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도리스 되리 감독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늘 일본에 가 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꼭 그와 함께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얘기가 있다. 연애시절의 호기심, 떨림, 열정, 고독 그리고 그리움등이 결혼과 동시에 점점 옅어져 가는 탓일 테다. 그럼, 40여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에게 남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늘 일본에 가 보고 싶어했던 여자가 있었다. 어느날 병원으로부터 남편 루디의 죽음이 닥쳐 왔다는걸 알게 된 여자는 남편에게 하고 싶은 일을 묻는다. 평생을 한결같이 똑같은 일상을 살아왔던 남편은 죽는 날이 내일이라도 당신이 있는 집으로 돌아올거라고 얘기한다.

 

 일본에 있는 후지산을 보고 싶어 하는 여자에게 남편은 무심하게 산은 모두 같다고 얘기한다.

 여자는 남편과 함께 자식들을 만나러 돌아보기로 하고, 베를린으로 향한다. 첫째와 둘째는 "왜 오셨대?"라며, 서로 의아해 하고, 약간은 불편해 한다.그런 자식들을 눈치 채고, 신혼때 가 봤던 해변으로 향한 두 사람. 그런데, 운명은 참 이상한 것인지, 갑작스레 여자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혼자 남겨진 남편.

 "내게 남은 그녀의 기억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그는 코트 안에 아내의 옷을 입고, 아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그 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모험을 떠난다.

 

 안개와 구름에 가려 그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는 후지산. 드디어 그 산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아내의 가운을 입고서 아내가 배우고 싶어했던 부토 춤을 추던 그  둘의 춤 사위가 계속 아른거린다.

 

 확실히 40여년을 함께 해 온 그들에게는 열정, 호기심, 떨림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항상 함께 있었고, 수 없이 많은 날들을 똑같은 위치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보내왔다. 그 많은 시간동안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여느 자식들처럼 나이가 들어 도시로 떠나갔고, 부모에게 무심하기만 하다. 그렇게 오롯이 함께인 둘 중 하나가 떠나버렸을때.

 

 모험을 싫어하고 반복적인 일상에 길들여져 있는 그였지만, 그녀의 꿈을 마지막으로 이루어주고 싶어한다. 그 둘은 이미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서로를 잘 아는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사랑은 쌍둥이 같은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한날한시에 죽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사랑이 더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많을 세월을 함께하는 사랑.

 서로의 취향이 비슷하거나 좋아하는게 같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익숙해져 사는 사랑.

 사랑한다는 사실이 일상이 되어 특별히 깨닫지 못하는 사랑. 

 

 사랑에 대해 많은 괄호를 남겼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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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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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창 드라마 "선덕여왕"을 즐겁게 보고 있다. 그 동안은 거들떠 보지도 않던 "미실"이란 소설을 들춰보게 된 연유이다. 고현정이 분하고 있는 미실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전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무척 놀랐다. 색공지신이라는 것도 처음 들은 말이었고, 어렴풋이 알긴 했지만 그토록 자유로운 성관계들이 그 시대에 허용되었고, 오히려 장려되기도 했다는 것들이 놀라웠다. 물론 그 풍속은 원시 농경사회속, 모계사회에서의 필연적인 전통이었겠지만, 조선시대 유교사상이 현재까지 지배하고 있는 우리들의 의식속엔 용납못할 행위들일 거란 생각이 든다.

 

 미실은 그야말로 그 시대 색공지신으로서 완벽하다. 어느 남자도 미실을 거부하지 못했을 만큼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색에 대한 기술과 지식도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만큼 잘 알았고, 게다가 똑똑하기 까지 했다. 사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그녀는 신에 가깝다. 이건 뭐 아무리 뒤져봐도 부족한 부분이 없다. 하물며, 세월이 다 해 늙어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쇠락하지 않는 것 같다. 대부분의 미녀들은 늙어감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하는데, 미실에겐 그런 부족함조차 없다. 보통의 인물들은 자신의 몸을 굴려가며, 권력을 차지하고 했다가도, 죽음 앞에선 인생무상을 느끼기 마련인데, 미실은 그런 마음 한 조각 조차 내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괜챦고, 모두를 사랑했었다고 되뇌일 뿐이다.

