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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나는 김훈의 작품을 꽤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최고 대표작인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은 읽었고, 데뷔작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도 조금 힘들게나마 끝까지 읽었다. <현의 노래>와 <공무도하>를 언젠가 읽으려고 미리 사 두었다가 작년 여름에 <공무도하>를 먼저 읽었다.
결과는, 실망했다. 그것도 그냥 좀 실망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이 실망했다. 그것은 내가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의 작가인 김훈에게 기대한 바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나, 또 다른 이유는 김훈이라는 작가의 여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판타지와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마초이즘 때문이었다. 물론 김훈의 글에 마초이즘이 드러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나, 그것이 여성에 대한 판타지적 서술과 결합되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공무도하>의 여주인공(읽은 지 꽤 지난 데다 지금은 책도 내 손에 없어서 이름을 모르겠다)에 대한 설정과 서술은 남성들이 보기에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같은 여성의 입장으로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다. 일단 소설의 첫 장면, 즉 여주인공의 첫 등장 장면에서 그녀가 몸을 씻는 장면의 묘사는 그저, 모르고 썼다고밖에는 할 수가 없다. 이건 정말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다.(씻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읽어 보신 분은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실 것이다.) 이 장면의 서술을 보고 황당했던 여성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라 믿는다. 이어지는 서술 역시 마찬가지다. 어떠한 신기한 방법으로 ‘생리의 마지막 날’임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상태로 씻고 나와서 얇은 속옷 같은 것만 하나 걸치고 있다간 곧 통증으로 인해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구르기 십상이다.(물론 개인차는 있을 것이나 내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경우이다.) 이런 묘사들은 아무리 봐도 여자에 대해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이해할 생각도 없는 작가가 아는 척하면서 쓴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어지는 여주인공의 하루에 대한 서술에서 작가의 여성에 대한, 정확히는 능력 있는 출판사 편집 디자이너(정확한 직함이 기억나지 않는다)로 대표되는 젊은 커리어 우먼의 생활에 대한 판타지가 조금씩 드러난다. '샌드위치와 홍차로 점심', '햇반과 낫토, 깻잎장아찌로 저녁을 먹'는다는 묘사에서 나는 그저 웃어 버렸다. 아, 물론 그렇게 사는 여성이 없다는 건 아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첫 장면부터 여주인공이 샤워하는 모습, 일하는 모습, 식사하는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전형’이다. “자신의 직업을 중시하는 젊고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의 깔끔한 생활”이라는 전형, 혹은 환상이 여주인공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에게는 묘한 관계의 사회부 기자인 애인(남주인공)이 있는데, 그녀는 그가 늦은 밤 혹은 새벽에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전화를 걸어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받아 주고, 그 늦은 시간에 그가 야식을 사들고 찾아오면 같이 먹으면서 그의 취재 이야기를 전부 가만히 들어 주며 마치 무슨 선문답을 하듯 예쁜 말로만 그에게 대답하고, 그가 자자면 군소리 없이 자고, 그런 식으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남주인공에게 일종의 안식, 내지는 구원 비슷한 존재가 된다. 이건 또 어디서 나온 판타지인가. 이쯤 되면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아무리 늦게까지 일하며 새벽에 잠드는 일이 잦은 직업이라 한들 어느 여자가 새벽에 예고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단 한 번도 짜증내는 일 없이 받아줄 것이며(게다가 하던 일을 방해받으면 더더욱 짜증이 날 만도 한 일인데 말이다) 그 시간에 집까지 찾아오는 남자의 짧지도 않은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싫은 기색 없이 들어 주고 위로해 주고 보듬어 주며 안식처가 되어 준단 말인가. 이것은 틀림없이 작가의 그러한 여성에 대한 환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능력 있고, 매력적이고, 그러면서도 남자에게 고분고분한 여성, 혹은 그러한 여성과의 이상적인 연애에 대한 환상 말이다.
생각해 보면 김훈의 소설에는(다른 모든 작가들의 소설도 조금씩 그러하겠지만) 그의 판타지가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공무도하>에는 여성에 대한 판타지가 반영되어 있는 반면 <칼의 노래>나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등의 소설에는 마초이즘적 판타지가 반영되어 있다. 아마도 여성에 대한 판타지 역시 마초이즘의 이면일 것이다. 작가의 마초이즘은 그가 배경이나 소재를 선택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남존여비사상과 성리학 중에서도 예교(禮敎)의 속박(주로 여성에게 가장 잔인하게 적용되었던)이 가장 심하던 조선시대, 그 중에서도 남성성이 가장 강조될 수밖에 없었던 전시(戰時)인 경우가 많다.(<칼의 노래>, <남한산성>) 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도 역시 그는 여성들이 종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거친 남자들만의 직업, 이를테면 소방서 직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그러나 적어도 이런 소설들에는 이토록 정형화되고 환상이 더해진 여성들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작가가 보여주는 남성성의 미학에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무도하>는 아니다. 여주인공의 존재는 같은 여성인 내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거슬렸다. 물론, 나는 이런 여성이, 혹은 이런 여주인공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인공도 있을 수 있고, 어쩌면 현실에도 이러한 여성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주인공의 인물 형상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근래의 현실주의 소설에서 중시하는 것은 소설이 현실을 반영함으로써 얻게 되는 사실성이며, 그러한 사실성은 무엇보다 보편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무도하>의 여주인공상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심지어 독자에게 불쾌감을 주기까지 한다.
결론을 내리자면, 나는 앞으로 김훈의 ‘현대물’은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역사 소설에는 전형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 등장해도, 기분은 조금 나쁘겠지만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현대물’은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조금도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나는 작가의 마초이즘을, 물론 이미 알고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마주 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