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를 만드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표가 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한국은 왕조(유교적) 전통에 의해 ‘도덕‘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고, 일본에서는 봉건적(비유교적) 전통 때문에 ‘법‘을 가장 중요시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의견을 뒷받침하는 사실로서 한국 사회에서는 반도덕적 행위에 대한 혐오가 가장 강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반헌법적 행위에 대한 혐오가 가장 강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치는 "우리가 만든 규정을 지킨다"는 생각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도덕은 법이나 합의에 따라 일단 형성된 안정성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있다. - P33

하지만 이러한 인식을 쉽게 일반화해 버린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당초에 "일본에서는 법을 중시하고 한국에서는 도덕을 중시한다"는 인식을 내세웠지만, 이 경우엔 한국을 멸시하거나 경시하는 시선은 없다. 그런데 일본의 혐한파는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한국을 멸시한다. 이것이 위험하다. - P34

한국 사회가 품은 거대한 문제 중 하나로 ‘재벌‘이라는 존재의 폭력적일 정도로까지의 자기중심적 행세가 있다. 재벌은 한국이 경이적 경제성장을 맞이하여 선진국으로 밀고 나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치였다. 하지만 그것은 ‘개발독재‘라는 구시대의 압도적 자원집중의 폭력성과 나란히 달리는 장치였다. 그러니까 개발독재 시대가 끝나면서 어떤 의미에서 역할을 마쳐야 했다. 특히 진보적인 정치가나 지식인들로부터 철저하게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인 대다수는 예를 들어 삼성이나 LG, 현대 같은 재벌이 없었다면 중국이나 일본과의 혹독한 경제경쟁에 승리할 수 없다는 의식도 갖고 있다. 그런 의식의 존속이 재벌기업의 병리를 오래 지속시켜 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 P41

1960년대부터 50년 이상 이상하리만큼 속도를 강렬하게 올린 한국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이미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없게 되었는데 30년 동안 속도가 안 올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된 일본 사회와 정반대로 사고가 정지되었다. 한국 사회는 속도를 너무 올렸기 때문에 무언가 생각을 하려고 해도 토대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은 사고가 정지되었다. - P43

일본의 근대에도 이러한 봉건체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본인은 반권력적 지향성이 약하고 법을 금과옥조처럼 준수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덕은 법의 벽을 쉽게 돌파할 수없다. 이러한 사고가 근대 이전 사회의 ‘전체 중간층화‘에 반영되었는데 봉건자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반대로 근대까지 왕조체제의 흔적이 남았다. 한국인은 반권력적 성향이 강하고 법보다 도덕을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자치관념이 희미하고, 한번 결정한 사항을 지키는 것보다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인간이나 조직에 끊임없이 정당한 불평, 불만과 요구를 하는 지향성을 갖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치형인 일본 사회에는 ‘외부‘가 없으나 반자치형인 한국 사회는 항상 ‘외부‘를 향해 계속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 P48

일본에서는 법실증주의적 의식이 메이지 시대부터 강하게 뿌리내렸다. 이것이 관료지배를 아래에서 지탱하게 되었다. 법보다 상위의 개념은 없으며 그 법을 관료가 해석하고 또 입법을 실증적으로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확실히 서양에서 온 법치라는 개념은 일본에 제일 먼저 침투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과 반대로 민주주의의 기능부전(관료지배)이라는 현실이 심각하게 초래되고 말았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도덕 지향 의식이 조선왕조 이래 사회에 뿌리내렸다. 이것은 법의 절대화를 싫어하는 경향이며 법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도덕이 가장 중요하다는 개념이다. 역사인식에서는 사실을 경시하고 "이러해야 한다"는 가상도덕 역사 [Virtual History]의 전횡을 초래한다. 이 점이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과도한 믿음과 실망이라는 현상을 초래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도덕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시스템이다"라고 과도하게 믿고, 그리고 항상 배신을 당한다. - P49

이렇게 생각하면 한국 사회가 항상 강한 가속도를 받아 고속으로 변화하면서 대통령도 재벌도 국민도 항상 무언가를 겁내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그것은 "궁극의 도덕성"을 파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나라에서 결코 높이 평가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며 ‘시민‘
이라 칭하는 단체가 도덕적 헤게모니를 쥠으로써 민주주의도 역사인식도 극도로 경직되고 만다는 사실로 인한 살기 팍팍함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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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얘기가 아니다...