 

 문득, 미실이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어떤 인물이 되었을까?란 상상을 해 본다. 이런 소설이 쓰여지지조차 않았을지도 모른다. 권력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을것이다. "외모지상주의"가 문제시되고 있는 지금, 미실 또한 그 비난을 피해 갈 수 없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억이라는 원고료를 받은 이소설에 대한 반응엔 이견이 많은것 같다. 공감하기 힘든 주인공에 대한 비난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조금은 모자란 부분이 보이는, 인간처럼 느껴졌다면....혹시 현재 드라마속의 악녀이기라도 했다면, 사람들은 좀 더 연민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사실 우리는 진짜 그녀 모습을, 그녀의 생각과 마음을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상상해 볼 뿐이다. 그녀에겐 그시대 그녀의 삶이 최선이었을테고, 우리가 그녀로 현신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야만 했었을지도 모른다. 삶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난 그녀의 삶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할 수가 없다.

 

 **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는다. 읽기는 재밌다. 낯설지만 입안에 익숙하게 감기는 오래된 단어들과 사자성어들도 많이 보인다. 굳이 사전을 찾아 뜻을 찾아보지 않지만, 의미를 몰라 문장이 안 읽히진 않는다. 소설읽기란 그렇게 중간에 끊김없이 술술 읽는거라 믿기 때문에. 그러다가 드라마 "선덕여왕"의 다음 이야기들이 많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흘러내리는 것은 흘러내리는 대로, 걸리는 것은 걸리는 대로, 무엇에도 조바심 치거나 부러 채근하지 않고 천천히. 스치고 스쳐 지나가고, 흐르고 흘러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마음까지도 껴묻고.
미실이 봄을 따라 세상에서 사라졌다. -34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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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다이아몬드 - The Blood Diamon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언제부터인가 결혼식 예물에서 다이아몬드는 필수품이 되었다. 심지어 다이아몬드의 크기는 자랑과 비교꺼리가 되기도 한다.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다이아몬드를 갖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게 창피하게만 생각됐다.

 

 시에라 리온.

 세계 다이아몬드의 3분의1은 아프리카에서 난다고 한다. 시에라 리온에서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부유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다이아몬드가 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재앙이 되어, 다이아몬드 산지를 둘러싸고 같은 국가의 국민들끼리 서로서로 총질을 해 댄다. 그들은 총질을 해서 다이아몬드 산지를 차지하고 다이아몬드를 캐내, 다시 그 돈으로 무기를 사들여 다시 전쟁을 벌인다. 다이아몬드가 그곳에 존재하는한 그 전쟁은 끝이 나지 않을것 같다.

 

 문득 영화 중간에 반군들에게 초토화된 마을에 살아 남아 있던 노인이 하던 대사가 문득 생각난다.

 

"석유가 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다."라고.

 

 그들의 내전은 그들만의 탐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다이아몬드를 탐하며 갖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탐욕이 다이아몬드의 수요를 늘렸을 터이고, 가격을 올리고, 다이아몬드산지를 차지하기 위한 내전을 치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할 원주민들은 반군들을 피하여 피난을 가야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세계인들의 구호의 손길만 기다려야 한다. 그 중에서도 운이 없는 어린 아이들은 소년병이 되어, 사람죽이는 법을 배우고, 자신들의 유년시절을 잃어간다. 세계의 반쪽은 점점 더 많은 부를 쌓아가는 반면, 또 다른 반쪽은 미래마저 약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TIA. This is Africa.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세삼스레 들었다. 나는 사실 풋풋한 미소년 시절보다 이 영화에서의 모습이 더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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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01-2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참 가슴 아픈데...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되새기게 합니다

습관 2010-01-21 16:04   좋아요 0 | URL
세상에 대한 인식까지 넓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다이조부 2010-01-2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이야기는 아니고

최근에 일밤에서 단비 라는 프로에서 아프리카 가서 그 나라 물 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우물을 파는 코너가 있어요

그 지역에서는 물을 여자들이 많이 옮긴다고 하는데 물 을 구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데 그 이동간에 강간이 그렇게 많다고 하네요

성욕이 수면욕이나 식욕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인정은 하지만

참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글프고 쓸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휴우

습관 2010-01-22 10:00   좋아요 0 | URL
'지구에 하나뿐이 병원'이란 책에선 '누'라는 병에 걸리는 에티오피아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아이가 뱃속에서 사산된 상태에서 적절한 의료조치를 받지 못하여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그 뿐만 아니라 잔인한 강간으로 인해 그 상처를 받는 여인들도 많다는 걸 텔레비젼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어요. 얼마전 떠들썩했던 조두순 사건으로 상처받았던 나영이처럼요.

