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기겁했을 테지만,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고,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은심지어 어머니가 나를 좋아하고 기특해하고 가깝게 느끼는 것같다는 느낌까지 받았지만, 생애의 많은 부분을 나는 우리 사이에 몇 가지 배선이 초기부터 어긋났고 중추적 접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나 유지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닌 채 살아왔다. 어머니와 나의 언니 오빠 사이에는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체질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아버지와 더 비슷했고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와 더 잘 맞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내가 매우 결정적인 측면에서 어머니의 원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이얼마나 확실한지 혹은 안정적인지 결코 확신하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와 어머니의 대화에는 언니와 어머니의 대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껄끄러움이 있었고, 우리 둘 사이에는 서로 진정으로 잘 맞는다고 느끼지 못했던 듯 약간이지만 조심스러워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수년간 나는 어머니와함께 있을 때면 내향적이고 화가 나 있고 어두운, 마치 질풍노도를 겪는 청소년처럼 느껴졌다. - P328
분노는 식별하기가 쉽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이를 악물게되고 피가 뜨거워진다. 화를 내고 침을 뱉고 싶어진다. 나는여러 해 동안 어머니가 나를 화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근원이 뭔지는 몰라도 우리 사이의 거리가 나를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씁쓸한 분노로 가득 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하게 된것, 혹은 다가가게 된 것이 있다. 프로비던스에서 만난 그 8월오후 같은 날들을 돌이켜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들춰본 적도없었던 그것은 그 분노 아래 깊이 흐르고 있던 슬픔이었고, 너무나 격렬해서 평범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도 없는 연결에 대한 갈망이었다. 목소리로 표현했다면 그것은 울부짖음으로, 더없이 길고 더없이 외로운 곡소리로 나왔을 것이다. - P329
유년기의 그 상실들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 허기는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 상실과 허기에는 혼란이 거부가, 혹은 상처가 얼마나 섞여 있었을까? 그리고 그 후 자아의 고갱이는 얼마나 결핍되고, 얼마나 권리를 박탈당하고, 얼마나 슬픔과 자기혐오로 가득한 상태가 되었을까? 본질적으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정도에 관한 답이며, 또한 강박적으로 훔치는 이와 자기를 베는 이와 억지로 토하는 이, 그리고 그보다 덜 극단적인 방식이지만 역시나 자신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이들의 차이 역시 정도의 차이다. - P334
재닛과 캐슬린은 표현 수단은 다르지만 표현하는 감정은 동일하다. 그것은 감정들이 자신을 너무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 너무 배가 고프고 너무 절실히필요하고 자신의 몸에 비해 그 감정이 너무 크다는 느낌, 그러므로 그 느낌들을 방출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애초에 그런느낌을 가진 것에 대해 자신을 벌하려는 강박이다. 이 모든 행동에는 말할 것도 없이 분노가 있다. 당신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너무나많은 필요를 느끼게 했으면서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이었든 필요를 느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 아래에는 가장 강력한 슬픔도 자리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아이의 슬픔, - P335
알리는 것. 물론 이것이 굶기의 목표이며, 너무나 조심스레감춰져 있어서 자기 자신조차 모를 수 있는 숨겨진 의제다. 자해하는 이는 자기 존재의 중심에 있는 고통을 눈에 보이게 만들기 위해 칼로 긋는다. 거식증 환자는 자신의 허기와 취약성을 분명히 보이게 만들기 위해 굶는다. 극단적인 이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고, 이게 내가 느끼는 것이고, 이게 내가 필요한 걸 얻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들은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갈망에, 그러니까 인정받고 알려지고자하는 욕망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서 또한 당신이 어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목소리를 부여한다. 또한 그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뿌리를 내리는 슬픔에도. - P338
다른 사람들이 믿음직하게 그 필요를 충족해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허기는 참을 수 있는 것이 되고 분노와 막막함은 견디기 쉬워질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은 안전하다고, 당신이 알려져 있다고, 혹은 최소한 알려질 수 있다고 느낀다. 반대로 만약 그런초기의 조율과 안심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러한 안전함과 인정의 감각을 내면화하지 못했다면, 허기는 더욱 까다로운 문제가 되고, 분노와 막막함은 표면에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고, 슬픔의 바다는 더 넓고 깊어진다. - P339
