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는 스탈린이 1930년대에 농업을 망쳤다고 비난했다. 스탈린이 <생전 어디를 간 적도 없고 노동자나 집단 농장에 소속된 농부를 만난 적도 없으며> 오로지 <농촌의 실상을 치장하고 미화한 영화들>에 나오는 어떤 나라를 알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역시 자신의 전용 기차에 편하게 앉아서 보안 요원 말고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기차역을 지나다니며 나라를 보아 온 어떤 주석에게 너무나 뼈아픈 지적이었을 터였다. - P422

 해방 이후에 제대한 570만명의 제대군인들도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기껏해야 농촌에 버려진 채 알아서 살아가야 했는데 집산화 과정에서 밥값도 못한다는 이유로 상당수가 부랑자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또한 만성 질환으로신음하는 제대 군인들이 50만 명에 달했음에도 정부는 그들의 치료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56년 말에서 1957년 초겨울에 결국 분노가폭발했고 대규모 인원이 도시에 집결해서 지방 당국을 압박했다. - P429

상하이에서 파업을 지켜본 로버트 루는 다음처럼 느꼈다. <억압받던 사람들이 다시 새로운 삶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흥분되었다. 공산당 관리들의 변화된 태도 역시 마찬가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들뜨게 만들었다. 그들은 무서워하는 동시에 혼란스러워했고 이전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제 그들은 사람들을 달래려고 애썼다. 특히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듯 보이는 노동자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했다.> - P429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고 불만을 털어놓으라던 주석의 부추김은 혁명의 적들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도록 만들기 위한 교묘한 전략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 P444

때로는 비난의 정치학이 일가족을 산산조각 내기도 했다. 농민을 대변하여 불만을 제기했던 다이황을 고발한 사람은 뜻밖에도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남편이 당을 음해하고자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하는 내용의 벽보를 게시했다. - P445

반우파 투쟁의 임의적인 성격은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마오쩌둥은 우경 세력의 숫자에 할당량을 부과했고 전국의 모든 조직은 주어진 할당량을 채워야 했다. 우경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너무 막연했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는 사람은 잠재적으로 누구나 우경 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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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상 마오 정권은 자유와 평등, 평화, 정의,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였음에도) 같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가치들을 지지했다. 모든 사람에게 직업과 집은 물론이고 굶주림과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다. - P395

마오 정권은 무척 다양한 청중을 상대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최면을 거는 데 뛰어났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제적 평등을 제안했다. 권위적인 정부에 분노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자유를 속삭였다. <그들은 민족주의자들 앞에서는 애국심을,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 앞에서는 헌신을, 억압받는 사람들 앞에서는 복수심을 과시한다.> 요약하자면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의 비위를 다 맞추려 들었다. - P396

마오쩌둥은 강렬하고 선동적인 문구를 내놓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하늘의 절반은 여성들이 받치고 있다>라거나 <혁명은 만찬회가 아니다>, <제국주의는 종이 호랑이다> 같은 구호들이 중국의 각 가정에 스며들었다. 그의 좌우명인 <인민에게 봉사하라>라는 문구는 붉은색 바탕에 현란한 흰색 글씨로 인쇄되어 포스터와 플래카드 형태로 사방에 나붙었다. - P398

 현장의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수많은 추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그들에게 자신이 역사적 대전환기를 살고 있으며 자신보다 훨씬 크고 훌륭한 무언가를 위해 또는 이제까지 일어났던 어떤 일보다 더 크고 훌륭한 무언가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록을 달성한 노동자나 적군의 총탄을 몸으로 막아 낸 군인 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되도록 부추겨졌다. 선전 기관은 본보기로 제시된 수많은 영웅적인 노동자와 농부, 군인등을 끊임없이 미화했다. - P399

전국적으로 주석의 방문은 물론이고 외국인 기자나 정치가, 고위 지도자, 학생 단체의 방문이 있을 때마다 무수히 많은 쇼가 행해졌다. 수많은 불교 사찰이 파괴되면서 소수의 불교 사찰에만 막대한 돈이 투자되었고 그 안에서는 어용 승려들이 신중국의 종교적 르네상스를 설파했다.(중략) 사방에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고 열정적이었으며 입이 닳도록 당을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그 실체는 선전 속 모습과 전혀 달랐다. - P401

