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시리즈....

본가가 20년만에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쓸데없는 묵은 짐들 버리는데 도와주러 갔는데... 여러 추억이 담긴 책들을 발견하여 몇권 집어왔다.

이 책도 70년대 후반에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 잘만들어서 그런지, 그렇게 많이 가지고 놀어도 아직 견고하다. 내가 국민학교때 읽던 책을 내 아이들의 그림책으로 쓴다? 와, 멋지지 않는가..

다만 까불락거리고 종이 찢기를 취미로 하는 내 아들녀석이 이 책을 가만 놔둘까 걱정이다.

 

당시에는 한국브리태니커와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의 책들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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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2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어렸을 때 이걸 보고 컸지요. 다만 얼마전 조카에게 사주려고 다시 보니 좀 실망스럽더군요. 삽화나 내용이 별로 업데이트가 안 되었더라구요.

sooninara 2004-12-2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보관 상태가 좋은데요..

그런데 백과사전은 최신 업데이트가 되어야하는거 아닌가요?

엔리꼬 2004-12-2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요즘도 이게 나오긴 하나보네요.. 반가와요.. 그리고 브리태니커가 예전만 못하더라고요... 보관 상태는 사진 찍힌 면은 좋은데,, 앞쪽은 뜯기고 헤지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살펴보니 1979년에 발행되었군요..
 



계림출판사에서 나온 책... 78년도 발행됨. 당시 1,800원

국민학생때 이 책을 끼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재미나면서도 교훈을 주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글쎄, 지금 읽는다면 그때와는 다른 생각들을 하겠지?

 

여러 위인들의 특별한 이야기들을 각 이야기마다 2-3페이지씩 소개한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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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많이 읽기로 소문난 쇼펜하우어에게 어느 날 이쁜 여학생이 찾아온다.

 "선생님, 혹시 이 책을 읽었나요?"

 "음 아직 못읽어봤는데.... "

여학생 의기양양하여 "어머, 선생님, 이 책이 나온지 6개월이나 되었는데, 어찌 이런 유명한 책을 아직도 못읽으셨나요? 이 책이 얼마나 좋은데요.."

 "그럼 학생은 단테의 신곡은 읽어봤겠지?"

"아니요... 아직 못읽었네요.."

"아니 신곡이 출판된지 벌써 몇백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걸 못읽다니....이 얼마나 멋진 책인데..."

여학생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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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 

1) 대문호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2) 까불지 말자...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자...

3) 고전은 역시 중요한 것이여..

 

교훈은 제가 맘대로 만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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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riton.tpd.tno.nl/gigazoom/Delft2.htm



(사진은 링크 참조)

네델란드 응용 과학 연구 기구(TNO)는 16일(현지 시간), 세계 최대의 디지탈 사진이 완성했다고 해서, 웹 사이트에 http://www.tno.nl/gigapix 게재했다. 데르후트의 거리 수준을 촬영한 사진으로, 표준적인 해상도(300dpi)로 인쇄하면(자), 옆은 6.67미터, 세로는 2.67미터에 이른다. 화소수는 24억 8722만 화소(7만 8797×3만 1565 픽셀)로, 데이터의 사이즈는 7.5 GB에 이르렀다.

 줌을 반복해 가면(자), 차의 등록번호표까지 읽어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사진가의 막스·라이안즈씨가 성공한 10억 9301만 화소(http://www.tawbaware.com/maxlyons/gigapixel.htm )가 최대였다고 말한다.