무언극이 시작되는 시점은 허기가 우리를 압도할 때, 허기가 언어의 체계화 역량을 초과할 때다. 언어가 제 역할을 하지못할 때 우리는 다시 몸에 의지하게 되고, 우리가 느끼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몸의 행동과 강박과 충동을 허락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여자는 손으로 초코바 하나를 감싸 쥔다. 자기 팔의 여린 피부에서 피를 뽑아낸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상징으로재편성된 사물과 신체 부위와 음식의 세계들이 세계들이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할당된 세계들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속에는 여성의 슬픔의 언어 전체가 감춰져 있다. 이 언어가 평범한 언어를 대신하고, 평범한 언어에대한 절망을 드러낸다. - P339
철학자 헤겔은 욕망을 결여, 부재로 상정했다. 라캉 역시 이관념을 한층 더 전개하여, 욕망을 이전에 유쾌한 것 혹은 만족스러운 것으로 경험했으나 이후 상실하고 만 무엇에 대한 갈망으로 묘사했다. 두 사람 다 불완전함, 빠져 있는 무엇, 초기에 발생하고 이후 결코 회복되지 않은 어떤 분리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이 욕망의 본질적 부분이라 믿었다. 그 ‘무엇‘이 묻혀버린 기억이든, 아니면 한때 경험했으나 이제는 놓쳐버린 사랑이든 인정이든 안전함이든, 아니면 그런 경험에 대한 결코 충족된 적 없는 소망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를 계속 쫓아다니며괴롭히고, 우리 정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고, 영원히 순환하는 허기의 회로를 만든다. - P340
하지만 균형 감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어쩌면 여자들에게는 유난히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페미니스트 저메인 그리어는 1999년에 완전한 여성』을 출간한 뒤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의 프로그램 <더 커넥션>과 한 인터뷰에서자신이 점점 더 자주 목격하게 된 어떤 광경을 묘사했다. 그것은 울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리던 눈물, 화장실에서 나오던 어떤 여자의 울어서 빨갛게 된 눈, 영화관에서 클리넥스 티슈를 한 움큼 쥐고서 털썩 자리에 주저앉던여자 우는 것은 언제나 사적인 일이며, 실컷 우는 것은 남몰래 하는 일이지만, 그리어는 우는 행위의 배후에 있는 슬픔이개인적 현상일 뿐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라고 보았고, 그것은수십 년에 걸친 사회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여전히 여자 - P341
지난 몇 년 동안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느냐고물을 때면 나는 매우 축약적이고 반어적인 답변을 내밀었다. "아, 여자들과 식욕에 관한 책이에요. 알잖아요. 뭐, 불안, 죄책감, 자기혐오, 소외, 슬픔, 그런 얘기요." 이 대답은 효과가 있었다. 적어도 사람들을 질리게 하고, 이어질 질문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것 같았다는 점에서는 (나는 프로젝트 진행 중에 내 작업에 관해 말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지나자 그런 대답을 반복하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 무엇보다저 말이 내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더 어둡고 냉소적으로 들리기 때문이었다. 욕구-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만족시키는 일 -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엄청나게 고군분투하며, - P347
욕구가 고통스러운 감정의 조류를 헤쳐나가야 하는 장거리 수영인 것은 맞지만, 만약 내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다른 조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면, 즉 어느 정도 희망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 주제를 다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내가 욕구라는 주제에 관해 보인 그 모든 어두운아이러니와, 한 여자가 만족을 향해 묵묵히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동안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걸림돌에 관한 나의 그 모든확신에도 불구하고, 내 책상 위에는 작은 희망의 토템들도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종잇조각, 인터뷰 원고, 자료 폴더, 컴퓨터 파일 들이, 고통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쳐 마침내 반대편 해안에 도착한 여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들과 그들이 해안 기슭에지은 새로운 욕망의 제단들이. - P348
또한 힘겹게 이뤄낸 변화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희망에 이르는 과정이 갑작스럽거나 극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며, 자아의 - 새로워지고 향상되고 마침내 충만되는 수리가 우리가원하는 만큼, 혹은 소비주의 문화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암시하는 만큼 깔끔하게 성취되거나 온전하게 실현되는 일은 결코 없다. 희망은 의지와 끈기와 믿음에 관한 것이고, 대개 감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 점진적인 개인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에 관한 것이며, 사람이 일상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고군분투, 그 진부하고 혹독한 영광에 관한 것이다. - P349
