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얘기인 줄...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녀는 혼자 있을 때가 제일 좋았다. 혼자 조용히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게 좋았다. 남자들은 질색이었다. 그들의 자존심과 허풍과 불안정한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여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인생의 동반자를 원하지 않았다.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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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희망이 훨씬 더 잔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나는 도끼날이 번득이는 참수용 도마에 목을 얹어놓은 듯한 기분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며칠을 몇 달을, 몇 년을 살아왔다. 이제는 오히려 도끼가 빨리 내려치기만을 기다린다. 내 목이 베어져야 모든 게 청산될 테니까.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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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내 책이 언젠가 출간될 거라고 짐작한다. 그 사람은 바로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책을 쓰면 출판되는 세계 말이다. 하지만 실제 세계는 그렇지 않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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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ㅡ‘N포 세대‘ 명명이 전제하듯ㅡ취업, 연애, 결혼, 출산 등 청년 세대에 기대되는 생의 과업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단순히 포기한 게 아니라 거부했다. 부모 세대의 젠더 위계를 거부하고, 성별 분업구조에 기반한 정상 가족을 거부하고, ‘나‘를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노동 윤리와 규율을 거부했다. 이러한 단절과 거부의 정치를 거쳐 다시 만들어야 할 미래는 막막하기도, 두렵기도, 설레기도 했다. - P317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 다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1990년대 후반 경제 위기에 유년기를 보냈고, 예측 불허의 삶을 온몸으로 경험한 부모로부터 때로 과도한 관심과 투자를 받으며, 또래와 살벌한 경쟁을 거듭 치르고 첫 관문인 중상위권 대학에 진입했다. "자기 착취에 가까운 자기계발"로 삶을 마모시키다 보니 우울이라는 집단 감염을 겪고, "첫 일자리로 사실상 ‘신분‘이 결정되는" 노동시장에서 기회의 공정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며 불평등에 예민한 감각을 벼려냈지만, 동시에 국가라는 대서사에 개인을 접붙여온 삶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교육·문화 자본도 축적했다. 이들 다수가 (논술에서 학생부 종합 전형까지) 변화된 입시 환경에서 일찌감치 인권과 민주주의를 학습했고, 외국어 실력과 디지털 소통 능력, 다양한 국외경험을 바탕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글로벌 지식의 소비자이자 생산자가 되었다. - P319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가 자의든 타의든 청년을 공론화 · 정책화하는 중심 역할을 맡으면서 딜레마도 커졌다. 청년이 처한 조건이 어떻게 그려지느냐에 따라 청년에게 부과된 규범도 대책도 바뀌는 상황에서, 어떤 청년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재현하고 어떤 청년은 재현되기만 한다면 위계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전자가 교육·문화 자본을 갖춘 청년들이라면, 후자는 전자에 의해 또는 미디어에 의해 이따금 호명되고 발굴되는 청년 프레카리아트, 예컨대 지방 청년, 실업계 청년, 산업 현장의 청년, 플랫폼 노동자 청년, 수급자 청년, 성매매 청년 등이다. - P321

기존의 빈곤 레짐에서 가난한 사람을 타자화 · 형벌화하는 사고와 행위의 준칙으로 단단히 똬리를 튼 자립이야말로 불안정성을 자기 고통의 서사로 선취한 청년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였던 셈이다. 청년 프레카리아트가 자신의 불안을 제어하고 인적 자본으로 거듭나기 위해 강박적으로 몰두한 담론들은 그렇게 다른 프레카리아트의 불안정성을 심화하고 있었다. - P331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연대를 도모해온 활동가들은 빈곤층을 무기력한 인간, 자립 자활훈련을 통해 하루빨리 거듭나야 할 인간으로 가정하면서 추진되는 여러 제도가 가난의 시간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역설했다. - P331

인터뷰, 토론, 분석, 발표, 글쓰기를 거치면서, 학생들의 질문은 ‘빈곤층은 왜 자립할 수 없는가‘ 내지 자립하지 못하는가‘에서 우리는 왜 자립·자활에 이렇게 집착하게 되었을까‘ 또는 ‘자활·자립 담론은 어쩌다 이렇게 범람하게 되었을까‘로 바뀌었다. 신자유주의 경쟁 속에서 청년들이 사회적 인정을 획득하기 위한 암묵적 근거였던 자립은, 자격 있는 빈민과 그렇지 못한 빈민을 구분하며 빈곤의 위계를 만들어내는 수사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 - P333

교육·문화자본을 갖춘 청년 프레카리아트에게 불안정성이란 단순히 위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열망을 지폈는데, 이 열망을 표현, 조직, 확산하는 데 페미니즘이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여성의 결혼, 출산, 양육을 책무로 만든 근대적 시간성, 가부장적 가족제도, 남성중심적 조직 문화를 거부하면서 다르게 살아갈 자유는 ‘정상‘ 규범을 이탈하는 데 따른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추구할 가치가 있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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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반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위에 놓인 한국인 이주자들을 지목했다. 이들은 ‘루저‘나 ‘찌질이‘로, 조선족에 관한 차벌이 고스란히 담긴 ‘신조선족‘으로, 아니면 싸잡아 ‘한국 사람‘으로 불렸다. 한국인 이주자들이 조선족과 맺는 관계가 변하고, 한국과 중국, 더 나아가 글로벌 정치경제의 변동과 얽히면서 지난 20여 년 동안 겪어온 사회경제적 지위의 부침이 시타의 흥망성쇠와 조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 P273

