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시간강사다!

어느 님의 페이퍼에 고무되어 뒤늦게 밝히는 사실 한가지!


몇 편의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사실 두 가지의 타이틀을 더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박사과정생(정확히 말하면 수료)이며, 또 시간강사다.


온갖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는 알라딘에서 지금까지 시간강사 노릇을 한다는 것을 밝히지 않은 것은, 대학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그릇이 안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글들이나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대학강사? 별 것 아니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대학원생들 욕먹이는 꼴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다.


직장과 강의를 병행하는 얼치기 강사이므로, 내 입으로 일반적인 시간강사의 고충을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시간강사료가 적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본봉에 더해 받는 아르바이트비 수준으로 인식될 뿐이며, 직업으로 인한 지독한 생활고는 일단 없다. 


그렇지만, 박사학위 취득자 중심의 연구기관에서 안정적이지 못한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나이기에 앞으로 내가 종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간강사 세계의 문제가 남의 일로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우직하게 시간강사로 지내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몇 자 적을 자격은 되지 않을까.


나는 굳이 따지자면 인문사회계열의 학과의 시간강사다. 이 말의 의미는 시간강사, 교수, 연구기관의 연구원, 시민단체 소속원으로 취직하는 것 이외에는 내가 공부한 내용을 쓸 곳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분야에서 아무리 뛰어난 연구성과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삼성과 같은 일류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주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전공은 제대로 공부한다면 기업에서 별 필요없다 생각할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반하는 학문이다. 모르지, 내가 배운 것을 교묘히 악용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에 우리 전공 대학원 과정으로 오는 사람들은 좋은 기업에 취직해서 돈 잘 벌기를 바라고 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돈도 안되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뭘 믿고 학문하기를 결심하는 것일까? 요즘처럼 외국 박사도 지방대 교수임용이 힘든 때, 대학원에서 열심히만 공부하면 교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진학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볼 때는 (나를 포함해서) 현실감각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경우, 졸업 후 4년 동안 멀쩡히 다니던 회사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무작정 진학했다. 물론 부양가족 없고 패기가 넘치던 20대 후반에 저지른 일이라, 지금 같았으면 과연 그런 무모한 도전을 했을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다. 아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도 보험설계사에게 혼났지만...)


계획적인 사람이면, 그리고 아주 뛰어난 사람이면 그랬겠지. “나의 공부목표를 정하고, 몇 년 후엔 학위를 받고, 또 몇 년 안으로 어느 대학에서 지원받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리라.” 그러나, 나는 뛰어나지도 못했고, 계획적이지도 않았다. 그때는 이미 현재만 생각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외국계 기업은 베트남전에서 사용된 고엽제를 대량 생산했던 기업과 합병하려는 협의를 벌이고 있었고, 갖은 핑계를 대며 노조에게 조금이라도 급여를 덜 주기 위한 협상을 벌이는 사측의 입장에서 여러 자료를 모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기업의 생리는 나와 전혀 맞지 않았다. 더 이상 이것 저것 선택할 것도 없이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때 선택한 것이 공부였다.


내가 다니는 학과는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소위 기업진출에도 유리한 세부전공도 있고, 많은 이들이 이제는 “지는” 학문이라며 “뜨는” 학문을 하라고 권유하는 우리 전공도 있다. 그럼에도 이 전공을 택한 데에는 어줍잖기는 하지만 나름의 열정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학생들이 대학원 과정으로 입학할 때마다 교수님께서는 농반 진반으로 그러신다. “아니, 업계도 좁고 경쟁자도 많은데 왜 공부하려고?” 우리 분야를 뽑는 학교는 전국적으로 평균 1년에 한 곳 미만. 이제 직장인들이 입학하는 경우가 많아지긴 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학원에 입학하는 학부생들을 보면 내가 생각해도 답답해진다. 그러나 교수님의 그런 말씀 뒤에는 가난한 학문을 선택한 데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배여 있다. 어느 수업 날, 우리가 해야 할 연구는 이렇게 쌓여 있고,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연구자들이 점점 많아져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던 적이 있으셨다. 밥벌이로서의 공부도 있지만, 현실에 참여하기 위한 공부도 있다.


2.

주위에 교수가 되길 간절히도 원했던 선배가 있었다. 나름대로 학생운동도 하던(물론 엄청 욕먹었지만) 그 선배가 우리가 보기에 엉뚱한(잘 나가는) 전공을 택한 이유는 ‘이름이 아닌 실력으로 SKY대학을 이길 수 있는 전공’이기 때문이었고, 이를 위해 그 분야에서 잘나간다는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꿈에도 원하던 교수가 되었다. 당시 조교였던 내가 그 소식을 전해주자 그는 감격했다.