 데르후트 공과대학의 옥상(지상 약 100미터)에 전동 삼각을 설치해, 합계 600매의 사진을 촬영. 이것들을 1주일에 걸려 이어 대면시켜 거대 파노라마 사진을 완성 시켰다. 카메라는 니콘의 일안레플렉스·디지탈카메라 「D1x」를 사용. 사진의 사이즈가 4 GB이상이 되면(자), 기존의 화상 포맷에서는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개량을 더하는 것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사진에는, 상반신이 없는 보행자가 비쳐 있는 등 「괴현상」도 볼 수있다. 1시간 12분걸려 600매의 사진을 촬영했지만, 1매 촬영하고 나서 다음의 사진을 촬영하기까지 9초 걸리기 (위해)때문에, 사진안에 「시차」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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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2-16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라운 사진이더군요.. 차안이 다 들여다 보여요..+.+

마태우스 2004-12-17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용법을 잘 몰라서....차 안을 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

sooninara 2004-12-2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_ 열심히 눌러보면...재미있네요^^
 

한 시골 의사가 썼다는 글입니다.

성폭행의 고통은 이리 쓰고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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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루에 경험하는 희노애락의 양은 어느정도 일까?

어제 신문에 어떤 할일 없는 친구가 영혼의 무게를 달았더니 (아마 죽기 전후의 몸무게를 비교한 것 일테지만..) 십 그램 정도가 나가더라는 기사를 읽었다.

그 무게를 달았다는 과학자나 그 기사를 쓴 기자나 딱 그 수준이 그 수준인데, 하기는 희노애락의 절대량을 재보고 싶은 나도 어쩌면 그 수준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사는 한 이 네가지의 무게중에서 애(哀)의 절대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삶을 살 수 밖에 없겠지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가만 생각해보면 기쁨이란 얼마 지나지 않아도 내성이 생겨서 금방 둔감해 지지만, 슬픈이란 그보다 몇 배나 여운이 길게 남는 법이다.

오늘 아침에 고등학교 3 학년 여학생이 상해 진단서를 끊으러 왔다.

어제밤에 성폭행을 당하고, 오늘 아침에 산부인과에 들러서 체액을 채취한 다음, 우리병원으로 몸의 외상에 대한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이다. 굳이 여기에다 그 여학생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를 옮겨적고 싶지는 않다.

내가 레지던트 일년차 시절이었으니, 이제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일이다, 나는 그당시에도 지금처럼 그만두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의업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전공과목을 다른과로 바꾸는 것에 대해 고민했었다), 더우기 이미 나는 그 전년도에도 다른 전공을 선택해서 트레이닝을 받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외과로 전공을 바꾼 전력이 있어서, 만약 또 그랬다가는 사회 부적격자로 낙인이 찍힐까봐 꾹 참고 견디고 있을 때였다.

그만큼 나는 의사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사실 이 직업이 내게 가져다준 고(苦)는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나는 26살에 의대를 졸업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해도 가운을 벗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날이 없었고, 실제 삼년전에는 그것을 실행에 옮겨서 가운을 벗고 육개월 동안 환자를 보는 않은적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지금의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여간 그렇게 고민이 많았던 젊은시절에, 나보다도 더 고민이 많은 환자를 만났다.

그녀는 그때 나이가 20 살 이었다, 그 힘들던 외과 레지던트시절 삼일동안이나 수술실에서 못 나오다가, 삼일만에 겨우 수술실을 나와서 짜장면 한그릇 먹고 막 눈을 붙이려는 순간에, 응급실에서 페이져가 울렸다.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몸은 천근만근인데, 전화를 걸어보니 염산을 마신 환자가 응급실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속으로 "죽으려면 그냥 아무도 안보는데가서 조용히 목을 매지. 염산을 마셔서 나까지 죽이려 드느냐"는 원망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응급실에 내려가보니 상황이 기가 막혔다.

우선 환자 나이가 겨우 20살 이었고. 더 기가 막힌일은 그녀가 임신중이라는 사실 이었다. 그녀는 6개월전에 성폭행을 당했었고. 그후 임신을 해서 혼자서 고민을 하다가, 자살을 하려고 염산을 마신 것 이었다.