실제 지형이 이처럼 복잡한데도 시타에서 조선족의 상향 이동과 한국인의 하향 이동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성공한 조선족‘과 ‘찌질한 한국인‘을 대별하는 서사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1990년대 한국에 이주 노동 온 조선족과 한국인의 위계, 그리고 시장경제 초입에 있던 가난한 중국과 선진국 축포를 쏘아 올린 한국의 위계가 20여 년이 지나 극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 P286

선양에서 만난 한족 택시기사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로 이 차이를 정리했다. "서탑에서 사장과 사기꾼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사기를 쳐서 성공하면 사장님인 거고, 실패하면 사기꾼인 거지." 사업 실패가 납득 가능한 원인에 따른 귀결이 아니라 순전히 우발적이라 생각하는 한국인 자영업자들은 자신의 곤경에 대한 책임을 외부, 특히 성공한 조선족에게 돌렸다. - P292

갈등은 ‘경계인‘ 집단끼리 폭발했다. 단일민족국가를 전제한 채 살아온 한국인이 중국 국적이면서 동포인 조선족의 불분명한 지위에 의문을 던지며 그들을 집요하게 차별했고, 다시 조선족은 우월한 위치를 당연시하나 현실은 지극히 불안한 한국 이주자를 희화화했다. 경계인이 경계인을 공격했다.
이들이 그나마 적대를 거두고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순간은 자신보다 열위에 있는 다른 경계인-탈북민을 지목할 때였다. - P293

시타의 발전과 쇠락은 한국과 중국은 물론, 글로벌 정치경제의 변동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할 구조적 사안이다. 그럼에도 예측 불허의 힘들이 얽힌 결과를 문화적 적대로 치환하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변동에 쉽게 대처할 만한 자본을 지니지 못한 채 삶의 불안정성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일상적으로.
하향 이동의 실제 경험과 내리막길을 걸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이면서 시타에서 빈곤 문화는 강한 전염성을 갖게 되었다.(중략)나는 빈곤 문화의 신자유주의적 생산에 주목하는데, 이는 "위기가 반복되는 신자유주의 흐름에서 하향 이동이나 삶의 격동을 경험하는 시타의 한국인 이주자들이 자신의 ‘정상성‘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찌질이‘ ‘루저‘와 구분 짓기 위해 자의적인 빈곤 문화의 표식을 동원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 P294

초국적 연결이 급증한 시대, 나락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빈곤 감각을 증폭시키는 시대에 빈곤 복지 · 노동 담론이 서로 맞물리면서 ‘빈민‘을 조립했던 문화 정치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주자, 난민 등) 정치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위에 놓인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겨냥하는 낙인, 열악한 사람들이 서로를 구별 짓는 표식을 전방위적으로 확산해내는 것이다. - P295

시타의 이주자사회에서는 조선족이라는 ‘위험한 타자에 대한 의존이 비정상성의 혐의를 받았다. 한때 사업 관계에서 한국인이 조선족에 대해 가졌던 우월한 지위는 옛말이 되고, 두 집단의 위계가 때로 역전되면서, 영세 자영업자나 소상인, 여행 · 비자 중개인, 자칭 백수 등 다양한 위치에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실패를 조선족 탓으로 돌리는 한심한 한국인으로 종종 비난받았다. - P295

조선족에 대한 의존뿐 아니라 가족의 결함, 다시 말해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 가족의 이상에서 벗어난 사람도 ‘찌질한 한국인‘의 혐의를 받기 쉽다. 경제위기마다 가족 ‘해체‘나 ‘붕괴‘를 우려하는 언론,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로 ‘고위험‘ ‘결손‘ 아동을 판별하는 빈곤 담론, 친족 부양 우선주의를 고수하는 정부의 공공부조제도까지, "가족을 통한 통치"는 빈곤의 시공간을 관통한다. - P298

중국에 관한 지식 또는 중국 생활에 관한 이해의 부족도 한국인 이주자들 사이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잣대 중 하나였다. 급격한 변동을 경험하는 나라에서 적응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노력한 ‘나‘와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비교하는 서사가 인터뷰에서 빈번히 등장했다. - P300

중국에 관한 지식이란 상당히 자의적이다. 법, 인정시인맥 중에 어떤게 성공을 위한 지식이 될 수 있는가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조선족과의 관계가 파트너십으로 불리는지, 의존으로 폄하되는지도 대상이 되는 한국인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른 사후적 평가에 불과하다. - P302

한국 이주자들 사이에 팽배한 하향 이동에 대한 공포는 이들이 빈곤 문화의 표식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면서 ‘정상‘ 한국인과 ‘루저‘ 한국인을 구별하는 분류 체계를 작동시켰으나, 전술했듯 이 분류 체계의 근본적인 모호함이 공포를 증폭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전염성 있는 이 공포가 신기루에 불과한 게 아니라, 이주자들의 불안정한 조건 때문에 때로 실체화된다는 점이다. 생존을 위해 비공식적·비합법적 일들에 계속 연루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주자들 스스로 자의적으로 동원해낸 빈곤 문화를 체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 P304

이주자들이 명의를 빌리고, 브로커를 물색하고, 서류를 위조하면서 작은 출구라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고, 여기에 한국인과 조선족이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쌓아온 의심, 차별, 배신의 서사가 포개졌고, 이 과정에서 불안한 이주자들은 한국인 루저와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정상성에 더욱 집착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으나 시타에 험담과 가십이 들끓고, 상호의존이 상호 불신으로 쉽게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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