거기서 끝이었다. 그는 인생의 목표를 이뤘다. 초짜 교수가 대학원 3시간 수업을 하기 싫어 2시간으로, 그것도 격주로 단축하려다 학생들의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고(결국은 격주수업 쟁취했다), 학부나 대학원이나 똑같은 강의 내용으로 하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다. 요즘 젊은 나이에 운 좋게 학과장을 맡게 되자, 굽신거렸던 허리는 어느새 펴지고 목에 힘이 너무도 많이 들어갔다. 전략적으로 선택한 의미 없는 전공을 정년퇴임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교수로서의 온갖 특혜를 즐기는 일이다. 이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교수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반면, ‘선비’라고 불리는 선배가 있다. 그 분은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공부에 너무나 빠져서 박사학위도 규정이 허용하는 맨 마지막 학기에서 따고, 10년 전에 시작한 시간강사 생활을 지금껏 계속한다. 집안이 좋지도, 계산적이지도 못해 약사나 교사 마누라도 얻지 못하고, 여상 출신이며 지금은 실업자가 된 사람과 아이 둘과 어렵게 살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후줄근하게 입고 여기 저기 강의를 다니시지만, 그리고 몇 번 교수 채용에 지원도 하시고 떨어지셨지만(경력 관리를 너무 안하셨다),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


경제사정은 어렵지만, 밤에 네 식구 잠자려고 이불을 펴놓고 누워 1시간동안 잠도 안자고 이런 저런 이야기 웃음꽃을 피우며 산단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과연 그가 자신의 처지를 그리고 특히 공부를 업으로 택했다는 것을 후회했을까? 그는 생활이 곧 공부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생활에서 실천하고, 학생들에게 베풀고, 가족에게 행한다. 인생에서 공부가 없었더라면 그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정말로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특히 돈 안되는 학문)은 교수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좋아하는 학문을 하다 보니 이렇게 흘러왔고, 그래도 가장 좋은 환경에서 부양가족 먹여살리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길은 교수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지 않을까?


자신의 전공을 그대로 살리면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가장 좋은 길은 교수와 같은 길이겠지만, 이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맘먹은 대로 인생의 미래가 움직일 만큼 똑똑한 사람이거나 교수란 직업의 향기에 취해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너 꿈이 뭐냐? “응, 나 대학교수 되면 소원이 없겠다.”  “나는 사회학 한번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친다면 영광이고...”

너 왜 의대 가냐? “당연히 의사 되려고 가는거지.. 돈 잘 벌잖아.” “암을 정복하고 싶어.”


학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나의 지도교수님. 처음 우리 학교 지원할 때 강의를 들었던 재학생들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지원하셨단다. 그러면서도 걱정하시며 하셨던 말씀. “내가 과연 교수가 될 수 있을까?”


힘든 여건 속에서도 어려운 길을 가시는 시간강사 여러분들의 명예에 최소한 먹칠만은 하지 말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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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5-05-13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정말이지 '현실과 공부'가 '현실과 이상'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이 가끔 심난할 때가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파란여우 2005-05-13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밍아웃인가요?...솔직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글이었습니다.

로드무비 2005-05-1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셨군요.
네 가족이 밤에 이불 펴고 한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는
그 선배님 같은 분이 교수가 되어야 할 텐데요.
그분의 앞날에 영광 있기를......
(ㅎㅎ 키노님도요.)
그런데 어느 님이 누굽니까?
좀 읽어보게요.

조선인 2005-05-13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BRINY 2005-05-1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반에도 공부로 먹고 살면 좋겠다는 아이가 있는데...현실은 너무 각박하죠.

oldhand 2005-05-1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이 갈수록 천대받는 흉폭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순수한 학문적 열정으로 그 길을 가는 분들의 앞길에 좋은 일들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문학은 정말 이대로 스러져 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는 안되는데....

날개 2005-05-13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엔리꼬 2005-05-1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빈현님... 그 새벽에 어찌 깨어 있으셨습니까? 감사합니다.
로렌초님... 하루를 일찍 시작하시는 모양이네요.... 음.. 말은 어렵지만.. 아무튼 심난합니다.
파란여우님... 커밍 아웃이라기보다 그냥 뭐 저기... 날카롭지 않다는 말 좋은 뜻이죠?
로드무비님... 어느 님이란 마태우스님을 말합니다. 1주일 전쯤인가 시간강사 관련된 내용을 쓰셨죠. 결론은 "시간강사들이여, 왜 들고 일어나지 않는가?"
조선인님... 저도 보답을 해야 하는데요.. 호호.. 요즘 바쁘다보니 서재질에 소홀했네요...
BRINY님.. 와.. 중학생인가요? 고등학생인가요? 아무튼 그녀석 기특하네요... 제대로 공부하면 먹고 살 수 있을겁니다. 얼마나 잘 먹냐의 문제일 수도 있고요....
oldhand님... 오래간만이예요... 그러게요.. 인문학은 부활해야 합니다. 사실 전 인문학은 아니예요... 사회쪽에 가깝나?
날개님... 잘 읽으신 소감을. .. 흐흐흐.. 추천 감사드립니다. 너무 많은 추천(제 서재사상 최고가 아닐까)을 받아 몸둘바를 모르겠사옵니다.

Phantomlady 2005-05-1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한 가지 타이틀을 더 붙이면 두 아이의 아빠까지 되니 정말 바쁘게 열심히 사시는 거 같아요.. 저도 추천 누르고 갑니다.. ^^b

엔리꼬 2005-05-1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우드롭님... 과찬의 말씀... 아, 좋은 아빠 되기는 참 힘든 것 같습니다...

마태우스 2005-05-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가슴에 팍팍 와닿네요...제가 글에 등장해서 더더욱 그랬는지 모릅겠군요.......근데 이거 제 홈피에 퍼가도 될까요?

엔리꼬 2005-05-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퍼가면 안될 리가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영광일 뿐이죠..

마태우스 2005-05-1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서림님.

sweetmagic 2005-05-1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효.... 구절 구절 와닿네요,
추천입니다

엔리꼬 2005-05-1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꼭 퍼가셔야 해요... 히히
매직님... 님도 강의 하시죠? 그렇다면 구구절절히 와닿으시겠네요... 가끔 서재에서 쓰신 대학원생활 잘 읽어 봤다는거 신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