그런것은 좀 근절 되었으면 좋겠는데,
요새 읽고 있는 책에선, 또 석유를 사용하는 우리의 생활습관을 벗어나지 못하면 여자들이 더 억압받는 구조가 될 거라는 무서운 얘길 하네요. 알면 알수록 무서운게 세상인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 싶어질때가 많네요.

다이조부 2010-01-2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녀석 왈

어떤 나라인지는 기억 못하는데 그곳에서는 장애인들을 위하여 무료로 성관계를

해주는 단체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제는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이창동 영화 오아시스 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친

문소리 와 설경구가 쌩뚱맞게 생각납니다. 당시에 지적으로 문제가 있는 장애인

으로 분한 문소리를 설경구가 강간을 해놓고 사랑이라고 우기는 건 아니냐고

지적하는 글이 있어죠. 그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는지도 가물가물 하지만

사랑 이라는 감정에 관하여 다시 한 번 숙고할 수 있는 힌트를 주네요.


글이 두서가 없네요.....
 
포스트잇 라이프 (보급판 문고본)
앨리스 카이퍼즈 지음, 신현림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머리가 무거웠던 모양이다. 가벼운 책이 읽고 싶었으니까. 내용도 분량도 가벼운 책. 그래서 어떻게 하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됐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머리가 무겁고 마음이 답답하다고 하면 이 책을 권해 주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용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다.
 

 흔히 강력접착제를 만들려다가 실패해서 발명된걸로 알고 있는 포스트 잇 (Post-it).  

 

 산부인과 의사이고, 남편과 이혼한 싱글맘인 이 엄마는 바쁜 병원일 때문에 딸과의 교감을 냉장고에 붙이는 쪽지로 대신한다. 그 쪽지 안에는 함께 기르는 토끼에 대한 이야기, 집안에 필요한 식료품에 대한 부탁, 남자 친구 이야기 등등...일상적으로 집 안에서 엄마와 딸이 나눌 법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있다.

 

" 우리 귀염둥이 클레어

토요일에 아침 준비 못하겠어.

일요일 밤에 하자꾸나.

시간 있음 보습제 좀 사다 줄래? 다 썼거든.

아빠가 어젯밤에 전화했어. 전화해 달래.

사랑해

-엄마"

 

 이 책이 이런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로 그치고 말았다면, 그냥 시시콜콜한 쪽지 모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바쁜 엄마는 딸에게 유방에서 발견된 혹 이야기를 쪽지로 전해주게 되고, 괜찮을 줄만 알았던 혹은 결국 암이 되어 엄마의 생명을 앗아간다.

 이 이야기들이 여느 소설처럼 전개되었다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시시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쪽지에 적힌 서로 다투고 화해하고, 서로에게 힘을 복돋아 글 들을 보며, 말하여 지지 않는 나머지 일 들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다른 어느 글 보다도 조용한 슬픔을 주었던게 아닌가 싶다.

 



 

 참, 원작에선 굳이 "포스트 잇"이란 말이 나오진 않은것 같은데, 국내에 번역되는 과정에서 흔히 냉장고에 붙이는 쪽지를 포스트 잇으로 대체한 듯 싶다. 뭐 어쨋거나 중요한건 그게 아니긴 하지만. 우리 정성상으로는 그게 훨씬 잘 맞는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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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루지 -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개리 마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갤리온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머리를 쥐어박고 싶을 만큼 자신이 한심한 적이 참 많다. 가령, 몇 일전 또는 몇 달전 혹은 몇 년전 어딘가에 놓아 둔 사진, 도장, 자격증 등등, 도무지 찾을 수가 없을때, 분명 그 당시엔 "여기잘 둬야지."하고 뒀는데, 어디다 자~알 뒀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다. 여기저기 뒤져보다 망연자실. 또, 내일 당장이 시험 또는 과제 제출일인데도, 소설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한 없이 잠이 와서 그냥 내처 자 버리는거다. 그때마다 드는 "난 왜 이런 인간인 거냐??"하는 생각.

