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이 선과 악의 명확한 경계로 나뉜 곳이라는 믿음은 없었다. 인간은 흔들리는 회색빛의 담배 연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늘 쓰고 다니는 사회적 가면 뒤에 그 담배 연기 같은 매캐한 얼굴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가면을 보고 서로가 인간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형사들이 강력 사건과 사기 사건에서 만난 범죄자들에게서는 우리가 평소 인간이라고 믿는 가면이 벗겨진 민낯이 순간순간 드러나는 때가 있었다. - P33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사진에서 공포는 느끼지 않는다. 정작 두려운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뜨거운 피를 지닌 인간, 그 뜨거운 피를 참지 못해 탐욕에 이르고 살인까지 저지르며,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겁을 먹는 그 치졸한 인간의 민낯을 살인 사건에서 볼 때다. 형사들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이란 존재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공포와 혐오는 물론 허탈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 P77
모든 것이 조금씩 나빠지기만 할 때, 더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그들을 버티게 해주었던 미래가 바로 지금이었다. 나아진다는 말이 데리고 온 곳. 이제 와서 보니 나아진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다. - P350
진정한 우정은 상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상대의 기억을 멋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사이에서만 싹튼다. 노아와 큰까마귀는 그렇게 합의했고, 진짜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당분간 떨어져 있기로 했다. - P285
현대의 전쟁은 사회적 죽음을 겨눈다. 신체가 아니라 신뢰도를 향하는 탄환들. AI 시스템의 전장은 피 대신 데이터로 덮여 있었다. - P191
마고의 기존 시스템은 완벽함을 가장했다. 예측 가능한 사회, 통제된 경제, 안정된 질서. 하지만 그 시스템은 인간성을 대가로 삼았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다 혁신이 사라졌고, 다양성이 무너졌다.고통을 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다가 진정한 교육과 성장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두려움 속에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 P209
사람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이상 인간의 목숨이란 국가 예산의 문제로, 땅따먹기 판돈으로 전락하고 만다. 가치가 낮아지는게 아니다. 정확한 가치가 매겨짐으로써 계산이 시작되는 것이다. - P23
불안이 이끄는 일상은 뜻밖에도 나쁘지 않았다. 매 순간으로부터 소중한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기껍기까지 했다. - P49
단정한 글은 대개 인공지능이 쓴 것이었고 인간의 글들은 대체로 엉터리였다. 글솜씨가 없거나, 논리가 붕괴되었거나, 논리는 그나마 갖췄지만 현실 인식이 망가져 있거나, 단순한 감정 호소에 그치고 마는 수준이거나. 그리고 인공지능들이 다시 이 엉터리 글들을 먹고 뱉어냈다. 그건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가공해서 영양분 큐브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진짜 음식과 쓰레기와 재활용 큐브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 P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