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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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죽음이다. 거침없는 표현과 노골적인 문장으로 시종일관 죽음을 노래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집에서 몸으로 살아내고 버틴 치열한 삶을만났다. ‘그만 쓰자. 끝‘은 무엇 하나 쉽지 않았던, 전 생애를 뛰어넘는 의지가 엿보인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꿰뚫어 보는 시인의 시선은 실은 따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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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애도와 상실이라는 감정 속에서 미셸 자우너는 묻는다.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 음식을 먹이고 한국 문화를 알려주었던 엄마가 없다면나는 한국인일 수 있을까? 그건 정확히 나의 이야기와도 만난다. 내게 주어를 가르쳐준 엄마가 없다면 나의 모어와 문화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엄마가 해주었던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H마트에서 장을 봐 요리를 하며 자기 자신으로 바로 서는 미셸 자우너를 바라본다. 이는 온전히 나의 문화이며 동시에 유산이라고 명명하는 그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
가끔 생각한다. 서투른 한국어를 하거나 한국문화의 가장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때로 가장 한국적이라고. 그 낯설고 새로운 시선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수 있게 된다.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지긋지긋한 구내식당에 가지 않고 몇 주는 버틸 수 있게 해줄 신라면컵이 넉넉히 들어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엄마는 의류 스팀기며 보풀 제거 롤러, 비비 크림, 양말 세트까지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건 좋은 브랜드"라는 설명을 굳이 덧붙여 보낸 티제이맥스에서 세일할 때 구입한 치마도 카우보이 부츠는 부모님이 멕시코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면서사와 음식과 함께 내게 부쳐준 것이었다. 그걸 신어보는데 웬일인지 가죽이 이미 부드럽게 길들여져 있었다. 알고 보니 엄마가 그걸 일주일 동안 집안에서 신고 다녔다는 거다. 엄마는양말을 두 겹 신은 발로 그걸 신고 매일 한시간씩 걸어다니면서 뻣뻣한 신발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만들어놓고 자기 발바닥으로 평평한 밑창까지 모양을 잡아놓았다. 행여 내가 처음그걸 신을 때 불편할까봐 말이다.
나는 기숙사 방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혹시 뭐라도 잘못된 게있는지 죽 훑어보았다. 적절한 복장인지, 실밥이 나와 있지는않은지 샅샅이 점검하면서 엄마의 노련한 시선으로 나를 보려 애썼다. 특히 엄마가 잔소리하던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엄마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컸는지, 엄마없이도 내가 얼마나 잘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 P121

엄마는 엄마대로 우리 상봉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내가 도착하기 이틀 전에 갈비를 재워놓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으로냉장고를 채우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몇 주 전에사놓고서 하루 전에 꺼내놓았다. 좀더 익혀서 내가 도착해서먹을 때 적당히 알싸한 맛이 나도록.
참기름, 물엿, 탄산소다에 재운 부드러운 갈비가 팬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면서 내뿜는 달큼한 냄새가 부엌에 가득했다.
엄마는 신선한 적상추를 깨끗이 씻어 내가 앉아 있는 거실 유리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연이어 다른 반찬들도 가져다 놓았다. 먹기 좋게 반으로 자른 계란장조림, 파와 참기름으로 무친아삭한 콩나물, 국물이 넉넉한 된장찌개, 딱 알맞게 익은 총각김치였다. - P122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손바닥을 쫙 펴서 거기에 상추 한 장을 올려놓고 내 식대로 음식을 착착 쌓았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갈비 한 조각, 따끈한 밥 한 숟가락, 쌈장 약간 얇게 저민생마늘 한 조각을 차례차례로, 그런 다음 그걸 얌전하게 오므려 입에 쏙 집어넣고는 눈을 감고 우적우적 씹으면서 맛을 음미했다. 몇 달 동안 집밥에 굶주린 내 혀와 위는 그제야 깊은만족감을 되찾았다. 밥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재회였다. 밥솥에서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은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가 기숙사에서 생존을 위해 먹던 찐득한 즉석밥과는 차원이 달랐다. 엄마는 내 반응을 살피려고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맛있어?" 엄마는 김봉지를 뜯어 내 밥그릇 옆에 놓았다.
"진짜 맛있어!" 나는 입안에 아직 음식이 반쯤 남은 상태로연방 쓰러질 듯한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 P123

