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근대 이행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전체를 시야에 놓고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덧붙여서 말한다면 일본인으로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나에게는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이 동아시아와의 공통성을 중심으로 일본의 전통사회를 파악함으로써 일본사 연구에서의 탈아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가설이기도 하다. - P43

소농사회라는 것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리거나 간에 기본적으로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독립적인 농업 경영을 행하는, 그러한 소농의 존재가 지배적인 농업사회를 지칭하는 말이다. 자신과 그 가족 이외의 노동력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이러한 소농사회는 얼핏 보면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극히 보편적인 존재라고 생각되지만, 17~18세기의 동아시아에서처럼 소농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는 오히려 예외적이다. - P49

동아시아에서 소농사회가 성립함과 더불어 형성된 사회구조의 여러 특징은 종래 ‘전통‘이라는 말로 일괄적으로 통칭되어왔다. 그리하여 전통과 근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에 좀 더 높은 가치관을발견할 수 있는지의 구별은 있더라도, 이 둘을 대립시키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전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첫 번째로, 전통이란 것은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본다면 지극히 새로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결코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14~17세기에 걸쳐 일제히 형성된 것이며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로, 전통은 근대에 의해 해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이며 전통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근대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때로는 강화되기도 했다. 원래 전통이라는 것이 의식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변동을 거시적으로 볼 때, 그 최대의 분수령은 전근대와 근대의 사이가 아닌 소농사회 성립의 전후에, 달리 말해서 전통의 형성 이전과 그 이후 사이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엽이라는 현재의 시점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소농사회 성립기에 필적하는 제2의 대전환기의 출발점에 해당된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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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국이 북한처럼 "다양한 이의를 허용하지 않는" 독재국가라면 모를까, 한국은 빛나는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회이자, 다양한 견해가 충돌하여 격렬한 마찰과 대립을 펼치는 역동적인 사회이다. 한국 사회가 갖는 역동성은 일본 사회보다 훨씬 큰 역동감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동적인 민주주의 한국 사회에서 아직 일본에 관한 담론에서만 "이의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특별한 관계, 그러니까 일본에 관해서만 사고가 정지되는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 P131

지금 일본 사회는 "남은 어차피 남이다"라는 생각이 극한에 달하여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인식만 가득하고 말았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달성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일본 사회는 명백히 생명력을 잃고 있다. - P132

자기 진영을 존속시키기 위해 ‘사악한 타자‘가 반드시 필요한 세력이 한국과 일본에서 상호의존하고있는 것이다. - P135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한국이라는 대상을 너무 이데올로기나 이념을 통해 인식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통해 이해되는 대상은 언뜻 보기에 매력적이지만 어디까지나 피상적으로 이해될 뿐이며 이윽고 독자나 관객은 그러한 ‘겉모습‘에 질려 떠나고 말 것이다. - P142

한국인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일본에 나쁜 인상을 갖는 이유‘의 1위로 "한국을 침략한 역사를 올바르게 반성하지 않으니까"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결과가 나옵니다(예를 들면 일본의 언론NPO와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소가 공동으로 시행하는 매년 ‘한일공동 여론조사‘), 한국 사회에 계속 살고 있으면 당연히 이러한 인식을 갖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쪽에서 말하자면 "일본이야말로 세계에서 식민지 지배나 전시 여성 인권 유린 문제에 정부가 처음으로 공식 사죄한 국가다"라는 사실의 ‘무게‘를 한국 쪽이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일본인은 독일과 달리 역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는 스테레오 타입의 말을 들을 때마다 대체로 일본인은 강한 위화감을 느낍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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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차치하고.. ˝정말 그대로였다˝는 번역을 한 거냐 만 거냐. 원문이 아마 소노토오리..일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정도로도 번역을 안 하다니...

대통령이 된 후에는 ‘불통‘이라는 악명을 얻고 청와대에서도 거의 혼자 식사를 하는 ‘혼밥‘였던 점이 인기 없는 박근혜 대통령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그녀야말로 옛날 방식 ‘일밥‘을 거부하고 여성이 ‘혼밥‘을 즐기는 시대의 선두에 선 "멋있는 여성"이라고 한다. 지금의 한국인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말이지만 5년 후에는 많은 한국인이 "정말 그대로였다"고 말할 것이라고 한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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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현 공산주의 정권은 일절 아무런 관계도 없음에도 ‘중국‘이라는 카테고리를 남용해서 일체성을 위조하여 강조한다. 그리고 춘추시대의 공자와 21세기의 시진핑을 어떠한 형태로든 연결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기만이다.
도덕을 꺼내서 자기의 권위를 부여하려고 꾀할 때 항상 니힐리즘은 거기에 잉태된다. 전쟁 전의 일본이 ‘도의의 대일본제국‘을소리 높여 외칠 때 거기에는 강렬한 니힐리즘의 느낌이 감돌았다.
도덕성을 강조할 때 일상과 도덕에 괴리가 발생하며 그 틈으로 니힐리즘이 침투한다. 사람은 자기 국가나 공동체의 도덕성을 믿고 싶지만, 믿기 위한 증거는 전무하고 대신 고대의 ‘성인‘의 말만있다. 이것을 믿는다고 해도 현대 중국의 지식층에게는 무리이다. 그러나 믿는 시늉은 해야 한다. 니힐리즘은 진행되어 흰개미처럼 국가의 가람(伽藍)을 좀먹어 간다. - P107