중국은 하나의 극장이었다. 심지어 무대 밖에서도 사람들은 강제로 미소를 지어야 했다. 농부들은 곡식을 더 많이 내놓으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조차 팡파르를 울리며 열정적으로 웃어야 했다.(중략) 아시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미소는 언제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곤혹스러움을 표현하거나 고통이나 분노를 감출 때도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괜히 꾸물거렸다가 비난을 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 P401

 베이징의 중심부에서는 톈안먼 광장에 있던 수많은 고대 구조물들이 해마다 열리는 행진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철거되었다. 옛 성곽은 교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대부분 해체되었다. - P402

중앙 정부에서 모든 것을 계획하는 제국에 계획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결과적으로 외국인 손님에게 경외심을 심어 주고 환심을 얻기 위해계획된 겉치레 프로젝트의 일부 중심 항목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근대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반짝이는 겉모습 뒤에 부실 공사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세상이 존재했던 것이다. - P404

해방 이후로 어떠한 개선이 뒤따랐던 간에 보건 분야는 이내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쇄물 형태로 발간된 보고서와 신문 기사들이 보건 분야에서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했지만 기록 보관소에 조용히 쟁여져 있던 훨씬 비판적인 조사 보고서들은 만성적인 영양 결핍과 부실한 건강 상태를 폭로했다. 이런 상황은 집산화가 농민들을 농노로 전락시킨 농촌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409

공산 정권은 이전 정권과 자신들을 비교하는 데 열정적이었고 그래서 통계학자를 선발하여 일제 침략이 시작되기 이전이자 국민당의 절정기이던 193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부적이고 물가 상승률이 반영된 연구 결과를 내놓도록 지시했다. 결과는 대부분이 공개되지 않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해당 연구를 통해 다수의 사례에서 20년 전의 생활이 훨씬 나았음이 밝혀진 것이다. - P411

중국은 구호와 할당량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캠페인으로 운영되는 국가였다. 질병을 통제하기 위해 예컨대 분뇨 처리 방식을 개선하는 등의 다각적인 측면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집산화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 P415

표현과 신앙의 자유, 집회와 단체 결사의 자유, 이동의 자유 등 가장 기본적인 자유가 점차 제한되면서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갈수록 무방비 상태가 되었으며 그들과 정부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할 만한 존재가 거의 전무했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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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와타나베 씨의 수중에는 3000만 원 정도의 예금이 남아 있다. 생활보호를 받지 못한 채 언젠가 예금이 다 떨어질 것이라는 공포와 싸우며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금이 바닥을 드러내면 생활보호를 받게 되어 의료와 돌봄 서비스를 안심하고 받을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생활보호를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고자 애쓰는 고령자들은 노후를 안심하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 P199

구명 구급 현장에서는 어떤 사정이 있든 생명을 구하는 것이최우선 과제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진 환자를 바라보며 심정이 복잡해질 때가 있다고 한다. 한 명의 의사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목숨을 구한 것이 진정으로 이 사람에게 행복한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 P209

이것은 결코 뉴스에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남의 일이 아니다. 다케다 씨는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노후파산의 위기에 몰려 있다. - P218

흔히 노후파산을 도시 지역의 독거 고령자들 사이에서만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지방에서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독거 고령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데이터가 있다. - P225

생활보호비를 받는 것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 같은 정신적인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런 경향은 도시보다 지방이 더 강하지 않을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로 가득한 마을이기에 체면 문제도 있고, ‘가족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라고 가족까지 비난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기타미 씨도 생활보호에 강한 저항감을 느끼는 듯했다. - P239

주위가 모두 아는 사람들이기에 느낄 수 있는 안도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위가 모두 아는 사람이기에 ‘한심한 꼴은 보이고 싶지 않다‘든가 ‘친척에게 창피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강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때때로 복지 제도를 이용하기 어렵도록 방해하기도 한다. - P240

"솔직히 말씀드리면 의지할 상대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을 지원하기가 더 수월하다고 느낄 때도 많습니다. 어중간하게 친족 관계가 있으면 동의를 얻으려 해도 의견 차이로 진전이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 P265