나는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엄마를 감싸안았다. 나 또한 몰라볼 정도인 거울 속 모습에,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 거대한 악마의 물리적 현현, 나도 엄마와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몸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단단해지며, 감정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지금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울면 엄마는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단호한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만이아니라, 나 스스로도 진심으로 그걸 믿게 하려고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엄마. 금방 다시 자랄 거야." - P158

나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어서, 갑자기 얼굴이 벌렇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꾹꾹 눌러 간신히 참았다. 한때 어떻게든 미국 교외의 또래 사이에 섞이려 안간힘을 쓰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내 소속을 증명해야 할 무언가로 느끼면서 성인이 되었다. 내가 어느 편에 설지, 누구에게 동조할지 결정하는 일은 번번이 남의 손에 맡겨졌지 내스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두 세계 중 어느 세계에도온전히 속할 수 없었다. 노상 반만 인정받고 반은 이방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나보다 그 세계의 지분이 더 많은 누군가가 온전하고 완전한 누군가가 자기 멋대로 날 쫓아낼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오랫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에 속하려고 별짓을다 했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랐다. 하지만그 순간에 내가 바란 것은 오직 나를 밀어낸 두 사람에게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우리 세상 사람이 아니야.
네가 아무리 애써본들 네 엄마한테 필요한 게 뭔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할 거야. - P188

엄마는 한국 친구 몇 사람과 소규모 미술 수업에등록했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카카오톡으로 작업중인작품 사진을 보냈다. 처음에는 실력이 형편없었다. 줄리아를연필로 그린 그림은 꼭 뚱뚱한 소시지처럼 생겨 특히나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자 실력이 점점 늘었다. 나는 엄마가 드디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낸 데 열광했다. 엄마는 집에 있는 장식품, 장식 술, 찻주전자처럼 일상에서흔히 보는 작은 물건을 그렸다. 그리고 명암을 넣어 계란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것처럼 단순한 것을 공들여 완성하는 데 완전히 열중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연노란색과 라벤더색 꽃에 맑은 청록색 줄기를 물감으로 그려넣은 카드를 내게 보내왔다.
"이건 특별히 너를 위해 만든 카드야. 난생처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카드" 안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 P195

나는 그냥 엄마, 나는 그냥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양 무릎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다가정신없이 딸꾹질했고, 또 그러다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마구 헐떡였다. 얼굴은 극도의 고통으로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나는 내 방 나무 바닥에서 멍하니 몸만 앞뒤로 까딱였고 그 순간 내 존재가 완전히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처음으로 우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더는 자신의 격언을 들먹일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내가 그동안 참고 참아온 눈물을 터뜨려도 될 때가 됐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 P203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다잘될 거라는 말을 전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엄마의 마지막말이 고통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만 아니라면 무슨 말이든 다 좋았다.
엄마! 엄마!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반복해서 외치던 그 말. 목구멍 깊은 데서 터져나오는 원초적인 한국식 흐느낌. 한국 영화와 연속극에서 듣던 바로 그 소리 엄마가 자기 엄마와 동생을 위해 울면서 냈던 그 소리. 고통에 찬 비브라토로 시작해점점 스타카토로 이어지다 나중에는 작은 돌기에 통통 부딪히며 떨어지듯이 끝나는 그 소리.
하지만 엄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무거운 숨만 몰아쉬었고, 들숨소리는 갈수록 뜨문뜨문해졌다. - P259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다른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거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친구가 데리고 나타난 특이한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낳아키우고 나와 18년을 한집에서 살았던 내 반쪽인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기엔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P285

고기 요리와 갑각류 요리 그리고 버터와 치즈와 크림 배합을달리한 갖가지 감자요리를 만든 끝에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진짜로 원한 요리는 바로 이것이란 걸 이 담백한 죽은 난생처음으로 내게 깊은 만족감을 준 요리였다. 망치 여사는 온갖 비법을 한 단계 한 단계 전수해주었다. 마치 어느 때고 의지할수 있는 디지털 후견인처럼 내가몰랐던 지식, 의당 내 것이어야 할 지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고는, 보드라운 죽이 엄마의 갈라진 혀를 살포시 감씨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따뜻한 액체가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뒷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 P320

