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몇 년 군시렁거리는 구름의 말만 들으며
갈 길 못 가고 또다시 흐르기만 하였다
어디로 어디로라고 밤바람은 말하지만
고통처럼 행복처럼 기어코 올 그 무엇
그러나 참 더디다
하여간에 여하간에
갔다가 왔다. 왔다가 또 가려고 한다
하여간에 여하간에
또다시 흐르기로 작정하였다
또다시 이륙하기 위하여
떠나자꾸나
너무 무거운 것들은 모두 버리고
너무 무거운 것들은 모두 벗어버리고 <표4>
빈 배처럼 텅 비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 P9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피어나는 꽃 피면서 지고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부는 바람 늘 쓸쓸할 것이며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내리는 비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며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 P10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죽었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 P11
당분간
당분간 강물은 여전히 깊이깊이 흐를 것이다 당분간 푸른 들판은 여전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은 각자 각자 잘 살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해도 달도 날마다 뜨고 질 것이다 하늘은 하늘은 이라고 묻는 내 생애도 당분간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 P26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그러나저러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도 언제나 해는 뜨고 언제나 달도 뜬다 저 무슨 바다가 저리 애끓며 뒤척이고 있을까삶이 무의미해지면 죽음이 우리를 이끈다 죽음도 무의미해지면 우리는 虛와 손을 잡아야 한다 - P31
나 쓸쓸히
나 쓸쓸히, 세계를 버렸었으나 나 쓸쓸히, 우주와 새로이 악수했었으나 나 쓸쓸히, 세계와 우주가 잊혀져가는 늦정원 안 다 늙은 사과 한 알 속의, 나 쓸쓸히, 나에게도 아득히 낯선 한 마리의 애벌레
(슬픔의 현이 없으면 기쁨의 음악은 울릴 수가 없다) - P35
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 P50
나는 육십 년간
나는 육십 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사랑 찌개백반인 삶이여 세계
창문을 여니 바람이 세차다 - P82
비가 온다
비가 온다 내가 두고 온 과거에도 비가 내린다 과거를 되뇌이는 도루묵 다시 또다시 완전 추락 엎치락뒤치락
비가 오고 있다 파리에도 런던에도 비가 올낀 어느 허공에선 고요히 바람이 불어가고 있겠지
(세상을 떠나니 허공 한 자락이구나) - P90
오늘 하루 중에
오늘 하루 중에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마루 아래 댓돌 위에 흰 돌 검은 돌
문득 눈 들어 보니 푸른 산 흰 하늘
어디선가 새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오른다 한 千年이 고요히 출렁거린다 - P91
내 詩는 당분간
너의 존재를 들키지 마라 그림자가 달아난다
(내 詩는 당분간 허공을 맴돌 것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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