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Caroline Knapp지적이고 유려한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를 쓴 작가.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1981년 브라운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20년 가까이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살면서 몇몇 끔찍한 중독에 빠진 경험이 있는데, 삶의 압박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술로, 그런 자기 자신을 호되게 통제하고 싶을 땐 음식을 거부했다. 이런 자신의 깊은 내면 이야기를 솔직하게, 우아하게, 또렷하게 고백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Drinking》은 알코올 중독의 삶을, 《욕구들Appetites》은다이어트 강박증과 섭식장애에 관한 기록이다. 《개와 나Pack of Two》는 개를 향한 지나친 애착을 다룬다. 자신을 직시하며 그 감정과 생각의 결을 낱낱이 드러내는 글쓰기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2002년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캐럴라인 냅은 이 책 《명랑한 은둔자》에서 혼자 살고 혼자 일했고, 가족과 친구와 개와 소중한 관계를 맺으며 자기 앞의 고독을 외면하지 않았던 삶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있는 그대로받아들이면서 결국 삶의 명랑을 깨달은 저자로부터, 우리는 만난적 없지만 오래 이어온 듯한 우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재능이다.
흔히 말하듯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왔지만, 그럼에도 아주 결정적인 면에서 나는 페미니즘의 배를 완전히 놓쳤고, 내 생각에 페미니즘의 여정에서 진정으로 변화를 일으킨 국민들로 여겨지는 거대한 변화들을 놓쳤다. 이런 생각은 2세대 페미니즘 전성기에대한 낭만적 가정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항상 내가 1978년이아니라 1968년에 대학생이 되었다면 상당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나 자신과 다른 여자들에 대해 더 급진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나의 개인적 의식과 정치적 의식이더욱 정교하게 엮였을 것이라는, 어쩌면 순진할 수도 있는 믿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어쨌든 2세대 페미니즘은 여러 측면에서 욕구에 관한 자유, 취할 자유ㅡ성적 자유, 법적 자유, 경제적 자유, 남자들만큼 저돌적으로 야심을 펼치고 권리를 주장할 자유, 온갖 다양한 형태의 허기를 가질 자유와 그 허기를 충족할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었으니 말이다. - P242
나는 시대정신에 잘 휩쓸리는 부류인데, 아마 그런 특징이 이 낭만적인 생각의 바탕이 된 것 같다. 만약 내가 사랑의 여름에 스물한 살이었다면, 나는 우드스톡에 가고 헤이트애시베리로 이사하고 행진하고 시위하면서 나 자신, 내 몸, 내 욕구에 대해 더건강한 관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나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실재하는 외부의 적들, ‘기득권층‘, 가부장제, 베트남전쟁에 맞 - P242
서 싸우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저 질문들은 페미니즘이 어디까지도달했는지, 여성의 허기와 관련해 페미니즘 운동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유를 향한 투쟁이 우리 세대 여자들에게 욕구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고 바꾸지 못했는지에 관한질문이다. 내가 페미니즘의 전형적인 상속인이라는 것, 2세대페미니즘 행동주의가 수많은 방식의 가능성들에 대한 나의 의식을 형성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모든 종류의 허기들을 충족할 수 있는 지적 수단과 실질적 수단 모두를 제공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페미니즘이 지닌 변화의 잠재력은 어째선지 내게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페미니즘의 집단적이고 급진적힘은 끝내 내게 몸에 밴 감각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프로비던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동안 나는 특히 여성 문제에끌렸다. 차별과 낙태, 여성이 당하는 폭력에 관한 글을 썼다. 여성의 건강, 언론에 나타나는 성차별, 문화적 이미지에 관해 - P243
서도 썼다. 심지어 나는 식사장애가 있는 (다른) 여자들에 관한 글도 썼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에서는 조용히 굶으며 나를 ‘반쯤 죽음으로 몰고 갔다. 바로 이런 것이다. 지적인 신념은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서적 뿌리는 없다는 것. 페미니즘의힘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몸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 - P244
나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핵심을 놓쳤다는 이런 느낌을 주로 다른 이들과의 차이에서 알아차렸다. 친구들 중 나보다10~15세 연상인 여자들, 특히 대학 시절과 초기 성인기를 보스턴이나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 대규모 활동가 공동체가 있는 도시에서 보낸 이들은 거의 몸의 세포까지 페미니즘의 신념들을 흡수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바로 이렇게 극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내적인 변화가 혁명적 변화의정수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내게는 너무나 부럽게 느껴지는 육체적 느낌이 배어 있다. - P244
문화가 우리 삶에 그토록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유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그와 같은 정보 공백 속으로, 섹스가무엇인지 혹은 어떤 것일 수 있는지에 관한 솔직한 논의의 부재가 남겨놓은 구멍 속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새어나온 메시지들이 스며들면서 우리에게 점점 더 명료하게 보이고들리게 되었다. 바로 그때 문화는 어조와 초점을 대대적으로바꿀 태세를 하고 있었고, 유난히 시각적이고 강렬한 종류의소비주의가 부상하고 있었으며, 쏜살같은 시각적 해일이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으니, 우리는 바로 그런 것들을 붙잡고 매달 - P249
린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이해해보겠다고 황급히 광고와 영화와 텔레비전에 나온 이미지들을 흡수했는데, 이 이미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성적 무력함에 대한 시각적 선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성숙한 육체와 초연한 눈빛을 지닌 젊은 여자들, 가장 상품화된 방식과 가장 유체 이탈적인 방식으로, 극도로 성적인 존재로만 그려진 여자들, 우리는 남자아이들에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고, 그러면 남자아이들은 우리의 신체 부위들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미모와 가슴 크기를 은밀히 측정하고, 우리의 순위를 매겼다. - P250
