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딱 2010년대 초반에 중국에서 그랬는데... 타오바오에서 옷 파는 샵 들어가보면 죄다 상품명에‘한국식‘이라고 붙여놨던 시절...ㅎ

요즘 일본의 SNS에서한국풍)는 최고로 인기 있는 해시태그이다. 실제로는 한국이나 한국 문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가장 ‘핫‘하다는 장소, 요리, 패션 등에 관한 정보에 어김없이 이 해시태그가 붙는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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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을 넘나드는 한일 언론의 ‘캐치볼‘이 몇 차례 반복되더니 급기야는 일본 신문들이 "국내의 혐한 분위기를 우려한다"라는 사설을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사이엔가 혐한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일 양국의 언론은 우려의 뉘앙스로 언급함으로써 혐오의 정서가 잦아들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극우 세력에 이 상황은 오히려 세를 불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혐한을 거론할수록 사회적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혐한은 극우 세력의 단골 구호가 되었고, 이제는 그 세력이 구심이 되어 혐오 발언이나 반인권적 행동을 해나가고 있다. - P273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천황‘이야말로 신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나라의 주인이며, 그를 위해 적과 싸우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고 선전해 왔다. 항복을 선언하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일본 대중들은 그 역시 자신과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한다. 불과 70여 년 전에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운 기이한 이야기지만,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은 이성보다 광기에 가까운 법이다.
항복이 선언된 이날을 ‘패전일‘이 아니라 ‘종전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침략 전쟁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특히 과거사에 대한 관점이 현저하게 우경화되는 상황에서 ‘종전일‘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우려스럽다. - P303

일제가 전쟁을 자행하던 당시 일본 사회는 전근대적인 군주제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첫발도 내딛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학기술과 군수산업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즉, 일제의 침략 전쟁은 어떤 정당성도 부여되지 않은 무법적 만행이었다. 시민이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체제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전쟁의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정권이 가해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본의 민중도 폭주하는 권력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정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 P304

일제의 무법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의 시민이 명명백백한 전쟁의 주체라고 단언하기에 애매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방관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전쟁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 전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패전이든 ‘종전‘이든 혹은 ‘해방‘이 되든, 과거 침략 전쟁의 과오를 직시하고 대내외적으로 성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전쟁이 끝난 지 75년이 되도록 일본 시민사회가 풀지 못한 숙제가아니겠는가.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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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사양의 통신 기술이 한국과 일본에서 전혀 이질적인 미디어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삐삐는 목소리나 음악 등 소리를 전달하는 시끌벅적한 구술 미디어로 탈바꿈한 반면, 일본의 포케베루는 문자를 매개하는 과묵한 문자 미디어의 길을 택했다. - P226

코로나19 사태 이후 외식이 어려워지면서 일본에서는 원격 회의 시스템 등을 활용한 비대면 술자리가 꽤 인기이다. 일본인 동료들과 ‘줌 회식‘을 즐기다 보면, 각자 좋아하는 술잔을 기울이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푸는 개인주의적인 음주 문화가 비대면 술자리와 은근히 궁합이 맞는다고 느낀다. 반면, 함께하는 분위기를 좋아하는한국의 주당들은 ‘랜선 술자리‘에 매력을 느끼기 쉽지 않을 듯하다. 한국에는 술잔을 쨍 부딪치고 서로 부대끼는 ‘찐한‘ 술자리를 못 가질 바에는 차라리 ‘혼술‘을 택하겠다는 술꾼도 많지 않을까? - P231

뒤르켐에 따르면 이타적 자살은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해 합리화된다. 개인의 인격보다 집단의 필요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 집단의 명예에 비하면 개인의 삶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이 근저에있다. 집단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경시하는 결론에 쉽게 다다르는 것이다.
일본의 할복 풍습은 사무라이 개인의 목숨보다 무사 집단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가치 판단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선조가 주신몸에 멋대로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신체관도 개인의 개성보다 가족이나 선조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혈연적 집단주의와 관련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타적 자살은 ‘대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개인이 목숨을 버리는 행위이다.
이타적 자살은 개인의 인격과 삶의 다양성을 경시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적이다. 한 개인의 생명을 가볍게 보는 생각은 다른 개인의 생명 역시 대의를 위해서라면 희생될 수 있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 P247

학문의 상아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 하지 않는 경직성도 문제이긴 하지만, 일본 대학의 완고하고 보수적인 태도가 연구 활동의 객관성과 명분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 P261