이모 집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던 날이 내 생일이었다. 이모ㄴ미역국을 끓였다. 미역국은 영양이 풍부해 원기를 북돋아ㄴ주는 해조류 수로, 본래 아기를 낳은 산모에게 권장하는 음식이다. 한국에서는 생일날,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생각하는 의미에서 이 음식을 먹는 전통이 있는데 이제 내겐 이 음식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 신성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감사한마음으로 국물을 들이켜고서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미역을 오물오물 씹었다. 그 맛은 고대의 어떤 바다 신이 바다 거품 속에서 벌거벗은 채로 해초를 포식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마치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그 안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 P335

2주간 발효된 김치를 꺼내 먹으니 마침맞게 좋았다. 그것은끼니때마다 내 식사를 완벽하게 해주는 이상적인 반찬이자나의 역량과 수고를 매일매일 상기시켜주는 음식이었다. 그모든 과정 덕분에 김치의 진가를 더 제대로 알게 됐다. 어렸을땐 식사가 끝나고 접시에 김치 몇 조각이 남아 있으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김치를 만들어봤기에 남은 김치를 꼬박꼬박 옹기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오래된 김치는 찌개나 전이나 볶음밥에 넣어 먹고, 새로 담근 김치는 반찬으로 먹었다. 내가먹을 양보다 더 많이 김치를 만들었을 땐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부엌에 식료품 유리병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병에 종류별로 담긴 김치는 익은 정도가 제각각 달랐다. 조리대 위에선담근 지 4일 된 총각김치가 새콤하게 익어갔고, 냉장고에선갓 담근 깍두기가 수분을 내보내고 있었다. 도마 위에는 커다란 배추 한포기가 반으로 쩍 갈라진 채 소금물에 절여질 채비 - P360

를 하고 있었다. 멸치액젓, 마늘, 생강, 고춧가루의 풍미 속에익어가는 향긋한 채소 향이 그린포인트의 작은 부엌에 물씬풍겼다. 나는 엄마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주야장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한테서 항상 김치 냄새가 날 거야. 그 냄새가 네 땀구멍으로 배어나올 테니까. 엄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했다. "당신이 먹는것이 곧 당신이다." - P362

애써 표정을 꾸미지 않은 솔직한 사진들도 좋다. 엄마가 소파에 앉아서, 은미 이모가 보낸 선물을 열고 있는 내 뒷모습을 예뻐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 의자에 기댄채막 맥주를 한 모금 마시려는 모습. 옛날 집 거실 카펫 위에앉아 무언가를 바라보는 모습. 잠옷이 어깨 한쪽에서 비스듬히 내려와 엄마의 어깨 끝에 꼭 라이터 불로 지진 자국처럼 보이는 예방주사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그 상처 때문에, 엄마는나도 언젠가 그런 상처를 갖게 될까봐 두려움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후회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지키는 일이 엄마의 임무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나의 대리인이자 기록 보관소였다. 엄마는 내 존재와 성장 과정의 증거를 보존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 모습을 순간순간 포착하고, 내 기록과 소유물을 하나하나 다 보관해두면서, 엄마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때, 결실을 맺지 못한 열망, 처음으로 읽은 책. 나의 모든 개성이 생겨난 과정, 온갖 불안과 작은 승리. 엄마는 비할 데 없는 관심으로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하면서 나를 지켜보았다.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 P371

나는 발효가 통제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배추는 놔두면곰팡이가 피고 부패한다. 썩어 못 먹게 된다. 하지만 배추를소금에 절여두면 부패 과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당이 분해되면서 젖산을 만들어내 배추가 썩지 않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탄산가스가 나와 절임이 산성화된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색과 질감이 변하고, 톡 쏘는 새콤새콤한 맛이 나게 된다. 요컨대 발효는 시간속에 존재해 변화한다. 그러니 발효가완전히 통제된 죽음인 건 아니다. 사실상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거니까.
내 기억을 곪아터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트라우마가 내기억에 스며들어 그것을 망쳐버리고 쓸모없게 만들도록 방치할수는 없었다. 그 기억은 어떻게든 내가 잘 돌봐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문화는 내 심장 속에 내 유전자 속에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잘 붙들고 키워 내안에서 죽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교훈을, - P372

