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에 이르자 방화벽이 농촌을 사로잡았다. 춘절 다음 몇 주 동안 광저우 주변에서는 밤에 수백 차례 불길이 치솟았는데 많은 경우 자기 소유의 땅 반환을 요구하는 농민들이 놓은 불이었다. 웡위안 현에서 주민들은 자기들이 막 불을 지른 곡창 근처 벽에 더 이상 자기들 것이 아닌 곡식은 차라리 불을 지르는 게 낫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 P336

그러나 무엇도, 심지어 가장 힘든 시기에도 정권을 흔들 수는 없었다. 벵골과 아일랜드,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다른 기근들에서처럼 아사 사태가 지속될 것이 분명해질 즈음이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미 너무 허약해져 무기를 찾아 봉기를 조직하는 것은 고사하고 옆마을로 걸어갈 기운조차 없었다. 어쨌거나 온건한 형태의 반대조차도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가혹하게 처리되었다. 봉기나 반란의 지도자들은 처형되었고 다른 이들은 노동수용소에 무기한 갇혔다. 수천만 명이 죽어 가는 동안에도 중국이 붕괴되지 않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공산당 이외의 가능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재한 비밀 종파는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지하당이든 간에 기존 정권을 제외한 무엇도 이 광대한 땅덩어리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군 내부의 쿠데타 가능성은1959년 루산 총회 뒤 린뱌오가 실시한 광범위한 숙청으로 미연에 방지되었다. - P338

 희망은 농촌 마을에서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마오쩌둥은 진심으로 인민의 최상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가르쳤다. 제국 시대에 흔한 확신은 황제는 자애로우나그 신하들은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는 그런 확신이 더욱 깊었으니 인민은 대중 매체에서 떠들썩하게 선전해 대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과 파국적인 일상의 현실을 조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부패한 간부가 자애로운 주석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정부>라는 멀리 떨어진 존재와 <마오쩌둥>이라는 반신은 착한 편이었다. 그가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텐데....... - P339

시골 마을에는 도시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그곳은 쌀이 풍부하고 일자리가 넘쳐 나는 천국으로 비춰졌다. 일부 인민공사들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돌봐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실제로 일종의 연쇄 이주를 지원했는데 도시의 노동자들이 보내오는 송금액이 마을 전체의 생존에 기여하기 때문이었다. - P343

 퉁웨이에서 한 철강 공장은 이주자들을 가둬 놓고 음식도 주지 않은 채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켰다. 공장장들이 일자리를 찾는 부랑자와 떠돌이를 마음 놓고 꾸준한 공급받을 수 있는 가운데 그해에 1,000명이 사망했다. 얼마나 많은 공장들이 유사한 조건에서 돌아가고 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 P348

 유엔 난민 기구는 중화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 출신 난민>은 정치 용어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유엔 난민 기구 시스템 아래서 원조를 받을 수 없었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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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순한 거래와 업무마저-표를 구입하고, 쿠폰을 교환하고, 건물에 들어가는 것-깐깐하게 규칙을 따지는 사람과 만나면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 될 수 있었다. - P295

가장 단순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도 개인적 인맥과 사회적 연줄이 필요했다. 힘 있는 친구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행정 절차의 세부사항을 철저히 준수하여, 낯선 사람에게 딱히 혜택을 줘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는 일면식 없는 관료에게 접근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쉬웠다. - P296

그러나 당에 속한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보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 시스템을 이용하기 더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국가를 속이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데 사업가적 지략을 끝없이 발휘했다. - P296

국유 은행으로부터 끝없이 돈을 꾸는 것도 흔한 수법이었다. 1961년 여름에 리푸춘이 30억 위안의 적자에 주목하며 지적한 대로 많은 단체들이 흥청망청 먹고 마시려고 은행으로부터 돈을 꿨다. 그리고 도시나 현이 적자 상태가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세금을 납부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관행은 1960년에 여러 성들이 모든 수익을 성 안에서 보유해야 한다고 명시한 규정을 통과시키면서 시작되었다. - P299

국가를 속이는 또 다른 길은 배급 명단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죽은 사람 장사가 나라 전역에서 성행했다. 식량을 더 많이 배급받기 위해 가족의 죽음을 감추는 것처럼 간부들은 수시로 농민들의 숫자를 부풀려서 잉여분을 전용했다. - P300

 쑤저우에서 현지 조사관들은 쌀 1킬로그램 가운데 절반만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추산했다. 쌀은 곡창에서 빼돌려지고 수송 중에 절취되고 회계원들이 착복하고, 간부들이 몰수해 가고, 밥 한 공기가 공동 식당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요리사가 슬쩍 훔쳐갔다. - P316

기근 시기에는 한 사람이 뭔가를 얻으면 누군가는 잃었다. 심지어 좀도둑질이 얼굴 없는 국가를 상대로 한 것처럼 보일 때도 분배 체계 저 아래 누군가가 대가를 치러야 했다. - P319

 모두가 병사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마오쩌둥은 모든 남녀는 시인이 될 것을 선언했다. 축제가 조직되고 풍년이나 제철소, 치수 조치를 노래한 최고의 노래에 상이 주어지는 가운데 중국인들은 1958년 가을에 수백만 수의 시를 지어야 했다.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열광적 비전이 100만 편씩 쏟아져 나온, 운율을 맞춘 절구(絶句)로 그려졌다. 상하이에서만 고작 20만 명의 노동자가 500만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후원된 시 다수는 다소 진부했지만, 집산화에 대한 반응으로 마을 주민들이 즉석에서 읊은 단가에는 진정으로 창조적인 정신이 드러나기도 했다. - P325