사람이 염산을 마시면 그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하다, 먼저 구강 조직이 타버리고, 두번째로는 식도가 녹아 버리는데, 이때의 식도 손상은 무서운 합병증을 초래한다, 그나마 소위 양잿물과 같은 알카리에 입은 손상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이제 일단 염산을 마신 이상 이제는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식도가 다 늘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평생 음식물을 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눈이 부실만큼 예뻤다, 만 20세의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한 사회 초년병의 그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누군가가 끔찍하게 망쳐 놓은 것이다, 일단 응급조치를 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집중 치료를 받은 후, 그나마 생명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망가져 버린 식도는 이제 어떤 음식물도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2주간은 혈관 주사를 통해서 영양을 공급했지만, 사람이 그렇게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그녀는 입원한지 이주째 되는 날, 수술실로 옮겨졌고 우리는 그 희고 고운 배를 명치끝에서부터 10센티정도를 절개해서 소장에 구멍을 뚫고 소장내로 호스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호스의 반대편은 절개한 상처를 통해 밖으로 연결했다, 이제 그녀는 배를 통해 소장으로 연결된 호스로 미음을 투여받으면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나서 상처가 악화되었다, 소장으로 들어가있는 관을 타고 소화액이 바깥으로 흘러 나온 것이다, 강렬한 산도를 가진 소화액은 상처주변의 피부를 녹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의 배에 길게 남겨진 칼자국 위에는 소화액이 입힌 화상 같은 커다란 흉터까지 덧붙여졌다.

그녀의 치료는 일년차인 내 담당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녀의 아픈 사정에 깊은 동정심을 가졌었지만, 그 속에는 아마도 "곱고 아름다운 여자아이의 갈라진 운명에" 대한 어떤 특별한 안타까움이 더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치료했고, 아울러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내내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치료를 하기위해 상의를 벗겨도,,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도, 심지어 못먹어서 말라비틀어진 가느다란 팔에 수액공급을 공급하기 위해 컷 다운(피부를 갈라서 혈관을 꺼집어내는 일)을 했을 때에도 그녀는 그야말로 얼음장처럼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심지어, 수술후 삼 주째 되는날 임신중인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산부인과 분만실로 옮기는 중간에도,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은색 마이마이에 연결된 헤드폰을 귀에 꽂은 채 내내 음악만 듣고 있었다. 결국 정신과에 컨설트를 했고, 나도 주치의로서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그녀는 말을 잃어 버린채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그렇게 두달후 상처가 좋아진 다음 그녀는 배에 호스를 꽂은 채 퇴원했다 나는 결국 그동안 그녀와 친해지는데 실패를 한 것이다. 그녀가 퇴원한 이후에도 나는 한참동안 그녀를 떠 올렸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첫 인상과, 나중에 음식을 먹지 못해 창백하게 메말라버린 나중의 모습.그리고 상처받은 사슴처럼 세상으로 향하는 창을 닫아버린 그 안타까운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져서, 내게 상당히 오랫동안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재입원을 했다, 퇴원후 외래에서 진료를 받다가 이제 배안의 호스를 제거하고 식도를 새로 만들어주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 것이다. 이제 그녀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이 된 것이다. 사람은 호스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사는데는 한계가 있다, 식물인간처럼 에너지 소모가 전혀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사는데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경우 도리없이 식도를 재건해야 하는데, 그녀처럼 식도가 협착이 되어버린 환자는 협착된 식도 대신에, 목에서 위장까지 연결되는 다른 통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요즘은 좀 다르지만, 그때는 일단 배를 열어서 대장을 일부 짤라낸 다음. 목을 절개해서 식도 입구에 한쪽 끝을 연결하고 다시 다른 쪽 끝은 위나 소장에 연결해 주는 수술을 했다,

그렇게하면 연결된 대장이 식도를 대신해서 음식물을 위까지 운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술은 대단히 위험한 것 이었다. 당시 내 경험으로는 5명을 수술해서 한명이 살았었고, 교과서적으로도 생존률이 대단히 낮은 수술이었다, 일단 식도와 대장이 연결되면 , 그 두장기의 성질의 차이 때문에 연결부위가 녹아 버리기가 쉬운데, 이 연결부위가 녹으면 가슴속으로 염증이 진행되고,나중에는 가슴에 고름이 차서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한다,