이모가 터치스크린 위로 차트를 죽 훑어내리더니 <커피 한잔>을 찾았다. 심벌즈를 천천히 두드리는 소리로 노래가 시작되자 기타가 바통을 이어받아 즉흥연주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멜로디 라인이 나왔을 때 나는 틀림없이 전에 들어본 적 있는 노래임을 확신했다. 어렸을 때 다 같이 간 노래방에서 엄마와 이모가 듀엣으로 불렀던 것 같다. 긴 전주가 끝날 무렵 화면 위로 천천히 가사가 올라왔다. 이모는 하나 더준비돼 있던 무선마이크를 내게 건넸다. 이모는 내 손을 잡아나를 화면 앞으로 끌고 가서 내 얼굴을 보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모의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모음 소리라도 따라 내면서 멜로디를 좇아가려 애썼다. 저 깊은 곳에 존재했을 수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기억을, 혹은 어떻게든 내가 접했을 엄마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이모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게느껴졌다. 지난 한주 동안 내가 이모에게서 찾으려 하던 것이었다. 이모가 나의 엄마도, 내가 이모의 동생도 아니었지만, 그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그다음으로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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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울게 만드는 건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아주 사소한, 남들이 보기에 우스운, 그 사소함에 있다. 우습게도 그 상황에 놓여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알지 못한다. 이 사소함 들 때문에 실껏 울 이유가 충분한 책을 만났다. 엄마를, 내 엄마를, 마음껏 소환해 그동안 묻고 싶었던 물음표들을 느낌표로 바꿀 수 있었다.

   나에겐 H마트가 아니라 남평장이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생선 장수를 하고 막걸리를 팔면서 선지 국수를 말던 엄마, 당신을 그리며 웁니다.

 

우리는 서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에 다쓰여 있다. 저마다 조용히 앉아서 점심을 먹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다 같다. 모두가 고향의 한 조각을 우리 자신의 한 조각을 찾고 있다. 우리가 주문하는 음식과 우리가 구입하는 재료에서 그걸 맛보고 싶어한다. 허기를 채우고 나면 우리는 각자제 기숙사 방으로, 교외의 부엌으로 흩어져서, 열심히 장 본것을 부려놓는다. 그리고 이 긴 여정 없이는 만들지 못했을 음식을 살뜰히 재현한다. 우리가 찾는 것은 트레이더 조 매장에는 없다. H마트는 아무데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여기서는 반드시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웅기중기 모인 향기로운 공간이다.
나는 오늘도 H마트 식당가에서 엄마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첫 장을 찾아 헤맨다. 어느 한국 어머니와 아들이 앉은테이블 옆에 앉아서 두 사람은 무심코 급수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들은 충실하게 계산대 앞으로 가서 수저를 가져다가제 어머니와 제 앞에 깔아놓은 종이 냅킨 위에 올려놓는다. 아들은 볶음밥을, 어머니는 설렁탕이라고 부르는 사골 수프를먹는다. 어머니는 2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아들에게 먹는 법을 가르친다. 꼭 우리 엄마처럼, "양파를 여기에 찍어 먹어봐." - P21

이렇게 여자 어른들과 사촌과 복작복작 보낸 시간은 내게완벽한 꿈과도 같았지만 그 꿈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끝이 났다. 그때 나는 열네 살이었고 학교에 있었기에 엄마 혼자비행기를 타고 병원에 있는 할머니를 보러 갔다. 할머니는 엄마가 도착한 날 돌아가셨다. 마치 세 딸이 다 자기 옆에 모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할머니는 자신의 장례식에 필요한 것들을 비단에 둘둘 싸서 자기 방에 두었다. 화장될 때 입을옷, 납골당에 진열하길 바란 액자 사진 그리고 장례비였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완전히 망연자실한상태였다. 엄마는 또렷한 한국말로 연신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었다. 엄마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소파에 앉은 아빠 무릎에 기댄 채로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꼈고, 그런 엄마를 보면서 아빠도 같이 울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무서웠다. 그래서할머니 방에 있던 엄마와 엄마의 엄마를 지켜보던 때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부모님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 P63