이대로 간다면 일본의 인문·사회과학은 확실히 스스로 서구의 지배를 받는 ‘자기식민지화‘가 심해져서 학계에서 쓰는 언어는 이제 한자나 가나로 표기해도 일본어가 아닌 언어가 될 것이다. 결국 학문 자체가 일반 국민이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철저하게 외면을 받아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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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만 해도 일본은 괴물이면서 또한 스승이기도 했다. 일본은 중국을 가르쳤다. 수천 명의 중국인 유학생이 일본에서 공부했다. 일본은 피란처였다. 중국 정부가 명망 있는 혁명가 쑨원을 포함해 반대자들을 탄압하자 그들은 도쿄로 망명했다. 또한 일본은 중국의 롤 모델이었다. 중국의 개혁 엘리트들은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어떤 식으로 군사화와 산업화를 실현하여 국제사회에서 당당하게 나서게 되었는지주목했다. 좋든 나쁘든, 20세기 중국사의 대부분은 일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들어졌다. 일본과 중국이 ‘순치(이와 입술의 관계)‘라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이었다. - P26

20세기 초까지 일본은 대륙 진출의 야망을 지닌 제국으로 자신을 개조한 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반대로 중국은 완전히 굴욕을 당했다. ‘동생‘과 벌인 첫 번째 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다음에는 일본을 비롯한 여러 제국주의 열강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한 채 많은 영토를 빼앗기는 상황을 감수해야 했다. 이들에게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자기 힘으로 부흥에 성공한 일본의 능력에 대한 존경이 뒤섞여 있었다. - P37

거의 1000년 동안 중국 왕조들은 과거제도로 관료들을 통제해왔다. 그러나 과거시험의 문제들은 경직되었고, 긴급한 현안과 거의 관련 없는 고전적인 판례들의 지식만 요구했다. 1905년, 청은 대담한 조치의 하나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과학과 외국어 공부를 요구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인생의 수십 년을 과거시험만을 위해 공부하며 보냈던 수많은 소외된 엘리트는 기회의 사다리를 강탈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제도의 종말은 중국의 구세대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냈다. 1937년까지 30년 동안 약 3만 명의 중국 학생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과거와는 완전히 뒤바뀐 모습이었다. 예전에 아시아인들은 언제나 중국으로 배우러 왔지만, 지금은 일본이 스승이었다. 예를 들면, 장제스는 중국 학생들에게 군사 전략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도쿄의 진무학교에 입학했다. 동료 학생들 중에는 중일전쟁 중 군정부장을 지낸 허잉친도 있었다. (중략) 그에게 일본에서 3년간의 생활은 일본의 질서의식, 외교, 근대화에의 헌신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깊은 경계심을 품게 했을 것이다. - P38

장제스,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왕징웨이 역시 젊은 시절 중국에 구원이 필요하고,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할 사람이라는 신념을 지녔다. 1905년, 왕징웨이는 청을 전복시키려고 쑨원이 만든 비밀 결사조직인 중국동맹회에 가입한 뒤, 금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중략) 왕징웨이 역시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 1904년 일본에 도착해 법률과 정치를 공부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민보』의 편집자를 맡았고 열정적인 구호로 중국에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주요 독자들 중 한명이 젊은 장제스였다.
불과 스물두 살의 나이에 왕징웨이는 쑨원의 헌신적인 혁명 동지가 되어일본에서 돌아왔다. - P40