성년후견인 제도를 가로막는 ‘벽‘은 만연한 이기주의와 후견인 제도에 대한 몰이해만이 아니다. 판단 능력을 잃기 전에 자신의 노후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믿을 수 있는 친족이 없다면 자신의 노후를 누구에게 맡길지 결정해놓을 필요가 있는 시대인 것이다. - P271

애초에 돌봄 서비스 보험 제도의 창설 목적 중 하나는 가족을 돌봄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돌봄=가족이 해야 할 일‘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남아있다. 홀로 생활하는 데 불편이나 부자유를 느꼈을 때 적극적으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토록 유도하려면 이런 사회의 인식을 바꿔나가는 일도 중요하지 않을까?
돌봄 서비스는 우리 모두가 노후에 당연하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 P273

도쿄 도내의 지역 포괄 지원 센터에는 노후파산에 처해 생활보호 등을 신청하는 고령자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노후파산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고령자를 지탱해야 할 ‘일하는 세대‘에서도 장래에 노후파산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심각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노후파산 예비군‘이다. - P275

가족이 있어도 노후파산을 피할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 그중에서도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자녀가 일을 그만두고 부모와 함께 살다가 공멸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 P283

이와 같이 부모와 자식이 공멸하는 새로운 노후파산이 잇따르는 데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그중 하나는 ‘고용‘이라는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가 흔들리면서 미래에 대비할 여력이 없는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구조적인 요인이다. 또한 ‘가족‘의 형태가 변하면서 서로를 지탱하는 힘(유대)이 약해지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리라. 사회 보장 제도가 이런 ‘초고령 사회‘의 실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이런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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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부터 특히 조선족 여성들 상당수가 한국바람을 타고 연변을 떠났는데, 이들은 대체로 한국어와 중국어 모두에 능통한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이러한 여성 인구의 감소는 조선족 민족 공동체 내에서 저출생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이들은 귀환하여 가정을 꾸리는 대신 돈을 좇아 떠난 이들로 간주되어 도덕적인 면에서도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 위기 시기에 두만강을 건너온 탈북 여성들이 그 빈자리를 점차 채워 나갔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많은 북한 여성들이 연변의 변경 소도시나 농촌에 정착해 조선족 또는 한족 남성과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 P271

법률상의 복잡성과 보안상의 우려로 북한 출신 여성들의 삶은 감춰져 있지만, 이들이 변경지역 공동체에서 사회적 구성원임은 암암리에 묵인되었다. 대체로 이들은 조선족및 한족과 잘 융합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중국인 남편으로부터 신체적·성적 학대나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일부는 이를 피해 난민 자격으로 한국에 정착하기도 했다. - P272

일부 북한 사람들은 연변과 북한 정부 간 계약에 따라 식당일을 하러 연변에 오기도 한다. 특히 연변의 북한 식당에서 이들은 북한식 한복을 입고 북한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는 이국적 타자로 소비되지만, 동시에 조선족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맡았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한국어에 능통한 노동자이기도 하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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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이주자들은 더는 10년 전처럼 한국 꿈을 예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해온‘ 일들과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일들, 그리고 지금부터 또는 앞으로 ‘하게 될‘ 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고 성찰하기 시작했다. - P226

이러한 재평가와 함께 코리안 드림, 그리고 한국바람에 대한 새로운 서사가 등장했다. 한국에 가지 않은 이들, 즉 연변에 머무른 채 한국바람이 몰고 온 경기 호황의 수혜를 입은 공무원, 지식인, 사업가 등이 오히려 한국에 다녀온 이들보다 더 풍족하게 산다는 것이다. 이는 이동과 떠남을 결핍의 징후로 간주하는 반면 비이동(머묾)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나타내는 근거로 인식하는데, 이렇듯 새롭게 부상한 담론은 조선족에게 해외로 떠나기보다는 중국 내에 정착할 것을 말하는 사회적 권유를 담고 있다. - P228

이렇듯 ‘사장님 자아‘를 지향하도록 하는 사회적 권유는 내가 ‘포스트 한국바람‘이라 부르는 국면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포스트 한국바람‘은 한국바람 시대와 명확히 분리되는 일직선적 발전 단계라기보다는, 일종의 복합지대적 사회 풍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29

