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에 태어난 김일성은 한국말을 거의 할 줄 몰랐다. 그가 아직 어린 소년일 때 가족이 만주에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31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고 옌안 북쪽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쳤다. 1940년 국경을 넘어 소비에트 연방으로 망명해야 했으며 그곳에서 적군에게 재훈련을 받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소령으로 진급했다. - P208
2월에 급히 베이징으로 돌아간 펑더화이는 무모한 전쟁이 빚은 대대적인 인명 손실 문제를 가지고 위취안산에 위치한 마오쩌둥의 벙커 안에서 그와 대면했다. 마오 주석은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자본주의 진영을 상대로 한 승리의 환상에 마음이 온통 빼앗겨 있었다. - P215
1951년 여름으로 접어들자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7월 중순부터 휴전협상이 시작되었지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결렬되었다. 스탈린은 평화를 통해 얻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종전 협상을 지연시켰다. 그는 한국 전쟁에서 보다 많은 미국 군대가 파괴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했으며 어쩌면 잠재적인 경쟁 상대가 소모전에 매여 있는 것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을 터였다. 강화 제의를 잇따라 거부하기는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중략) 마오 주석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군대를 확충하고 일류 군수 산업을 육성하고자 했으며 그 모든 것을 소련에게 지원을 받아서 해결하고자 했다. - P216
협상을 질질 끌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내놓은 구실은 미국이 약 2만 1,000명의 중국인을 전쟁 포로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정작 중국인 포로들은 대다수가 중국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있었다. 남한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들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지 않기 위해 몸에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구호를 새겨 넣었다. 어떤 이들은 혈서를 쓰기도 했다. - P217
많은 병사들이 국공 내전 중에 투항한 국민당 군대 출신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들을 한반도의 사지로 몰면서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3년 전 쉬저우에서 공산군과 싸울 때 공산군이 인간 방패로 이용한 비무장 민간인에게 어쩔 수 없이 총을 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현대식 무기를 상대로 피와 살점을 뿌리면서 차례로 적의 총알을 소진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 P218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한 원인을 둘러싼 중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부추김을 받은 남한이 노골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며 평화로운 북한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각계각층에 있던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에 불신과 불가해, 공포와 명백한 당혹감 등이 뒤섞인 반응을 나타냈다. - P218
이러한 장황한 비난 연설에서 어떤 부분이 면밀하게 계산된 비난이고 어떤 부분이 진짜 분노인지는 구분이 불가능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만큼은 지극히 분명했다. 제국주의자들을 증오하고, 저주하고, 경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221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이 북한으로 보내는 모든 군사 장비에 대해 중국이 대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중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더 많은 군복과 더 많은 의약품, 더 많은 총, 더 많은 탱크와 더 많은 비행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표로 정리된 세부적인 지침을 바탕으로 각자가 내야할 기부금의 규모가 정해졌다.(중략)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자발적으로 한 달 치 월급의 반을 기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내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수금원이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고 결국에 나는 석 달 치 월급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알고 보니 다른 교수들도 나와 똑같은 액수를 기부하기로 약속한 터였다. 그런데도 수금원들은 우리의 기부가 자발적이라는 허울 좋은 소리를 단 한 번도 빼먹는 법이 없었다.> - P223
국가 지도부 전담 병원에서 근무하던 리즈쑤이는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한국전쟁이 아무런 결론 없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어찌 되었든 <중국이 외국 열강과 싸워서 체면을 잃지 않은 것은 백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라고 이 의사는말했으며 이는 애국적 선전에 반응하던 다른 많은 지식인들도 공감하는 생각이었다. - P226
다른 모든 사람처럼 모병관에게도 채워야 할 할당량이 있었다.(중략) 남성의 입대를 유도하기 위해 때로는 그 가족들이 몸값을 받거나 감금되기도 했다. 후난 성 웨양 현에서는 징병 과정이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한 여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운집한 마을 사람들 앞에서 결박된 채 교수되었다. 허난 성과 허베이 성, 산둥 성 일대 10개의 현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징집을 피해 우물에 몸을 던진 사례가 다수 보고되었다. 스스로 목을 맨 사람들도 있었고 두 사람은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러한 자포자기식 행동들은 동시대에 실시되던 공포 정치를 고려했을 때 극단적이라기보다 그럴 만했던 것처럼 보인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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