대개 이 경우 환자는 가슴으로, 배로 고름이 흘러 내리고, 그냄새 때문에 사방 20미터에는 사람이 접근이 곤란 할 정도로 몸이 썩어 들어가면서 죽게된다. 이제 그녀가 그 운명의 시험대에 선 것이다, 불과 몇 달만에 그녀는 거의 미이라가 되어 있었다.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산다는 그녀가 그동안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녀는 그 가냘픈 몸으로 20% 의 확률앞에 혼자 선 것이다. 나는 수술전에 보호자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녀에게도 수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다만 위험도는 적당히 낮춰서 설명하고 보호자와 본인의 서약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타인에게, 특히 남자에게는 차갑고 냉정했다,

수술이 시작되었다. 무려 12시간 반에 걸친 대수술 이었다, 먼저 배를 개복해서, 대장을 적당한 길이로 짤라내고, 짤려져 나간 부분들은 원래대로 다시 봉합했다, 그리고 30센티 정도 길이로 짤라놓은 대장을 목을 절개한 다음 식도에 연결했다, 그리고는 다시 가슴옆을 길게 절개해서 폐를 옆으로 밀어 젖히고, 심장 뒤로 공간을 만든 다음 그쪽으로 한쪽 끝을 내려서, 소장과 연결했다.

주임교수께서 수술을 하는데, 수술실에는 수술시간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주임교수님의 손이 심장뒤로 들어가서 박리를 시작 할때는 심장이 눌리면서 맥박수가 120회를 넘어서고, 혈압이 급상승을 하기도 했고, 아래쪽에서 대장을 짜를때는 속의 내용물이 배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황급히 거즈로 장 주변을 수십겹의 거즈로 둘러싸기도 했다.

수술용 장갑을 낀 내손도 그녀의 배속을 헤집고 있었다. 그녀의 소장과 대장은 배속에서 꺼집어내져서 조교수의 손끝에서 봉합되고 있었고, 나는 일년차라 위쪽 식도 연결팀으로 가지 못하고, 아래쪽에서 대장을 자르고 이어주는 일을 보조했다, 그때 수술용 장갑의 얇은 두께를 넘어 그녀의 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은 내내 나를 묘한 슬픔에 빠지게 했었다.

그리고 무려 12시간 만에 수술이 끝났다.. 수술후에도 나는 1년차로서 중환자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그녀의 상태를 체크하고, 한시간마다 혈액 검사를 하면서 인공호흡기의 계수를 조정했다, 산소와 이산화탄소 농도가 밸런스가 맞지 않을 때 빨리 교정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 임무였었다, 수술후 의식은 몇 시간만에 돌아왔지만, 상태가 안정 될 때까지 숨은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어야 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 인공 호흡기가 밀어넣는 숨을 그대로 받아 마시고, 기계가 마치 빨대로 빨아 들이듯이 내 가슴에서 공기를 빼내 갈때 내쉬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녀를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필담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 했는데. 그녀가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자기의 마이마이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녀의 마이마이에 담긴 테입이 김광석의 "다시부르기" 음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몇달 째 반복해서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증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가 달린 채로, 그녀의 귀에는 김광석의 노래가 담긴 마이마이 해드폰이 꽃혀 있었다.