처음에는 공화국에 대한 많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권력이 정당과 의회가 아닌 군벌들에게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위안스카이는 군사력을 이용해 쑨원을 밀어내고 자신이 대총통이 되었다. 외국 열강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쑨원보다 군인이 정권을 장악하기를 원했다. - P42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내 여러 대학에서 3000명의 학생이 외국 공사관 지역으로 행진했다. 그리고 일본의 이익을 변호한 장관을 ‘나라를 팔아넘긴 도둑‘이라 비난하면서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은 "민주 선생과 과학 선생"을 이용하여 "국내 군벌과 국외 제국주의"로부터 고통받는 사회를 구하자고 맹세하는 운동을 광범위하게 촉발시켰다. 시위는 몇 시간 만에 끝났다. 하지만 그 여파는 다가올 10년 동안 중국의 사회와 문화를 탈바꿈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신문화운동은(이 시위를 기념하는) ‘5·4운동‘과 뒤얽혔다. 애국적인 중국인들은 영원한 약점처럼 보였던 중국의 여러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기술 발전과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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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의 목표 중 하나는 "중국으로 하여금 그 전쟁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수많은 일본군을 중국 본토에 묶어놓음으로써 중국은 전반적인 동맹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P12

중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최후의 항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국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되풀이하여 말했던 기자와 외교관들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을 증명했다. 진주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4년 동안 중국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일본과 싸웠다. 이 기간에 가난한 후진국 중국은 세계에서 군사화가 가장 진전되고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일본군 80여 만 명을 묶어두었다. 그 뒤 4년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의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웠던 연합국의 승리에는 중국의 투쟁이 큰 역할을 했다. - P14

장제스, 마오쩌둥, 왕징웨이 이 세 사람은 종종 거대한 폭력과 더불어 중국의 근대화와 자유에 대한 자신들의 이상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데 전쟁을 활용했다. 이들은 전쟁에서 각자의 진영을 구축했고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승자는 마오쩌둥이었다. - P15

1949년 마오쩌둥의 승리 이후 중국공산당이 권력을 잡고 70년 이상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엄밀히 말해서 일본과의 전쟁이 국민정부를 약화하고 분열시켰기 때문이다. - P16

1949년 이후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관변 역사가들은 항일전의 승리에서 주인공은 중국공산당이었다고 재빨리 수정했다. 국민당의 역할은 부정당했다. 국민당의 전시 정부는 일본보다는 공산당과의 싸움에 집착한 데다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중국 인민을 착취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는 것이다.(중략)중국에서 항일전쟁은 비극 대신 평면적인 악인과 영웅이 나오는 멜로드라마로 각색되었다. 모든 사람이 중일전쟁은 수치스러우며, 마오쩌둥이 만들어낸 신중국의 영광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 P20

연합군의 유럽 우선 전략은 장제스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제스는연합국의 전략적 이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작 자신들의 이익에는 위배되는 방식으로 군대를 배치하도록 거듭 강요당했다. 1945년 평화가 찾아왔을 때 국민당 정권이 절뚝거리며 동정받지 못하는 불구가 된 이유는 맹목적인 반공과 항일의 포기(진주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4년 반 동안 홀로 일본에 맞섰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먹지다) 또는 멍청하거나 원시적인 군사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국내 혼란,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들 때문이었다. - P22

1980년대에 오면 상황은 급변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일전쟁을 놓고 그동안 자신들이 했던 이야기의 주요 대목을 대부분 뒤집었다. 중국공산당은이념 차이를 떠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대가 외국 침략자와 싸우기 위해 단결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난징을 비롯해 새로운 전쟁 박물관들이 일본의 전쟁 잔학 행위를 고발하기 위해 생겨났다. 영화와 박물관들은 국민정부군이 훨씬 더 많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중국공산당이 대일 항전의 최일선에 있었다는 반역사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새로운 학술 연구가 수십 년 동안 굳게 잠겨 있던 기록보관소와 문서들로부터 쏟아져나왔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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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3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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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무명>을 보고, 전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있는 와중에 이 대사를 읽으니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는다...

"맙소사. 어떻게 그렇게 순진할 수 있지? 내 형과 누나는 굶어 죽었어. 알겠니? 우리가 항복했다면, 그놈들에게 빌어먹을 도시를 헌납했다면 가브렐과 알리네는 지금껏 살아 있었을 거야. 우리 도시를 집어삼키고도 나치는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을 거고. 아무튼 그때 항복만 했어도 형과 누나는 긴 인생을 즐겼을 거야. 아이들, 손주들까지 아주 오랫동안 행복하게. 하지만..." - P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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