 

 그런데, 이게 나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뉴욕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개리 마커스는 "클루지"란 책에서 이런 현상은 결코 개인의 특수한 상황이 아닌,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많은 일들을 필요한때 적절히 기억해 내지 못하고, 미루기가 일상다반사인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클루지(kluge)란, 임시방편의 해결책을 얘기하는 단어라고 한다. 문제가 생겼을때, 완벽한 해결책은 근본적인 부분부터의 수정이겠지만, 시간상의 제약등의 이유로 그게 여의치 않을때, 되는대로 임시방편적으로 낸 해결책 같은것들, 그런게 그 해결책이 나름 효과적일때, 그걸 클루지라고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가장 큰 명제는 인간의 심리는, 의식은, 두뇌가 돌아가는 체계는 클루지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난 참 당혹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진화의 가장 정점에 서 있는 인간의 모든 기관은 (심지어 두뇌와 심리까지)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하고 가장 완벽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무런 비판없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보니, 지식이 짧은 탓이다. 그 전에도 이런 얘기는 무수히 많았던 모양이다.)그런데 이 사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모든 기관과 심리적 장치들은 기존장치를 가지고 급속하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덧붙이고, 꼬고 방향을 선회한 클루지들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최고 정점을 향하지 못하고, 적당히 별 탈 없는 어느 선에서 타협하여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뱀과 거미를 소름끼치도록 싫어하는 우리의 심리상태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인류가 처음으로 생겨나 살았던 신생대 제 4기 홍적세때,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은 맹수들과 뱀과 같은 파충류, 독을 가진 거미류들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위협하는 생물을 싫어하는 우리의 심리상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 것이라는게 "개리 마커스"와 같은 진화 심리학자들의 의견이다. 그런데 이런 심리는 요즘같은 현대 시대에는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현재의 인류는 자동차를 더 싫어하고 두려워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심리는 현대를 겪은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그런 심리기제가 적합하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 자동차가 사라질때쯤 되면 인류도 적응하여 자동차를 뱀과 거미를 보듯 싫어하게 될까? 이것은 알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개리 마커스"는 우리에겐 두가지 심리체계가 있다고 본다. "반사체계"와 "숙고체계"다. "반사체계"는 말 그대로, 반사작용처럼, 우리 유전자 깊숙히 각인되어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체계이고, "숙고체계"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 나타나는 체계이다. 우리의 심리는 이 두 체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은 "숙고체계"의 승리로 합리적이고 개개인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될 수도 있겠지만, 과제나 시험공부를 미루거나 과식을 하는 것처럼, "반사체계"가 승리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실수와 잘못들은 대부분 이 두 체계의 경쟁에서, "숙고체계"가 승리를 거두지 못한 탓이 클것이다.

 

 물론, "클루지"인 우리의 심리가 단점만을 가진것을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완벽한 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면, 세상은 완벽했을 것이다. 단, 지루하리만치. 범죄도, 사고도 어떤 문제점도 세상엔 없었을 테고, 그만큼 어떤 변화도 발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흥미진진한데는, 완벽하지 못한 우리의 심리체계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클루지인 우리의 심리체계를 극복하고 보다 더 나은 우리 자신을 만들 방법은 없을까?

 

 개리 마커스는 13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1. 대안이 되는 가설들을 되도록 함께 고려하라.

2. 문제의 틀을 다시 짜고 질문을 재구성하라.

3. 상관관계가 곧 인과관계가 아님을 명심하라.

4. 여러분이 가진 표본의 크기를 결코 잊지 말라.

5. 자신의 충동을 미리 예상하고 앞서 결정하라.

6. 막연히 목표만 정하지 말고 조건 계획을 세워라.

7. 피로하거나 마음이 산란할 때는 되도록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

8. 언제나 이익과 비용을 평가하라.

9. 누군가가 여러분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라.

10. 자신에게 거리를 두어라.

11. 생생한 것, 개인적인 것, 일회적인 것을 경계하라.

12.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13. 합리적으로 되려고 노력하라.

 

 무언가 결정을 해야 할 온갖 소소한 일상에 부딪힐때, 내가 위의 열세가지 항목을 기억해 낼 수 있을지는 참 자신없는 일이다. 사실 나는 모든 결정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동안 갖고 있던 내 신념이 잘못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든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 중 하나는 내가 합리적으로 생각할 만한 정보를 내 손 안에 모두 갖고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순간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 아마 아주 작은 일들에 난 합리적이려 애쓸 수 있겠지만, 역시 난 "클루지"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인 "개리 마커스", 그는 저글링과 외발 자전거 타기가 취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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