엄마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엄마의 슬픔이 얼마나깊은지 지금처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엄마는 어마어마한 상실의 영역으로 넘어갔지만 나는 아직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나는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서 떨어져 지낸 그모든 세월에 대해, 한국을 떠난 것에 대해 느꼈을지도 모를 죄책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의 내가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하듯 엄마도 그랬을 텐데 그때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대신 우리가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만 생각이 났다.
"네가요만한 꼬마였을 때 얼마나 겁쟁이였는지 아니? 응가를 하고 나선 이 할미가 엉덩이도 못 닦게 했지." 그러고는 요란하게 깔깔 웃으면서 내 엉덩이를 찰싹 한번 치고는 나를 꽉껴안았다. - P64

그 전주에 엄마는 배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뉴욕에 가는 날 병원 예약이 잡혔다고 했다. 그날 오후에 병원 간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엄마에게 문자를 몇 통 보냈지만 평소의 엄마답지 않게 답이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차이나타운행 버스를 탔다. 몇 달 전에, 그러니까 2월에도 엄마가 복통을 호소했는데, 당시에 나는 그리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더랬다. 한국말로 "설사 있어요?"라며 농담까지 했다. 나는 그 말이 자꾸 살사와 비슷하게 들려서,
그리고 질감까지 서로 비슷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는 병원을 잘 가지 않았다. 병은 때가 되면 낫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엄마는 미국인들이 사소한 병에 너무 호들갑을 떨고 약을 남용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믿음을 내게 심어주었다. 그 바람에 나는 피터가 상한 통조림참치를 먹고 식중독에 걸렸을 때 피터의 어머니가 아들을 응급 진료소로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우리집에서는 식중독에 걸리면 토하는 것밖에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건 그냥 연례행사와도 같았다.  - P71

엄마는 내가 딱 이렇게 살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느라 평생토록 안간힘을 써왔다. 그랬던 엄마가 지금은 그냥 미소 띤 일굴로 부엌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이다. 파를 썰고, 믹싱볼에사이다와 간장을 붓고, 손가락으로 콕 찍어 맛을 보면서싱크대에 줄줄이 붙여놓은 바퀴벌레 덫에도 냉장고 손자국에도 별로 신경이 안 쓰이는 듯, 그저 집밥의 맛을 남기는 데만집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는 그동안 내가 원치 않는 무언가로 나를 만들어보려 한 자신의 노력이 결국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더이상노력하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차피 내가 이런식으론 1년도 더 못 버티고 결국 엄마가 옳았다고 생각할 거라 믿고 전략을 더 세련된 걸로 바꿨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아니라면 우리 사이에 벌어진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 때문에그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어쩌면 내가 나만의 길을 개척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았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마침내 내가 어떻게든 잘해낼 거라고 믿게 된 건지도 모른다. - P84

신생아 때부터 나는 무엇 하나 수월한 게 없는 아이였다고한다. 세 살 무렵에는 나미 이모가 나를 ‘유명한 악동‘이라는별명으로 불렀다. 뭐든지 일단 들이받고 보는 게 내 주특기였다. 나무그네든 문틀이든 의자 다리든 독립기념일 행사 때 놓아둔 철제 관람석이든 가리지 않았다. 내 머리 중앙에는 내가우리집 식탁 유리 상판 모서리를 최초로 들이받았을 때 움푹파인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식사 모임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건 볼 것도 없이 나였다.
오랫동안 나는 부모님이 과장을 하거나 그냥 아이 키울 마음의 준비가 제대로 안 된 분들이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친척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내가 진짜로 사람 피를 말리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게됐다. - P88