 중국의 경제개혁 이후로 대다수 조선족은 끊임없는 이동을 불가피한 삶의 조건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중국이 글로벌 경제 강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연변에서는 비이동이 점차 ‘풍요‘와 ‘안정‘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동에 대한 논쟁도 점점 더 다각화되고 있다. - P230

지난 30여 년간 한국에서 일하며 노동자로 살아온 조선족 이주자들은 ‘생산 수단이라고는 몸 하나뿐인 육체노동‘ (3장 참조)이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 P230

 2000년대 후반 들어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귀환자들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족 귀환자 대부분은 한국에서 단순 육체노동에 종사했기 때문에 연변으로 돌아와서도 시장성 있는 기술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중국 내 신규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웠고, 취업이나 창업 역시 쉽지 않았다.(중략) 한국과 연변을 오가는 반복적 이주는 연변에서 일반화된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유동 인구는 상대적으로 경제 형편이 좋은 조선족들에게서 무시를 받곤 했다. 이들은 단순 육체노동을 하는 조선족 이주자들을 낮춰 보았고, 신문이나 조선족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한국행이 "근시안적 판단"에 불과하다는 사회적 경고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 P231

 한국에 다녀온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은, 훌륭한 ‘수준‘이나 ‘인격적 자질‘을갖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자는 국제 이주노동을 세련된 매너를 습득하게 하는 세계시민적 또는 대도시적 경험으로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그것을 하층 계급의 지위와 매너를 견고하게 하는 일생일대의 선택으로서 이해한다. - P234

중국의 고위 공산당 간부들이나 자국 경제의 부흥과 함께 성공한 이들 중에는 코리안 드림을 좇았던 이들을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시선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 P245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연변의 지식인과 정부 관료들은 이제 한국에 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한국을 ‘일밖에 모르는‘ 삶에 종속된 곳으로 보며, 조선족 이주자들은 한국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 사회 계층에 속한다고 본다. - P246

‘한국식 말투‘ 또는 ‘서울말 흉내‘는 귀환자들이 소위 ‘한국물‘, 즉 한국적 생활 방식을 얼마나 체화했는지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예컨대 연변 사람들은 서울 말투를 흉내 내는 조선족 이주자들이 ‘어색하게‘ 연변 말투와 섞어 말한다고 조롱하곤 했다. 나는 이러한 귀환자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연변의 조선족들을 자주 만났다.(중략) 한국이 여전히 송금, 세련된 생활 방식, 패션, 근대 문화의 원천으로서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기‘는 이제 연변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지 못한다. 오히려 한국식 말투와 옷차림은 결핍의 표시, 즉 중국의 새로운 시장경제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사람의 증거로서 해석되고 있다. - P248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머리를 쓰지 않아요. 그저 ‘몸‘만 쓰죠. 그거 아세요? 나는 한국에서 돌아온 친구들이랑 대화가 안 통해요. 다들 한국에서 10년씩 일하다가 머저리가 되어버렸어요. 하지만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하면 사업을 계속 키울지 고민하지요. - P254

이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삶은 더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력 부졸, 다시 말해 결핍을 드러내는 표시로 간주된다. - P255

이제 한국바람은 1990년대 초만큼 조선족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연변을 오래 비움으로써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이들이 느끼는 이질감과 상실감은 정서적 차원을 넘어, 문화적이고 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성철 씨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알아야 할 무언가를 놓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 ‘무언가‘는 경제적·사회적 성공을 위한 암묵적인 행동의 문법으로써 성철 씨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르지만, 이미 성공 궤도에 오른 사람들과 최근 귀국한 이들 사이의 격차는 점점 더 넓어져 갈 뿐이다. - P260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교차점이자 두 개의 꿈이 경합하는 변경지역인 연변을 지난 30년간 지배해온 욕망, 즉 ‘머무르기 위한 떠남‘과 ‘떠나기 위한 머묾‘은이제 재검토와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 이주노동자가 아닌 사장이 되어 "악순환을 끊어내라"는 사회적 호소가 더해지면서, 코리안 드림은 현재 위기에 직면해 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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