드디어 수술 후 7일째 되는 날이 왔다, 이제 선고가 내려지는 날인 것이다. 수술후 7일 째는, 방사선실에서 목을 통해 조영제를 흘린 후 가슴 사진을 찍는 날이다, 만약 대장과 식도를 이은자리가 녹아버렸다면 사진에서 조영제는 가슴으로 흩어져 보일 것이고, 수술부위가 잘 아물었다면 조영제는 목에서 소장까지 곱게 잘 흘러 내릴 것이다, 방사선실에서 주사기로 조영제를 투여하고 "슛"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이었다,,

조영제는 새지않고 곱게 흘러내려서 소장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기쁨이 박수를 쳤고, 그녀는 드디어 다음날부터 물을 먹기 시작했다, 무려 8개월만에 처음으로 목으로 무엇인가가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컵에 담긴 물을 빨대로 빨아 마시면서,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누구도 감히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서슬이 시퍼렇게 울었다. 나는 그렇게 곱게 생긴 사람이 그렇게 절절하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곡을 하듯 그렇게 울었고, 오랜 인공 호흡기 때문에 쉬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메아리처럼 그렇게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그야말로 둑이 무너진 것 처럼 눈으로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입으로는 목마른 아이처럼 한 컵의 물을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그녀는 물을 계속 요구했고,나는 간호사에게 내 허락없이 한방울의 물도 더 주지 말것을 지시했다. 물을 더 마신다고 안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물을 더 주면, 계속 그렇게 울음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수술 후 12일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고, 그로부터 이주후부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을 먹기 시작한 날, 그렇게 펑펑 울고 난 다음날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날부터 그간 먹지 못한 것, 말하지 못한 것이 봇물이 터져나온 듯,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가장 가까운 이야기 상대가 되었다. 결국 병동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내가 그녀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 그녀가 병실에서 내내 들었던 음악이 바로 여기에 링크한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라는 곡인데, 나는 왜 그녀가 왜 내내 이곡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는지를 짐작 할 것 같았지만 더이상 묻지 않았다. 아마 그녀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누군가가 어느날 갑자기 자기를 벼랑에서 밀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그후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으로 밖에서 한두번 밖에서 저녘을 같이 먹기도하고. 둘이서 덕수궁을 산책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가끔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그녀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서서히 절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내게도 이제 그녀는 더이상 손을 내밀지 않으면 금방 죽을 것 같은 갸날픈 소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퇴근하자마자 그녀가 내게 보냈던 편지들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한번씩 내게 편지를 보냈고, 나도 답장을 했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대책없이 상황에 빠져들기도하고, 또 어떨때는 영 새삼스럽다는 듯이 갑자기 생경하고 어색한 몸짓으로 손사래를 치기도 하는것이다. 나는 오늘 또 누군가의 우연찮은 불행을 매개로 그녀를 기억해 냈지만, 그녀는 아마 신문을 볼 때마다, 혹은 잡지를 읽을 때마다, 어떤 단어 하나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두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그 끔찍한 투병 생활을 떠올리면서, 마지막으로 나를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내게 대한 기억 역시 반드시 잊어버려야만 하는 커다란 상처중의 일부였던 셈이다,

2004/12/02 시골의사

쿠키뉴스 김상기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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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4-12-1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눈시울을 붉히면서 읽었습니다. 너무나 절절한 사연, 너무도 가슴 아픈 사연을 너무도 조마조마한 사연이기에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 소녀 이제는 모든것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엔리꼬 2004-12-16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저도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결과가 좋았네요... 지금쯤은 그때 일을 후회하고 있을까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동경에 출장다녀온 직장 동료가 아침부터 나한테 따지듯이 묻는다.

"아니, 남자들은 원래 다 그래요?"
"네?"
"이제 돌을 갓 지난 아기도 있고 결혼한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러고 싶어요?"

뭔 일이더냐 하고 긴장해 있는데, 찬찬히 설명한다.

직장에서 일본으로 출장 겸 여행을 몇명이서 갔는데, 그 중 남자 하나가 기어코 스트립쇼를 보겠다고 가이드를 졸라서 결국은 스트립쇼를 보고 왔다는 것이다.

"저는 이분법적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혈액형으로 사람 나누는 것도 상당히 싫어하잖아요..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는 구분은 별로 안좋은 것 같아요.. 남자도 그런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나같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라고 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생각할수록 기가 차다.