흑백논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는 식욕 관련 강박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방법이다. 초점을내면으로 (혹은 당신의 선택에 따라 천국 쪽으로) 돌리고, 자아를고요하게 만들고, 허기에 단순히 반응하기보다 허기의 진짜근원을 파악하는 법을 배울 것. 그과정에서 더 영양가 높은것으로, 그러니까 관계는 아름다움이는 신이든, 당신이 채움을어떻게 정의하든, 무엇이든 당신을 채워주는 것으로 그 공허의 일부를 채우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 P352
우리가 원하는 것, 중요함이라고 표시된 선반에 들어 있는것은 물론 연결이고 사랑이다. 인간 허기의 가장 깊은 근원에이름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억제의 상자들을 조각조각 박살 낼 수 있는도구는, 공허함을 산산조각 내고 그 밑에 묻혀 있는 희망을 드러낼 수 있는 커다란 망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사랑-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안고 안기고자 하는 사랑받아야 하는입장에서 당신이 한 경험이 훼손되었거나 불완전했더라도 사랑을 주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허기에 항상 붙어 있는 상수이며, 거식증 환자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을 잇는 연결고리이고, 음식을, 섹스를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노력 뒤에 자리한 필요와 간절함의 끊임없는 박동이다. 우리는 이 광막한 느낌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묻혀 있던 갈망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일종의 영적 갈망의 한 형태로 볼수도 있고,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결국 이해는 이해에 그칠 뿐이다. - P357
그때의 나는 모든 집착에 따라붙는 전형적인 착각, 즉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체중과 먹는 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는 따라서 해결될 것이며 평화로운 상태를 찾게 될 것이고 엄밀히 말해 내가 음식을 먹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먹어도되는 자유는 느끼게 될 거라는 착각. 그리고 그다음에는... 내게 딱 맞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평화를 찾게 될 거라는 착각. 내가 세련되고 성숙하고 침착하게 보일 수 있다면, 그러면 나는 세련되고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이 될 거라는 착각. 내 인생을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형태와 형식에 끼워 맞출 수 있다면, 그러면 나도 정상적으로 느껴질 것이고 문제들은 해결될 거라는 착각. 이런 착각의 잡탕에다음주까지 더하니 명료한 정신과 변화의 가능성은 모두최소한도로 줄어들었고, 내가 얻은 건 망상의 회전목마, 끝없이 맴도는 서글픈 악순환의 세월이었다. - P361
작은 걸음마들은 아무리 자신 없어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고요점을 벗어난 것처럼 보여도, 변화로는 아니라도 최소한 정보로는 이끌어준다. 걸음마를 내딛는 것은 고통스럽다. 멀쩡한한 끼를 다 먹으면 당신이 얼룩처럼, 암소처럼 무가치하고 역겹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당신에게는 들여다볼 무언가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검토해야 할 감정들이 남겨진다.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러면 집에 혼자 앉아 갈망과 공포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지만, 그래도 당신이 그 불편한 감정을 참아낼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배우게 된다. - P363
내 생각에 열쇠는 통찰보다는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과 더깊은 관계가 있고, 통찰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쓸모가 없다. 내 식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나는 아흔 살이 되어서도 상담치료를 받고 있었을 것이고, 그때까지도 가족과 과거에 관해 한탄조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족시켜야 할 필요와 인정받아야 할 저 필요, 이 작은 상처와 저작은 실망, 누구, 무엇, 어디, 언제, 왜, 왜 나야. 기꺼이 할 마음-기꺼이 실험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끌을 집어 들고 바위와 저항을 쪼아나가는 일에 동참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는 상당히 공허할 수 있으며, 그런 서사에는 행위가 없고 갈등도 별로 없으며극도로 희미하게 남은 플롯의 윤곽만 있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통찰의 맷돌에 넣고 돌릴 곡물이다. - P364
당신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고저 서사의 빈틈을 채우거나 서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된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막막함에 대한 해독제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믿음의 낟알이다. 당신은 아기처럼 작은 한 걸음을 떼고, 또 한 걸음을 옮긴다. 이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저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린다. 그 일을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하면 그러는 사이 어디쯤에선가 자신이 공허함과 절망의 순간들을 지나 살아남을 수 있음을, 고통을 기쁨으로 상쇄할 수 있음을, 공포 대신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음을 이해하기시작한다. 이 믿음을 영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아니든, 갓 생겨나기 시작한 이 믿음을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 호의적인 우주나 어떤 더 높은 힘이나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믿음이란 당신이 힘든 밤들을 견디게 도와주고 좋은 밤들을 음미하게 도와주는 신비로운 감정의 저수지를 의미한다. 이것이 있으면허기가 나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걸, 나에게 필요한 도움과 영양을 실제로 내가 찾아낼 수 있다는 걸, 내가 괜찮으리라는 걸마음속에서부터 믿을 수 있다. - P365
