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이 동맹의 틀에서 유사사태에 대응할 때 일본은 동맹국에게 편의를 제공하거나 자위대가 무력행사를 포함하는 행동에 나서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당연히 이런 활동은 조약과 법률에 근거해 이뤄진다.
일본이 지금까지 갖춰 온 동맹 조약을 포함하는 안전보장체제에선 유사사태를 각각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사태‘로 구분해법적인 개념화를 하고, 각각의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 세밀히 나눠 구분하고 있다. 일본의 안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순서에 따라 열거해 보면 ‘국제평화공동대처사태‘ ‘극동유사사태(6조 사태)‘
‘중요영향사태‘ ‘존립위기사태‘ ‘무력공격사태(5조 사태)‘ 등의 순서가 된다. - P139

분명 일본과 일본 밖 사이에 선을 긋고, 일본 밖의 분쟁에 말려들지 않게 하는 것을 중시하는 일국평화주의 관점에 서면, 극동유사사태 때 주일미군의 직접전투작전행동에 제약을 가하려는 절차를 만드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또 사전협의 결과 주일미군이 어떤 특정한 극동유사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직접전투작전행동에 나서는 것을 허락한다 해도 일본은 미국의 행동을 묵인한 것일 뿐 자기가 직접 참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 덕에 일본은 이 분쟁에 말려들지 않고 사태를 피할 수 있다. 이것으로 일단 안심할 수 있다. ‘[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P145

일본 정부는 헌법과 자위대의 관계에 대해 이런 사고방식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자위대는 ‘전력‘이 아닌
‘자위를 위한 최소한의 실력‘이기 때문에 합헌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성립하려면 "이보다 안쪽은 필요최소한"이라고 할 수 있는선을 늘 긋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위대와 헌법 9조가 보유를 금지하는 ‘전력‘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무력행사와 일체화론‘도 이 필요최소한론에 근거해 설명할 수있다. 국제평화 협력 등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위를 위한 필요최소한"을 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위대의 활동을 정당화하려면] 무력을 행사하고 있는 외국군의 활동과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이다. - P148

일본이 미국의 기지 사용을 허용하고 있지만 [무력행사에 동참한 게 아니라] 이를 묵인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은 자기 편의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일본은 현재 벌어진 극동유사사태와 관련해 실제로는 미군이 직접전투작전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편의 제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미군의 공격을 받는 상대, 앞선 예에서 보자면 북한은 이 유사사태와 관련해 일본을 미국 쪽에 가담한 어엿한 참전국이라고 간주할 가능성이 높다. - P149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는 극동유사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일이 사전협의에서 어떤 결과를 내놓든, 즉일본이 ‘사용 불허‘를 결정한다 해도 주일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활용한] 직접전투작전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수십년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기시 총리에게 말한 "일본의 의사에 반해 행동할 의도가 없다"는 약속은 당연히 미국의 적대국의 인식을 바꿀 만한 요인이 되지 못한다. - P150

극동유사사태 때 이뤄지는 미국의 군사행동에 대해 일본이 사전협의제도를 통해 선을 긋는 게 가능하다는 ‘일본적 시점‘과, 미국의 군사행동과 그에 대한 일본의 편의 제공은 일체화되는 것이라고 보는 ‘제3자적 시점‘. 이 사이에 극동유사사태에 대한 대처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의 간격이 존재한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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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군은 효율성을 중시한다는 차원에서 동맹국과 지휘권 병립형 체제를 취하는 것을 꺼려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미일동맹이 지휘권 병립형 체제를 취하게 된 것은 [통합형에 대한] 일본의 거부반응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자위대가 미군의 지휘를 받게 되면 미국의 전쟁에 말려들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일국평화주의적인 안전보장관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 P112

이는 동일한 미국인 사령관이 어떤 때는 극동군 사령관의 모자를 쓰고 지휘권 밀약에 기초해 자위대와 주일미군으로 구성되는 극동군을 지휘하고, 어떤 때엔 유엔군 사령관의 모자를 쓰고 유엔군과 한국군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자위대, 극동군, 유엔군, 나아가 한국군이 이 미국인 사령관의 일원적 지휘 아래 사실상 한 몸으로 뭉치게 된다. - P119

미일동맹은 단순한 미일 간의 ‘양자‘ 동맹이 아니라 ‘극동1905년 체제‘라는 근대 이래 지역 질서를 지탱해 온 ‘한미 · 미일 양 동맹‘ 내 하나의 기능이었다. 이는 기지 사용 분야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결론이었지만, 실은 부대 운용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정식으로는 1953년 10월 결성)은 사실상 ‘한미 · 미일 양 연합사령관‘의 지휘권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관계였다. - P119