한국의 니힐리즘은 기본적으로 자기 역사를 직시할 수 없는 부분에 발생한다. 이것은 중국, 북한, 일본에도 공통된 사항이지만 한국의 경우, 역사 인식 그 자체가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여기에 허위가 활개를 친다.
주자학적 전통과 대일본제국의 ‘도의국가‘라는 컨셉의 영향을 받아 한국은 자신을 도덕적인 국가, 정의로운 국가로 규정하고 싶어 한다. 이 도덕이라거나 정의 같은 개념이 위험한 것이지만, 한국인은 그 위험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일상생활과 다른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개념이 일상을 지배했기 때문에 국민의 삶은 소외된다. 이념이나 정책 때문에 한국인의 인생은 헛되다.
국민의 삶을 저해하는 다른 요인은 경제발전 지상주의라는 병폐이다. 한국 국민은 삶 자체를 살기보다 반대로 정의니 경제니 하는 개념이나 이념에 따라 사는 역전현상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 나라의 생명은 정의와 경제이며 국민은 그 생명을 위한 수단이라는 역전현상이다. - P109

"일본은 제대로 된 일류 국가이다"라는 긍지를 가지면 좋지만 이런 인식 때문에 국가에 관한 모든 사고가 정지하면 안 된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보수도 좌파도 이러한 "일본은 제대로 된 국가"라는 환상이 너무 강하다.
사실 일본에 사는 사람 누구나 자국의 수준이 낮다고 느끼곤 있으나 큰 소리로 말할 수 없었는데,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허둥지둥 실효성 낮은 대책들만 내놓으면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일본인은 일본 사회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이라는 국가가 정상임을 증명한다는 사고방식에 너무 익숙해졌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불안정한 움직임 자체는 국가의 흠으로 인식된다. 물론 법과 사회의 안정성은 중요하다. 한국처럼 불안정한 사회에서 살게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예를 들어 자기들이 만들지도 않은 헌법을 절대로 건드리면 안 존재로 간주하여 아무것도 손대지 않아야 ‘정상국가‘라고 생각하는 수구지상주의(좌파와 리버럴)가 일본 사회에서 너무 큰 힘을 갖고 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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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덕은 "미국과 동맹을 맺은 덕분에 한국은 50년 동안 경제성장을 겪고 안전을 보장받은 사실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진보세력이 그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려고 하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진보세력은 미국이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는 데도 불구하고 왜 반발도 하지 않고 따르기만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이제는 성장한 한국의 국력에 걸맞게 대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 P79

돌이켜보면 한일 월드컵 때도 한국인은 ‘이익‘이라는 단어를 많이 말했다. 이 대회는 한국의 국력을 세계에 명시할 절호의 기회임과 동시에 다양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무대라고 언론에서 많이 외쳤고 국민으로부터도 그러한 목소리가 자주 들렸다.
여기에는 유교 사회에서의 도덕관이라는 요소가 여실히 나타난다. 즉 유교도덕이라면 이익을 배제한다고 생각하기 일쑤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해라는 사실이다. 의와 이의 쌍방을 다하는 것이 유교의 본래 이상이다.
그것은 유교 안에서 가장 엄격한 도덕주의와 동기주의를 내세우는 주자학에서도 그러하다. 애당초 의만 추구하고 이를 버리면 유교가 아니게 되고 만다. 유교는 현실 정치와 행정을 올바르게하려는 사상이지, 수도원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확실히 주자학이란 사상은 유교 중에서도 의를 강조하고 이에는 엄격하다. 하지만 3장에서 말한 ‘북학‘은 똑같이 유교에 속해도 주자학보다 훨씬 공리주의적이라서 이러한 요소가 전면에 나오면 한국인은 의와 함께 이(利)를 거리낌 없이 말한다. 그러한 유교 세계관에 단련된 한국인의 감각과 전후 일본인의 ‘청결 절대주의‘의 감각은 꽤 다르다. - P81

북한의 근본 사상인 주체사상은 원래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을 체결한 후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자주성을 잃을 뻔했을 때 김일성이 외교적 입장에서 자국의 주체성을 내세우면서 탄생했다. 이후 주체사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철학의 토대를 다져 혁명도덕으로 무장한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라고 말하게 되었다. 특히 현실 외교에서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굳건한 저항자세를 보이는데, 악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이 가장 숭고한 도덕인 것이다.
북한의 경제는 파탄났고 정치는 다른 나라에서 따라 할 수 없는 방식이지만, 한국인이 봤을 때는 주체사상은 종북 세력이 아니라도 도덕을 지향하는 사람에겐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좌파인 문재인 정권이 탄생하고 한국인의 심리가 북한에 끌려다니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역대 보수정권의 가장 큰 약점이 자주성, 그 중에서도 역시 일본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보수는 일본과 타협했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았기에 북한에 국가의 정통성이 있다는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물론 한국인으로 태어나 자랐으니 국가의 정통성은 대한민국에 있다고 분명히 생각하겠지만 마음속 깊숙이 "일본을 상대로 저렇게 버티다니, 북한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버리지 않았고, 만약 주체사상을 버린다면 북한은 사라진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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