진공상태처럼 텅 빈 내 안에 음악이 훅 밀고 들어와 공허를채웠다. 음악은 또다른 균열을 만들어 엄마와 나 사이에 이미위태위태하게 벌어져가던 틈을 완전히 헤집어놓았고, 그 틈은곧 거대한 심연이 되어 우리를 통째로 집어삼킬 태세였다.
음악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음악은 나의 실존적공포에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라임와이어"에서 음악을하나씩 내려받았고, 푸 파이터스의 어쿠스틱 버전 ‘에버롱‘이원곡보다 나은지 여부를 두고 AIM 에서 열띤 토론을 하는 데하루를 몽땅 바쳤다. 나는 용돈과 점심값을 꼬불쳐뒀다가 하우스 오브 레코드에서 시디를 사는 데 고스란히 헌납했다. 그안에 든 가사집을 보면서 한 줄 한줄 분석했고, 미 서북부 인디 록 스타의 인터뷰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렸으며, K 레코드나킬 록 스타즈 같은 음반사 명단을 외웠고, 어느 콘서트에 갈지 - P94

당시에는 소수자 정서가 뭔지 몰랐다. 음악계에서 대표성을 둘러싼 토론은 이제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나는 음악을 하는 다른 여자들은 잘 몰랐기에, 실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은 문제로 씨름하는 여자들이 제법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같은 처지의 백인 남자는 어떨지 상상해 유추해볼 능력도없었다. 그 남자가 이를테면 스투지스의 라이브 공연 DVD를보면서, 이미 이기 팝이 있는데 음악계에 또다른 백인 남자가설 자리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캐런 오는 음악에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해주었고,
나 같은 사람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게 만들었다. 나는 새로 발견한 낙관론에 고무되어 엄마한테 기타를 사달라고 집요하게 조르기시작했다.  - P97

배고픈 음악가의 삶이라는 매혹은 이내 그 빛을 잃고 말았다. 나는 니콜과 콜레트 아주머니네에서 며칠 있다가 나보다한살 많은 친구 사의 자취방으로 옮겨가 한동안 거기서 신세를 졌다. 샤논과 나는 플라워 숍이라고 불리는 펑크하우스"
에 들락거렸다. 말이 좋아 펑크하우스지 사실상 그곳은 무단점유 거주지였다. 크러스트 펑크를 하는 사람들이 바닥에서잠을 자고, 지붕에 올라가 길에 유리병을 내던지고, 술에 취해서 벽에 부엌칼을 마구 집어던졌다.
엄마라는 닻에서 풀려난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저항해온 온갖 책임으로부터 훨씬 더 멀리 도망갔다. 아빠의 데스크톱컴퓨터에는 내가 반쯤 쓰다 만 각종 대학 지원서 보충 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나는 무단결석을 점점 더 자주 했다.  - P111

나는 필사적으로 엄마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리고 내게 충분히 그럴 힘이 있다는 걸알았지만, 어쩐지 차마 더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엄마가 내 손목을 누르고 내 위에 올라타도록 내버려두었다.
"너 정말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너한테 안 해준 거 없이다 해 바쳤는데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어!" 엄마는 악을 쓰면서 울었다. 엄마의 눈물과 침이 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엄마에게서 올리브기름 냄새와 시트러스 향이 났다.
거친 카펫에 내 손목을 꾹 누르고 있던 엄마의 손은 크림을 발라 부드럽고 미끌미끌했다. 나는 눌린 부위가 몹시 아려오기시작했다. 아빠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어쩌다 이 아이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찾고있었다.
"나는 너 낳고 낙태까지 했어. 네가 너무 속을 썩여서!"
엄마는 손에 힘을 빼고 벌떡 일어서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면서 문득 수치심이 밀려온 듯 혀를 쯧 하고 찼다. 마치 - P115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이 다 허물어져가는 꼴이라도 목격한사람처럼그랬다. 그렇게 굉장한 비밀을 여태 숨기고 있다가 하필이럴 때 밝히다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낙태 자체에 대해서 내가 뭐라 할 게 못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별의별 악랄한 짓을 다 해서 엄마를 마음 아프게 했듯이 엄마가 그저 나를 마음 아프게 하려고 그 이야기를 꺼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그토록 중대한 사실을 숨겨왔다는것에 충격을 받았다.
엄마가 어떤 문제를 그처럼 오랫동안 숨기고 살 수 있다는게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 했던 비밀은 모두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비밀을 지키는 데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나한테까지도 엄마는아무도 필요치 않았다. 엄마는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치않은지를 보여주어 나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기가 그러듯 항상 나만의 10퍼센트를 따로 남겨두라고 평생을 내게가르쳐온 엄마지만, 그게 나한테까지 따로 남겨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고는 그때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116

