. 어쩌면 그 아파트 단지는 머지않아 슬럼가가 되어 버렸을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건축이나 도시를 디자인 하는 사람들이 가장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그림을 그리거나 형태를 만드는데 있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평면상으로 아름다운 도면들(곧은 직선, 좌우대칭의 건물들의 배열이라던지, 기하학적인 문양들...), 아름다운 형태의 매스들은 어느경우에는(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되고 있기도 한것 같다.)삶과 아무런 연관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사람들이 어울려 살기 좋은 도시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유럽의 중세시대에 형성된 도시들은 결코 곧은 직선이나 기하학적인 형태의 길이나 배치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덧붙여지고, 편리한대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느낌대로 천천히 변형되어 가서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그에 반해, 디자이너란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설계한 도시나 건축물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보기 흉하게 혼자 우뚝 서 있으면서, 일반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도 하며, 길들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차를 위해서만 만들어진듯, 사람들이 그 길들을 걷기는 힘겹기만 하다.

흔히 예술을 논할때, 건축또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곤 한다. 하지만, 건축은 예술과는 다르게 작가의 영감에 따라서만 만들어질 수는 없다. 건축에는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삶이란것은 누군가의 강제적인 틀 속에 갇혀 버릴만큼 규칙적이며, 정형적인것이 아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고, 부딪히고,다시 만들어지고 하면서 또다른 삶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도시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 삶을 디자인 안에 담아내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자신의 영감만을 따를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논리적인 많은 고려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위에 얘기한것들에 관한 많은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것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마 사실은 많은것들을 알고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잊고 넘어가 버리기 마련일 경우가 많다. 이 책의 내용들은 새로운 사실들은 아니다. 아마 누구나 한번쯤은 스쳐 지나가면서 생각했었던 이야기들일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깊게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잊어먹지 않으려 하거나, 어딘가에 적용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개울아래 쌓여있는 돌멩이처럼 아무런 흥미도 끌지 못하는 사실들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그 돌멩이들을 그 하천에서 건져내어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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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쉬 -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티베트 소년
사브리예 텐베르켄 지음, 엄정순 옮김, 오라프 슈베르트 사진 / 샘터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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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나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고 손을 사용하지 못할지언정, 눈만은 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살면서 즐기는 것들이 눈을 이용해야 하는 것들이 대다수인탓이리라 싶다. 시력을 잃느니, 죽어버리는게 낫겠다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한때는 점점 나빠지는 시력때문에, 고통스러운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티베트의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타쉬는 어느날 무서운 열병을 앓고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그것은 타쉬의 어머니가 허락도 받지 않고, 노간주 나무로 집 울타리를 지은것에 격분한, 노간주나무에 기대어 사는 귀신의 짓이라고 타쉬와 그의 식구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타쉬는 그 귀신을 용서한다.

사람의 감각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시력을 잃고서도 타쉬는 그다지 절망하지 않는다. 시력을 잃음으로써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력을 읽지않는 정안(正眼)을 가진 사람들은 평생 알 수 없는 세계일것이다.

소리로 이루어진 세계, 냄새로 이루어진 세계. 시력은 그 미세한 감각들을 무디게 만든다. 하지만, 타쉬는 시력을 잃음으로서 그 감각들을 체득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날 우연히 로사라는 곳에 있는 시각장애아를 위한 학교를 알게 되고, 그곳을 찾게 된다.

너무나 선한 마음을 가진 타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난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게 사실은 못내 의심스럽기만 하다.

우리 나라 같은 곳에서 누군가가 눈이 멀게 된다면, 그 사람은 심한 마음고생에 시달릴것이다. 하지만 타쉬의 주변사람들은 모두 타쉬에게 용기를 준다. 오히려 타쉬에게 새로이 생긴 재능(이야기를 상상하고 그걸 풀어내는 재주)에 열광하기까지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눈먼 삶을 개척해 가는 타쉬에게 감동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의 사람들의 선한 마음에 감동받는다. 내가 눈이 멀더라도,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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