그래서 이대로 충분한가?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날, 더없이 괜찮은 날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축복을 하나하나 꼽아볼 것이고, 힘들게 얻어낸 친밀한 관계들에관해, 두려움을 상대로 한 작은 승리들에 관해, 친구들과 개와숲과 일에 관해 말할 테지만, 그래도 완전한 확신을 갖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충족하는 일,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하는 일이란 가능하지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과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내 개가 보내는 사랑의 시선으로, 친구와 나누는 농담으로, 여기서 느끼는 애정의 불씨, 저기서 느끼는 이해로 그 순간들은 내가 막 노를 젓기 시작할 때 수면을 비추는 아침 햇빛 속에서, 완벽한 한 끼 식사, 완벽한 한 문 - P370
장, 어떤 손길, 어떤 눈빛 속에서 온다.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다.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아주 잠깐의 순간들이. - P371
진통은 다섯 차례 왔고 그때마다 언니는 열심히 힘을 주었으며 산과 의사의 격려가-그거예요, 잘하고 있어요ㅡ쏟아졌고 그러자 경이롭게도 작은 사람이, 추상에서 갑자기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된 특별한 존재가 나타났다. 나는언니의 왼쪽 무릎 옆에 서서 언니가 내 손바닥을 밀며 힘을줄 수 있도록 언니의 왼발을 잡고 있었다. 마지막 진통과 밀어내기를 하는 동안 나는 아래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그 몇 초사이에 작고 둥근 아기 머리통의 곡선이 나타났고, 그런 다음갑자기 어깨가 나타났고, 그런 다음 아주 작은 몸 전체가 아직도 태아 자세로 말린 채 작디작은 주먹을 작디작은 가슴에 꼭 - P375
붙인 채 나타났다. 한 명의 인간이, 겨우 몇 초 더 탯줄로 엄마와 붙어 있다가 이내 탯줄이 잘리며 분리되고 스스로 숨을 쉬게 되자 입을 열어 최초의 숨 가쁜 흐느낌을 뱉어냈다. 나중에 나는 친구들에게 이 경험을 두고 숨 막히게 감격적인 기적과 드라마 <엑스파일>의 한 에피소드를 섞어놓은 것같았다고 묘사했다. 글자 그대로 그렇게 밀어내는 일과 그렇게 피를 보는 일, 그리고 분홍빛이 돌기 전까지는 섬뜩한 회색빛을 띠던 아기의 피부에는 거의 원초적으로 영화적인 뭔가가있었다. 자연 세계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사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일은 대부분 공포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고, 실제 분만이 진행되는 동안 잠시 나는 마치 영화를볼 때처럼 내가 그 장면에 속해 있지 않은 듯한 어떤 분리의감각을 느꼈고, 온몸을 때리는 충격과 함께 일순 도저히 믿을수 없다는 생각도 스쳤다. - P376
그러나 바로 다음 몇 초야말로 내가 정말로 기억하고 싶은순간이다. 탄생이란 정말로 자연의 가장 특별한 위업이기 때문이고, 내가 여성의 몸에 대해 그때만큼 깊은 존경심이나 경외감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몸을 창조하는 몸. 생명을 창조하고, 그런 다음 그 생명을 자신의 생명줄과 수액으로 - P376
된 망으로 품고 보호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이어서 세상으로내보내 인간의 삶 자체를 생성하는 데 필요한 정교한 지식과기가 막힌 능력을 갖추고 있는 여자의 몸. 나의 언니가 대단한집중력과 우아함으로 이 존재를 세상에 내어놓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 그리고 자궁을 벗어난 최초의 순간의 아기 - 작지만완벽한 모양을 갖춘 귀와 손톱과 발가락, 그 완벽하게 복제된존재를 지켜보는 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 새로운 생명의약동하는 힘과 잠재력을 느끼고, 인류 자체의 잠재력을, 세상에 나가 암 치료법을 개발하거나 100미터 달리기 신기록을 세우거나 아니면 한 인간으로서 기쁨과 슬픔과 내밀한 고군분투의 삶을 살아갈 잠재력을 느끼는 일. 우리 각자가 수많은 타인들의 삶에 닿아 그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형성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 그리고 이 기적이 모두 한 여자의 몸 안에서 시작되어 한 여자의 몸에서 솟아나는일이라는, 숨 막히게 감동적인 사실. - P377
여성의 몸은 페미니즘이 가장 덜 건드린 미개척지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후의 미개척지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여자의 욕구, 그리고 자유와 권리 의식과 기쁨을 품고 자기 욕구를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여자의 능력은 진보의 표지인 동시에 진보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얼마나 허기져 있는가? 얼마나채워져 있는가? 얼마나 갈등하고 있는가? 집으로 향하는 동안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의 몸으로 방금 새로운 생명을 낳았고 이제 그 생명을 먹이고 어를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의 쌍둥이 언니에 관해, 모든 여자들과 그들의 몸에 관해, 우리 중얼마나 많은 이들이 몸을 축복이나 선물이 아니라 적이자 수치의 장소로 여기고 있는지에 관해, 우리 중 너무나 많은 이들이 문득 자신의 엉덩이와 허벅지와 가슴을 느끼고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절망과 질색하는 마음에 관해, 그 몸들이 과소평가되고 망각되고 무시되고 가장 잔인한 멸시의 원천이 되고마는 경악스러운 가능성의 강도에 관해.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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