197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미일동맹의 지휘권 조정은 한미동맹과 따로 떨어져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한국군의 전시 작전권 반환 문제는 일본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 수밖에 없다. - P129

 ‘제3자적 시점‘을 통해 보면, 미일동맹의 지휘권 조정 방식을 어떻게 정할지는 극동지역 전체에서 미군의 지휘체계, 특히 한미동맹의 작전권이나 사령부 지휘 방식이 어떻게 되는지와 밀접히 관련돼 있음을 알 수있다. 일본·미국·한국의 지휘권을 ‘극동군사령부‘처럼 무리하게 한데 묶는 것을 극단적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완전히 따로따로 놀아도 된다는 것 역시 극단적 얘기일 것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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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이전에도 유사사태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할지를 정한 미일공동계획은 있었다. 다만, 이 계획은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두 나라 군 당국(자위대원과 미군) 차원의 협의를 거쳐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내용을 봐도 자위대와 미군의 역할 분담이 불명확하게 정해지는 등 애매한 점이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일본 내부에서 유사사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5년에 큰 소동으로 발전했던 ‘미쓰야 연구‘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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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라는 말이 굉장히 거슬리고 짜증나는데... 니들이 보기에나 평화지...
˝일본이 주변 지역을 억압하며 형성한 질서˝라고 해야 맞는 거 아닌가?

‘극동 1905년 체제‘ 아래서 일본과 주변 지역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질서는 1920년대까지 큰 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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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정부의 원로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는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에게 제출한 건의서 외교정책론 (1890년3월)에서 "국가 독립 자위"를 위해 국토인 "주권선"과 "주권선의 안위와 긴밀하게 상관관계를 갖는 구역"인 "이익선"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익선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가? 야마가타는 조선이라고 논했다. [이 기준을 놓고 볼 때] 한반도가 일본의 적대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근대 일본의 국가안전보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 P50

조선의 전략적 ·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한 것이 야마가타였다고 한다면, 대만이 갖는 비슷한 가치를 꿰뚫어 본 이는 이노우에 고와시였다. 청일전쟁 개전 직후인 1984년 10월 11일 그 직전까지 문부대신을 맡고 있던 이노우에는 원로 이토 히로부미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대만을 점유하게되면 "서해 ·조선해 [남해를 이르는 것으로 보임] · 동해의 항행권을 손에 넣게 돼 동양의 문호를 여닫을 수 있고, 나아가 오키나와와 야에야마 군도와 서로 연락하게 되고,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고 썼다. 실제 대만을 획득하자고 요구한 것은 주로 일본 해군 쪽이었다.
나아가 이노우에는 만약 대만이 다른 나라의 손에 떨어진다면 "오키나와 제도의 안녕이 방해를 받는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1884년 발생한 청불전쟁 때 프랑스가 대만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 P52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매개로 ‘한미 · 미일 양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안전보장 체제 안에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이 안전보장 체제를 기능하게 하는 것이 일본, 그중에서도 오키나와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이다. - P72

미국은 [일본과] 오키나와 반환 교섭을 진행하는 시점에 이미 중국과 화해를 해야겠다는 뜻을 굳히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패전한 뒤 재개된 중국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지했다. 또 미중은 한국전쟁에서 실제 맞붙어 싸운 숙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중국과 화해를 추진했던 것은 북베트남에 영향력을 가진 중국에 접근해 베트남전쟁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은 정식 수교국을 대만에서 중국으로 바꾸면서 1979년 1월 미중 국교 정상화를 단행했다. 그와 동시에 앞서 언급한 대로 미대동맹도 끝을 맺게 된다. - P77

미국은 1972년 2월 27일 미중 공동성명(상하이 코뮤니케)을 통해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 쪽의 주장에 대해 "인식한다acknowledge"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도 그해 9월 29일 나온 중일 공동성명에서 이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밝혔다. 양쪽 모두 "승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게다가 미일 두 나라는 대만해협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을전제로 삼고 있어 ‘대만을 무력으로 합병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는내정 문제일 뿐‘이라는 중국의 주장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미일과 중국이 화해를 한 뒤에도 미일안전보장조약상의 ‘극동‘의 범위에서 대만이 제외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확인해 두려 한다. - P79

미일동맹은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매개로 비로소 극동 지역의 안전보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미일동맹을] ‘일본적 시점‘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3자적 시점‘을 섞어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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