이동하는 문화의 속성과 관련해서 "주변으로 갈수록 오리지널 문화가 남아 있다"라는 주장도 있다. 식문화로 예를 들자면,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오리지널 레시피의 정통 프랑스 음식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변화했을 파리의 레스토랑보다. 19세기에 ‘이식된 채로 보전된 호치민의 프렌치 레스토랑이 ‘진짜‘에 더 가까운 맛을 재현할 수도 있다니 흥미로운 일설이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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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가 ‘우리‘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은,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이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이 차이가 결정적으로 드러나는것이 존댓말 사용법이다. 일본에서는 외부 사람을 상대로 할 때에는 손윗사람이라고 해도 ‘우치‘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낮추어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 P190

또한 ‘우치‘의 잘못은 곧 ‘나‘의 허물이라는 공식도 성립한다. 공동체 성원의 잘못에 공동 책임을 지는 것이 ‘우치‘의 어른스러운 태도이다. 그렇다 보니 배우자의 과실은 부부가 함께 반성하는 것, 구성원의 실수는 회사 전체가 책임져야 마땅한 것이라고 여긴다. - P191

굳이 ‘소토‘와 ‘요소‘를 구분하는 것은, 사회적 태도와 기대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토‘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상대도 격식을 갖출 것을 기대한다. 서로에게 신뢰할 만한 사회인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요소‘에게는 무례한 태도가 나오기도 한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하던 일본인이, 길거리나 전철에서 마주친 행인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쌀쌀맞게 구는 경우가 있다. - P192

일본 사회의 ‘느림‘은 무슨 일이든 철저하게 하려는 완벽주의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우선 시계를 멈추고 본다. 꼼꼼하게 경우의 수를 분석하고 앞으로 닥칠 낯선 상황에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일단 일이 시작되면 시계가 돌아가기는 하는데, 매사에 디테일을 중시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이는데도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철저한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효율성이 없다. 일본에서는 결과보다도 과정과 디테일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 P199

오모테나시라는 개념에는 친절을 일종의 ‘기술‘로 해석하는 독특한 문화적 코드가 숨어 있다. 손님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스킬, 그리고 손님의 요구에 미리 철저하게 대비하는 준비 정신이 친절을 실천하는 방법론이다. 결과적으로는 손님에 대한 배려와 서비스로 가시화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절의실천 기술을 가다듬고 궁극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자기만족적 환대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 P206

한국과 일본에서 친절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문화적 코드는 서로 다르다. 그렇다 보니 손님의 경험도 다르다. 오모테나시 정신이 살아 있는 일본의 가게에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라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정이 넘치는 한국의 가게에서는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라는 푸근함을 느낄 수 있다. 친절이라고 다 같은 친절은 아니다. - P207

나홀로주의가 늘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 속 문제를 혼자 해결하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함께 고민해야 마땅한 사회적 사안을 개인의 이슈로 치부한다든가, 외부의 지원이 절실한 사안에도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아 고립되는 등의 상황이 비교적 자주 생긴다. 나홀로주의 노선을 고수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더불어 사는 삶의 이점을 취하지 않는다면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다. - P212

일본의 성씨는 매우 다양하다. 수강생이 100명 넘는 대규모 수업의 출석부에 성씨가 동일한 학생이 한두 명 있을까 말까이다. 이러니 성씨로 호칭을 대신해도 한국에서와 같은 대혼란이 생기지 않는다. 많은 일본인이 타인과 좀처럼 중복되지 않는 자신의 성씨를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 P218

-한국과 일본의 성씨나 호칭은 역사적으로는 동일한 한자 문화권에서 파생되었다. 하지만 두 나라에서 이 제도를 해석하고 운영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한국의 성씨가 혈통을 강조하는 것과는달리, 일본의 성씨는 계약적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수단이다. 한국에서 성씨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존재론적 정체성으로 해석되는 데에 반해, 일본에서 성씨는 호칭을 통해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일상적인 정체성으로 활용된다. 사고방식의 차이가 뚜렷하고 대조적이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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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처음 알았는데 겁나 어이없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전의 일본의 범죄 기사에서는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무조건 미녀‘라는 웃을 수 없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실제로 범죄 피해자 중에 미녀가 많았다는 뜻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미녀라는 표현을 붙여 기사를 작성하는 언론계의 관행이 있었던 것이다.
범죄 보도에서 피해자의 용모를 묘사하다니,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다. 또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미녀라는 수식어를 칭찬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구시대적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미녀라는수식어를 붙였다고 한들 범죄의 본질이 바뀔 리 없을 뿐더러, 오히려 보도에 대한 선정적 호기심만 불러일으킨다. 기자 나름대로는 떠난 자를 배려한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어긋난 배려심의 결과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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