나는 엄마가 첫 항암치료를 받은 다음 날 오후에 유진에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 미리 여자화장실에 들러 최대한 단정하고 깔끔하게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거칠거칠한 종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런 뒤에 머리를 빗고 다시 화장을 했다. 아이라이너는 조심조심 최대한 가늘게 눈꼬리를 살짝 빼서 그렸다.
이어서 기내용 가방에서 볼 클리너를 꺼내 청바지에 대고 문지른 다음, 스웨터에 생긴 보풀을 일일이 손으로 뜯어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주름을 마구 문질렀다. 데이트하거나 구직면접을 보러 갈 때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썼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돌아갈 때면 늘 그랬다. 1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가기 전에는 엄마가 보내준 카우보이 부츠를 꼼꼼하게 신경써서 닦았다.
같이 딸려 보내준 구두 왁스를 부드러운 천에 살짝 묻혀서 그걸로 구두 가죽을 살살 문질렀다. 그리고 나무 손잡이가 달린 솔로 빙글빙글 원을 그리듯 표면을 스치면서 광을 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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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산 > 주소

오늘은 오일팔이다.
사 년전 오늘에도 그랬군.
벌써 42 년 이라니... 가슴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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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몇 년 군시렁거리는 구름의 말만 들으며
 갈 길 못 가고 또다시 흐르기만 하였다

 어디로 어디로라고 밤바람은 말하지만
 고통처럼 행복처럼 기어코 올 그 무엇
 그러나 참 더디다

 하여간에 여하간에
 갔다가 왔다. 왔다가 또 가려고 한다

 하여간에 여하간에
 또다시 흐르기로 작정하였다
 또다시 이륙하기 위하여

 떠나자꾸나
 너무 무거운 것들은 모두 버리고
 너무 무거운 것들은 모두 벗어버리고 <표4>




빈 배처럼 텅 비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 P9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피어나는 꽃 피면서 지고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부는 바람 늘 쓸쓸할 것이며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내리는 비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며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 P10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죽었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 P11

당분간

당분간 강물은 여전히 깊이깊이 흐를 것이다
당분간 푸른 들판은 여전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은 각자 각자 잘 살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해도 달도 날마다 뜨고 질 것이다
하늘은 하늘은
이라고 묻는 내 생애도
당분간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 P26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그러나저러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도 언제나 해는 뜨고 언제나 달도 뜬다
저 무슨 바다가 저리 애끓며 뒤척이고 있을까삶이 무의미해지면 죽음이 우리를 이끈다
죽음도 무의미해지면
우리는 虛와 손을 잡아야 한다
- P31

나 쓸쓸히

나 쓸쓸히, 세계를 버렸었으나
나 쓸쓸히, 우주와 새로이 악수했었으나
나 쓸쓸히, 세계와 우주가 잊혀져가는
늦정원 안 다 늙은 사과 한 알 속의,
나 쓸쓸히, 나에게도 아득히 낯선
한 마리의 애벌레

(슬픔의 현이 없으면 기쁨의 음악은 울릴 수가 없다) - P35

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 P50

나는 육십 년간

나는 육십 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사랑 찌개백반인 삶이여 세계

창문을 여니 바람이 세차다 - P82

비가 온다

비가 온다
내가 두고 온 과거에도 비가 내린다
과거를 되뇌이는 도루묵 다시 또다시
완전 추락 엎치락뒤치락

비가 오고 있다
파리에도 런던에도 비가 올낀
어느 허공에선 고요히 바람이 불어가고 있겠지

(세상을 떠나니 허공 한 자락이구나) - P90

오늘 하루 중에

오늘 하루 중에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마루 아래 댓돌 위에
흰 돌 검은 돌

문득 눈 들어 보니
푸른 산 흰 하늘

어디선가 새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오른다
한 千年이 고요히 출렁거린다 - P91

내 詩는 당분간

너의 존재를 들키지 마라
그림자가 달아난다

(내 詩는 당분간 허공을 맴돌 것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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