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조금씩 나빠지기만 할 때, 더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그들을 버티게 해주었던 미래가 바로 지금이었다. 나아진다는 말이 데리고 온 곳. 이제 와서 보니 나아진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다. - P350
진정한 우정은 상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상대의 기억을 멋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사이에서만 싹튼다. 노아와 큰까마귀는 그렇게 합의했고, 진짜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당분간 떨어져 있기로 했다. - P285
현대의 전쟁은 사회적 죽음을 겨눈다. 신체가 아니라 신뢰도를 향하는 탄환들. AI 시스템의 전장은 피 대신 데이터로 덮여 있었다. - P191
마고의 기존 시스템은 완벽함을 가장했다. 예측 가능한 사회, 통제된 경제, 안정된 질서. 하지만 그 시스템은 인간성을 대가로 삼았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다 혁신이 사라졌고, 다양성이 무너졌다.고통을 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다가 진정한 교육과 성장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두려움 속에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 P209
사람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이상 인간의 목숨이란 국가 예산의 문제로, 땅따먹기 판돈으로 전락하고 만다. 가치가 낮아지는게 아니다. 정확한 가치가 매겨짐으로써 계산이 시작되는 것이다. - P23
불안이 이끄는 일상은 뜻밖에도 나쁘지 않았다. 매 순간으로부터 소중한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기껍기까지 했다. - P49
단정한 글은 대개 인공지능이 쓴 것이었고 인간의 글들은 대체로 엉터리였다. 글솜씨가 없거나, 논리가 붕괴되었거나, 논리는 그나마 갖췄지만 현실 인식이 망가져 있거나, 단순한 감정 호소에 그치고 마는 수준이거나. 그리고 인공지능들이 다시 이 엉터리 글들을 먹고 뱉어냈다. 그건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가공해서 영양분 큐브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진짜 음식과 쓰레기와 재활용 큐브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 P52
2015년판 미·일 가이드라인과 안보 관련 법제 정비를 통해 일본은 그간의 평화헌법이 채워 온 군사적 족쇄에서 벗어나 군사적 의미에서 ‘보통국가‘로 전환하는 첫발을 뗀 것이다. 그 이후의 움직임은 미·일 가이드라인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들이다. 또 일본은 중장기적으로 미·일 동맹을 넘어 독자노선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 P284
저탱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이들은 ‘더러워진 손‘을 감춘 채 생업을 이어갔다. 잘못에 대한 성찰 경험이 없다 보니 사고가 일어나도 자연재해 등 핑계를 대며 적당히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랬던 일본이 이제 와서 ‘순결한 피해국‘ 행세를 하며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이웃 일본의 이런 변화를 지켜보는 심경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 P297
국제정치는 감정이 작동하는 범위가 넓다. 필자는 국가간 관계에서 ‘존엄·감정의 균형‘이 이익 균형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안보와 경제협력의 필요성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언제든 관계를 그르칠 수 있다. 가해국이 과거에 범한 잘못을 제대로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은 존엄과 감정의 균형을 잡는 기초 작업으로, 한·일 관계의 ‘최소 강령‘이기도 하다. - P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