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쪼가리 자작 - 칼비노 선집 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평점 :
절판


이탈로 칼비노라는 이름, 문호의 냄새가 폴폴 풍긴다.(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우연히, 민음사에서 나온 칼비노 선집 첫번째권, '반쪼가리 자작 '과 조우했다.

말 그대로 반쪼가리 자작. 무언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거라는 나의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반쪼각이 난 자작의 이야기.

세상물정 모르는 테랄바의 자작(이름은 또 잊어버렸다..휴)은 어느날 전쟁에 나갔다가 대포 총구로 용감히 돌진하다가 발사되는 대포를 껴 안고 말 그대로 반쪼각이 난다.

현실에서라면 그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만, 소설속의 훌륭한 의사들은 반쪽뿐인 그를 소생시킨다. 그리고 테랄바로 돌아온 자작.

야누스의 얼굴이라고, 사람들은 모두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칼 융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억압된 부분의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고, 어느순간 그게 표출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 없이 착하고 순한 사람이 화가 나면 어느 누구보다도 포악해지고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테랄바로 돌아온 자작 그 반쪽은, 자작의 어두운 부분이었다. 한 없이 악한 부분. 자작의 영토에 살던 사람들에게 화가 미칠것은 뻔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느날, 또 다른 반쪽의 자작이 테랄바에 나타난다. 절대악의 반쪽 그것은 당근 절대선.

아마 우리가 어렸을적 읽었던 동화라면, 절대선의 자작은 절대악의 자작을 무찌르고, 마을을 평화롭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세상엔 평화와 선만이 가득 들어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언할 수가 없다. 절대선이 좋은것이다고, 절대악은 나쁜것이라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문둥병에 걸린 버섯 마을 사람들에게 쾌락을 쫓는것은 나쁜짓이라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그나마 잊고 있던 절망스런 상황과 맞딱드리게 만들었을 뿐이고, 죽도록 일만하고, 그에 정당한 댓가를 바라는 위그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해 곡식값을 깍으라는 것은 불공평한 행위로 비춰졌다.

항상 지나치거나 모자란것보다 적당한게 최고라는 중용의 의미는, 여기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 둘은 하나가 되어서, 완전한 자작이 되지만, 세상이 너무 복잡하여 완전한 자작으로서도 훌륭히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결말은 아이러니 하기도 했다.

칼비노는 이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여하튼 이탈로 칼비노의 책과의 조우는 흥미로웠고, 그의 동화같은 이야기는 비교적 재미있었다. 앞으로 남은 책들도 읽어볼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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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까 말까 읽어도 후회 안할까 고민 중이었거든요.님의 리뷰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