 일부는 최고 지도자들 앞으로 직접 편지를 보냈다. 그들은 황제 앞에 직접 탄원하는 중국 제국의 유서 깊은 전통을 재연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또한 권력의 오남용은 마오쩌둥이 시작한 집산화 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국지적 현상이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셈이기도 했다. <마오 주석이 알기만 한다면> 정의는 수도에서 분명히 살아남았으리라. 편지들은 그러한 희망을 제시했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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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끝난 1991년경, 미국은 어떤 나라가 최대의 위협이라고 생각했을까? 소련은 붕괴 직전이었고, 중국 경제는 아직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미국이 생각하는 최대 위협은 일본이었다. - P317

1990년대 들어 미국은 "동맹국과 미국의 공동 번영을 더는 기대할 수 없었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강요했고,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필요해졌다. 미국에겐 지적인 일본 수상이 더는 필요 없어졌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수상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 P330

비록 정론이라 해도 나 홀로 주장하면 따돌림을 당하는 법이고, 아무리 틀린 말이라도 다수가 주장하면 항상 주류에 남는다. 무리 속에만 있다면 아무리 틀린 말을 해도 훗날 검증당할 위험은 없다. 이것이일본 언론계의 실상이다. - P343

일본의 보수 세력이 신줏단지처럼 받들고 있는 미일 동맹은 언제나 그렇듯 위기 때마다 항상 회귀본능을 자극하는 안식처이자 방파제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자민당 장기 집권기에 자주 나타났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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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7년간 인내심을 가지고 기시를 전범에서 수상으로 변신시켰다. 기시는 <뉴스위크> 도쿄지국장 파케남의 영어레슨을 받으면서 외신부장인 해리 칸을 통해서 미국 정치가와 만나게 된다. 해리 칸은 안보투쟁 시 CIA장관이던 알렌 덜레스와 친구로 나중에 CIA 중개역을 맡았다. 기시는 미국대사관 당국자와의 관계를, 마치 난초를 키우는 일처럼 소중히 생각했다. - P205

국제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이 유명 대학의 학생운동이나 인권단체, NGO 등에 자금이나 노하우를 제공함으로써 반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이렇게 대규모 시위의 경우, 먼저 CIA가 개입했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 P219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은 전후 진보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6월 17일, 매우 이례적인 7개사 공동선언을 경계로 이 두 신문사는 성격이 완전히바뀌었다. 더 유감스런 일은 그것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이 변하면서, 소위 지식인층에도 큰 변화가 찾아와 지식인 사이에 우경화 흐름이 강해진다. - P225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고 갔던 시절의 각료이면서, 도쿄 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수상에게 정국을 맡기다가는 자칫 일본은 다시 전전 체제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 경찰 권력으로 국민을 억압하거나 의회민주주의를 붕괴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과 하나가 되어 해외에 군대를 파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국민들 사이에 있었던 것 같다. 1960년 안보투쟁의 시작은 미국 혹은 미국의 뜻을 반영한 재계의 정치공작에서 비롯되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일본사에 전례 없는 대중투쟁으로 발전했다. - P227

 자주노선과 추종선의 경쟁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일미군 문제이고, 그 다음은 중국과의 관계이다. 일본은 중국의 이웃국가다. 당연히, 일본 국내에는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인 라이벌로 간주하고 있어서, 중국이 공산주의 색채가 강할 때에는 봉쇄정책을 쓰고 군사력이 강해지면 대항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을 둘러싸고 항상 미일 간 갈등이 발생한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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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국 지위를 회복한 뒤 일본은 외교 감각을 회복하려고 해도 오랜 타성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전히 점령군의 중추세력인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주독립의 정신은 한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P144

지금까지 자신이 검열관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사람은 겨우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중에 대학교수나 주요 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점령 후 공무원이 되었을 것이고, 아니면 언론계나 학계, 혹은 경제계에서 나름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중략) 미국 첩보기관에 이용되었던 당시 지식인 계층들은 전후 일본에 무려 5천 명이나 머물러 있었다. 미국의 방침에 거스르면 추방되고, 잘 보이면 경제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그때의 구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P146

가리오아 자금이 중요했던 것은 일본의 엘리트들이 그 돈으로 유학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나 공무원 등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했고, 그중에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 후 일본 사회에서 미일 관계 강화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 P152

2009년 9월부터 2010년 5월까지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이 오키나와 후텐마기지를 최소한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을 암시한 적이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일본 측에서 미군 기지 축소 계획을 제시한 사례는 과거 반세기 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의 주장은 미군이나 일본이 볼 때 반세기 이상에 걸친 기본 노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그러나 하토야마 내각을 붕괴시키려는 움직임이 보기 좋게 성공했다. - P161

결국, 미국은 요시다 - 오카자키 콤비가 교섭하여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기간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법적으로 확보하고," 미군 관계자 전원에게 사실상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수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다. - P169

일본 전후사를 살펴보면, 한때 미국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 정세가 바뀌면서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새로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정치인은 미국에 의해 퇴진당한다. - P172

 북방영토 가운데 에토로후와 구나시리라는 2개 섬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미국이 소련에 준 영토이다. 미국은 냉전 이후 소련이구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일본에 양도하려고 하자 양자 관계에 간섭을 해왔다. 일본과 소련 간 분쟁의 여지를 남겨서 우호관계를 훼방하려는 미국의 속셈인 것이다. - P184

영국 등은 식민지에서 철수할 때, 대부분 분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물러난다. 식민지가 단결하여 영국의 반대 세력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철수할 때 인도-파키스탄 간에 캐시미르 분쟁을 남겨두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철수할 때는 부족 갈등을 일으키도록 국경을 얼키설키 설정한다.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방글라데시까지 만든 것 또한 영국의 전통적인 분할통치 방식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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