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된 감정, 혹은 그 비슷한 것이 간간이 새어나오고는 했다. 로스 앨러모스의 비밀 연구실에서 핵폭탄 개발을 담당한 선임 과학자 J.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5년 11월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을 방문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대통령님, 나의 손에 피를 묻힌 기분입니다!" 대통령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냉정하게 오펜하이머를 내쫓고는 "애처럼 징징대는 저 과학자"를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 P17

스팀슨은 많은 결함을 가진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만들 철학을 체현했고 설파했다. 즉 미국의 외교정책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합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말이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인도주의 및 윤리적 가치와, 국익을 위한 냉혹한 힘의 사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 P19

1930년대에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과학자들은 핵에 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영국과 미국으로 갔다(독일이 유대인을 정부에서 쫓아낸 1933년 4월 7일에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미 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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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대에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느냐‘ ‘문학의 힘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같은 질문을 종종 받는다. 문학계에 한 발 걸친 사람이라면 요즘 다들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문학의 힘이 잘 보이지 않으니 나오는 질문이다. 돈의 힘이 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내 귀에는 궤변처럼 들리는 답이 있다. ‘문학의 힘은 무력함에서 나옵니다‘ ‘문학은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 공허한 말장난 같다. 나는 문학에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힘있는 문학이 줄어든 것 아닌가 의심한다. - P264

원래 거대한 사건은 안에서 평가하기 어렵고 처음 보는 일이라면 더 그렇다. - P265

아름다운 노래가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고 그것은 예술의 힘이다. 때로는 찢어지는 비명이 다가오는 재난을 경고할 수 있고 그것 역시 예술의 힘이다. 위로의 노래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사이렌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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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자가 쓴 쉼표 하나, 숨 한 번까지 제대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고고한 비기가 아니라 쓸데없는 신경증일 수 있다는 것, 불필요한 단어를 떼어내고 적당히 정리된 문장으로 속도감 있게 상대의 말을 전달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더 돌돌한 방법이라는 것.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울의 겹이 한 층씩 덧대졌다. 이런 시대에 통역사의 노동이란 쓸데없는 집념과 열정의 산물인가 싶었고, 하루에도 네댓 번씩 밀려드는 자괴와 열등감에서 나는 좀처럼 발을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 P195

다만 그들과의 작업 후에, 나는 내게 맞는 일이 통역뿐임을 깊이 깨달았다. 문장 안에서 나는 평온함을 느꼈다. 반대로 문장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할 때 민감해졌다. 앞으로는 어쩌다 실수로 그런 걸 맡아도 내 의견 따위를 밖으로 꺼내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자고, 내 일이 문장 안에 갇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P210

난데없이 울컥했다. 어째서 욕구 없이 평온한 삶을 누리겠다는 내게 자꾸 그게 문제라고 하냔 말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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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은 그들을 보는 동안 삶이란 성장의 축적이 아니라 그저 그때그때 문제를 안고 육박하는 것일 뿐이며, 어떤 삶은 개선되지 않고 줄곧 서툰 채로 흘러만 간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 세계를 실감할 때 진저리쳤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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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동경일일 1~3 세트 - 전3권(완결)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이주향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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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쇄를 찍자!>의 다크 버전

읽으면서 계속 <중쇄를 찍자!>가 생각났다. 이 만화는 <중쇄를 찍자!>의 다크 버전 같은 느낌이 든다. 한쪽은 주인공이 열정에 넘치는 만화부 신입 편집자고, 다른 한쪽은 본인이 기획해 창간한 만화잡지 폐간의 책임을 지고 사직한 편집자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흔한 말로 작가와 ‘이인삼각’으로 달리며 작가를 다독이고 격려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인 것은 비슷하다. 오랫동안 만화를 그려와 매너리즘에 빠진 만화가, 슬럼프에 빠진 만화가, 독특한 작품세계를 가진 만화가,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일하면서 계속 자기만의 작품을 준비하지만 데뷔하지 못하는 만화가 등, 여러 인물이 <중쇄를 찍자!>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겹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에서의 만화에 대한 시각과 자부심

학창시절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화책을 탐독하며 자라왔고, 고등학교 때부터 주위에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많았고 이후에 실제로 만화가가 된 친구도 꽤 있는 나는 만화 시장이 잡지나 단행본에서 웹툰으로 변화하고, 한국 웹툰이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지금에 와서도 나의 부모님 세대는 여전히 만화를 낮게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만화가 한국보다 훨씬 일찍부터 유행하고 발전하기 시작해 사회적으로도 만화를 존중하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는 것을 종종 느끼곤 한다.(실제로 일본이 가진 강력한 소프트파워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특히 이 작품에서 한때 열정적으로 만화를 창작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만화를 그만두고 나이가 들어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많고, 그런 인물들이 중년이 아니라 노년의 나이에 속하며 사망한 만화가도 있는 것을 보면서 일본의 만화 인프라는 우리보다 훨씬 더 두텁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의력의 고갈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창의력의 고갈이 아닐까.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 밖으로 나가기를 갈구하는 이야기들에 형태를 주어 내보낼 때는 괴로우면서도 행복하겠지만, 언젠가 그런 이야기들이 바닥나 내면이 텅 비어 버리고 백지를 앞에 두어도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 것인가? 그런 날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만화를 그만두고 다른 생업을 찾은 만화가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새삼 이런 생각을 했다.


-시오자와가 한 일은 과연 잘한 일인가?

시오자와가 ‘다시 한 번 만화를 그려 주십시오’라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만화가들을 한 명 한 명 직접 찾아가 부탁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오자와라는 인물의 성실하고 진지한 성격을 잘 나타낸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화라는 세계를 떠나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꾸려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만화 얘기를 꺼내 그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건 어찌 보면 평온한 일상을 들쑤시고 다시 불안정한 상황 속으로 끌고 오는 일은 아닐까? 물론 제안을 받고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한 만화가들은 다시 치열하게 고뇌하고 창작에 매진하며 인생에서 다시 한번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현실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그게 정말로 좋은 일일까? ‘먹고사는 일’의 무서움을 알게 된 지금의 나는 그런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동틀녘> 잡지 성공의 이유

<코믹 밤>은 실패해서 폐간되었지만 <코믹 던>(동틀녘)의 창간호는 성공했다. 같은 편집자가 기획한 잡지이건만 그 운명은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전자는 시오자와가 출판사에 몸담고 있을 때, 출판사의 의견과 어느 정도 타협하여 만든 잡지일 것이고, 후자는 그가 퇴직한 후에 훨씬 더 자신답게 만든 잡지일 것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어찌됐든 두 잡지 모두 시오자와라는 인물의 어떤 중요한 면을 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코믹 던>이 성공을 거둔 이유가, 킬링타임용으로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소비하는 이 시대이기 때문에 더더욱이 늘 존재하는 ‘좋은 작품’, ‘진짜’에 대한 독자들의 갈망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서브컬처를 좋아해서 웹툰과 웹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그중에서 보석을 찾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몇 년에 한 번쯤 정말로 빠져들 만한, 대단히 재미있으면서도 깊이 생각하게 하고 교훈을 주는 작품을 만났을 때의 희열은 뭐라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런 것을 직접 느껴 보았기 때문에 <코믹 던>의 성공도 그런 맥락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진짜 승부는 2호부터”라는 말처럼, 창간호의 성공은 시작일 뿐이고 걱정 없이 기뻐할 수 있는 성공은 아니다. 만화를 사랑하고, 늘 좋은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한 사람으로서 <코믹 던>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유지가 가능한 잡지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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