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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염천 -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터키 여행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무척 조심스럽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여간 많은게 아니니까. 더구나 하루키의 전작을 다 섭렵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일텐데, 하루키 장편 소설만 좋아했던, 나로서는 하루키를 아는 척 하기가 심히 부끄럽기도 하다. 더구나 장편만 좋아했다고 하면서도 아직 '1Q84'는 읽지도 못 했을 뿐더러 구체적인 독서 계획도 잡혀 있지 않다. 그저 막연히 '언젠가는 읽으리라.'라고 생각하고 있을뿐. 하루키식으로 느긋하게.
'우천염천'은 순전히 제목만 보고 선택한 책이다. 예전에 나온 파란색 책의 '우천염천 : 거친 비 내기고, 뜨거운 해 뜨고'란 제목이 좋아, 아주 오래전부터 중얼거리며 언젠가는 읽겠다고 '1Q84'처럼 느긋하게 결심했던 책. '그 제목이 왜 좋은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말문이 막힐 뿐이다. 그냥 좋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내용물에 대한 사전정보 하나 없이 제목이 맘에 들어 읽은 책이 몇 권 있었다. 얼마전 읽은 '노년의 즐거움'도 그렇고, 읽고 있는 '지구위의 작업실'이란 책도 그렇고. 왠지 제목에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책들.
문득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이란 소설 뒷편에 붙어 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앞편이었나?) 원래 제목을 '금과 은'이라고 할려고 했지만, 간지가 안나와서 바꿨다는 이야기였다던가. 제목은 참 중요한거 같다는 생각을 잠시잠깐 하면서.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스 아토스의 성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전에 다치바나 다카시의 '에게:영혼 회귀의 바다'에서 접한 적이 있어서 아마 더 기억에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반면 터키의 변방에 대한 이야기는 읽는 와중에도 낯설면서도 그다지 기억에 깊이 남지 않는다. 아토스가 여자들의 출입이 거부된 것이라는 내용에 더 그 내용을 기억속에 그러쥐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마 기회가 된다해도 평생 그 곳에 가보지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해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내 개인적 감상을 말해보자면, 여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장소가 전 세계에 한 군데쯤 있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장소가 어딘가에 있다고 해도 나는 별로 화나지 않는다. -19쪽
이런식의 쿨한 말투가 하루키만의 개성 아닐까?
식사가 끝날 무렵 수박을 담은 접시가 나왔다. (중략)
그리고 O씨가 두 입째 수박을 먹으려고 하자 순례자 아저씨가 그를 노려보면서 "안 돼!"라고 말했다. 그런 이유로 O씨는 모처럼만의 생일임에도 수박을 한 입밖에 먹을 수 없었다. "맛있었는데 말이죠"라며 그는 분하다는 듯이 말한다. (중략) O씨도 어떻게든 틈을 타서 수박을 낚아채 가지고 왔다. 이 사람은 시종일관 수박에 집착하고 있었다. -106~107쪽
'흐흐' 거리며 웃게 만드는 이런식의 결말도.
모든 여행은 같은 곳을 다녀왔더라도 여행을 한 사람 모두에게 각기 다른 것일 것이다. 금욕적이며 편리성과는 거리가 먼 아토스도, 가난하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는 터키로의 여행도 하루키를 통해 너무나도 개성적인 여행이 된다. 내게는 제목만큼이나 매력적인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