개인적으로 스트립쇼를 가겠다는데 별로 말릴 생각은 없다. 다양성을 추구하고 존중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성적 욕구를 풀겠다는데 말린다고 될 일인가?
그런데 내가 열받은 것은 이러한 상황이다.

말은 직장이라고 했지만 내 직장은 엄연히 국가기관에 속한다. 말이 출장이지, 4박 5일에 공식 방문 일정은 하루뿐이고 나머지는 여행하는 것이다. 근속년수 많은 사람들 위주로 해마다 일부를 해외여행시켜주는 것이다. 결국은 나랏 돈으로 출장보내주고 여행까지 시켜주는 것인데, 이 사람은 필경 나랏돈으로 스트립쇼까지 봤을 것이다. 게다가 같이 간 정부부처 사람까지 함께....

스트립쇼를 본다면 몰래 몰래 혼자서 볼 수는 없나? 그걸 같이 간 3명의 유부녀 여직원들도 자세히 알 정도로 떠들고 다녀야 했나? 남자들 컴퓨터에 이상한 사진 띄워놓고 여직원들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들 있다던데,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이 일도 그런 것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닐지... 왠지 자기가 스트립쇼를 보러 간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은 아닌지... 그 속마음이야 모르지만.

난 이 일이 있기 전부터 그 사람을 싫어했다. 남자직원이 소수인 우리 직장에서, 특히나 적은 우리 부서에서 몇 안되는 남자들 중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절반이다.

여자들이 같은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의 카테고리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안다만,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가장 싫은 범주의 남자들은 바로 마초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사람도 당당히 이 그룹에 속한다. 자세한 것은 언급하기조차 싫다.

가장 열받는 일은 이 남자가 자신의 옛 추억을 이야기한 것이다.

설악산으로 워크샵을 가서 늦게까지 방에서 기타를 치고 논 적이 있었는데, 그 기타로 옛 민중가요들을 연주하고 크게 불러제낀다. 그러면서 옆 동료랑 하는 말이, 우리 기관에서 민중가요 동호회나 하나 만들까? 이런다. 그러더니 자기가 예전 90년도 무슨 가두투쟁때 자기 학교 투쟁의 우두머리였느니 어쨌느니 떠들어댄다.

그때까지 그 사람을 잘 몰랐었지만, 그 이후로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신뢰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후 그 사람의 일상을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예전에 학생운동했다고 그렇게 침이 마르게 자랑을 하는 사람이, 현재는 이렇게 생활을 한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어떤지 모르지만, 사상적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아직 대학생때의 열정을 가지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자랑스럽게 후일담을 떠들어 제끼는 그와 룸싸롱 아가씨를 찬양하는 발언을 마구 하는 그 사람이 동일인물이라?

아픈 과거를 팔아먹지 마라! 당신에게는 이제 추억거리가 되고 자랑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당신의 과거에 대한 평가는 당신의 현재의 평가와 그리 다르게 가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다오.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는 과거 순수했던 학생들의 행적을 욕먹이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너희 같이 과거만 알고 현재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의 일부 386들이 이렇게 욕을 먹지 않느냐? 제발 그 더러운 입으로 과거를 말하지 말아다오..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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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한 술자리에서 보란 듯이 민중가요 불러제끼는 인간 중에 진짜로 데모질해본 사람 많지 않더이다. 울 회사에도 그런 사람 하나 있는데, 하도 목에 힘주길래 슬쩍 알아봤더니 2학년 1학기까지 노래패하다가 관둔 한량이더군요.

(그런데요, 전 서림님이 남자분이라는 걸 늘 깜빡하고 깜짝 놀라곤 한답니다. ㅋㅋㅋ)

sooninara 2004-12-2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증나는 스타일이군요..그냥 냅두세요. 그런사람은 아무리해도 철이 안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