내가 고등학생이 될 즈음 만개한 성혁명이 나를 포함해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제공한 도구 상자는 속이 절반쯤 비어 있었던 것 같다.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그에 부합하는 ‘성적인 존재‘라는 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의식은 별로 없는 상태. 방문은 열렸지만 방안의 조명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 이는 ‘함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식의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던 성혁명과, 운동의 방향이 생식의 자유와 성적 건강이라는 더욱 구체적인 영역으로 기울어 있던 여성운동 사이의 (실제로 상당한) 차이에서 온 부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 P256
우리가 선택되는 대신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음식이나 옷에 대한 욕구를 이야기할 때처럼 우리의 성적욕구들에 대해서도 솔직히 말할 수 있도록 양육되었다면, 신체 부위나 가슴의 모양이나 허벅지 사이즈 같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적인 몸 자체를, 그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만져질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검토하고 이해하도록 격려받았다면 우리의 느낌은 어땠을까? 이런 종류의 사고 틀은 당시 우리 의식 안에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 중 다수에게 30대나 40대 ㅡ 한 여자의 인생에서 행위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오랜 세월의 분투 끝에 마침내 뼛속에 자리잡게 되는 시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계속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 P257
그 시절에 페미니즘 성정치 이론을 내가 접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집단의식 속에서 남자들의 몸이 여자들의 몸을 가려왔던 길고도 깊은 역사가 있었음을, 수십 년 동안 성적 ‘정상 상태‘에 관한 문화적 정의와의학적 정의 모두 전적으로 남성의 성기능, 남성의 욕구, 남성의 체질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음을 판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P258
나의 몸에 대해 처음부터 두려움과 단절감을 느꼈던 나는거식증이 지닌 이런 측면을 매우 환영했고, 거식증이 주는 차가운 금속 같은 무성성의 감각을 필요로 하며 부추겼던 것 같다. 거식증을 앓던 몇 년 동안 나는 달리기를 했다. 3~5킬로미터씩 달리는 일에는 마치 강제 행진처럼 의무적이고 징벌적인 느낌이 있었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운동화 끈을 묶고서동부 프로비던스 거리들을 달리기 시작해 나를 밀고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의지의 시험이었고, 온몸은 긴장한 채 달리기에 저항했으며, 성냥 같은 두 다리는 너무나도 멈추고 싶어했다. 내가 달리던 동네는 사랑스러운 곳이었지만 고요했고 - P267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많았으며 우아한 빅토리아풍 건물들이줄지어 서 있었다-나는 그런 점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풍경에서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두 발과 빼빼 마른 허벅지에 주의를 집중하고 펌프질하듯 다리를 옮기고 옮기고 또옮기며 칼로리만을 생각했다. 1.5킬로미터면 100칼로리를 태웠으니 요거트 반 통 분량이야, 3킬로미터니 200, 점심 식사에맞먹는 칼로리군. 내 몸은 기계였다. 아니 적어도 나는 내 몸이 기계이길 원했다. 꼼꼼하게 검토하고 손볼 수 있으며, 인풋과 아웃풋을 측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 몸이 느끼는 고통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쾌락을 느낄 몸의 능력은 내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리비도는 살과 함께 사라졌고, 관능성은 머나먼 옛 기억이자 다른 사람들이나 경험하는 것이 되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오직 머릿속에서만 살았다. - P268
조정이 아주 천천히 그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했다. 돌이켜볼 때 조정이 그토록 급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 자신의 몸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 관계를 맺은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조정이 나를 바꿨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팔은 강하고 유능한 팔로 발달해갔다. 앞팔은 굳건해지고 근육질이 되어갔고, 위팔은 탄탄해지더니 정교한 근육의 골들이 만들어졌고, 어깨가 둥글고 강해졌다. 조정은 사실 다리의 스포츠라 여겨지지만-노를 젓는 힘은 대부분 허벅지와 엉덩이의 큰 근육들에서 나온다- - P268
소비주의의 요란한 소음이 한창 울리는 가운데, 페미니즘은 메아리 비슷한 무엇, 저 멀리 다른 세대의 시계에서 들리는째깍 소리 같은 것이 되었다. 내가 보스턴으로 이사한 무렵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자체가 혁명의 광채를 잃었고, 그 대신 극단주의, 유머감각 결여, 사납고 드센 남자 증오 등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속성들만을 연상시키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고, 몇몇 영역에서는 아직까지도 계속 그런 시선을 받고 있다. - P280
그 시절 나는 분명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지만 그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다소 반사적인 반응이었고, 이제는중요성이 사라진 것 같다는, 다 지난 옛날 일 같다는 스멀스멀한 느낌이 꽤 뚜렷이 기억난다. 이는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무관심과 환멸에 밀려난 정치적 행동주의 전반에 다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페미니즘 전선에 특히 더 들어맞는 말이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성공 자체도 운동의 절박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우리 세대 여자들은 더이상 전투를 위해 무장하지 않았고, 전방에 나서야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스포츠를 하러 운동장에 들어가거나 대학에 들어가거나 취업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서 힘겹게 밀고 나갈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임대료와 공과금을 지불했고, 필요할 때는 낙태를 했으며, 우리가 궁극의자유라고 느끼던 자유, 다시 말해 역사에 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우리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자유, 그 권리가 얼마나 힘겹게 얻어낸 것이며 얼마나 - P281
최근에야 얻어낸 것인지 잊어도 되는 자유, 1960년대 방식의페미니즘은 다소 따분하고 너무 극적이라는 듯 하품을 하고어깨를 으쓱하며 돌아보는 자유를 누렸다. 의식화 단체? 질경파티? 참나. 나는 이것이 매우 강력한 조합이자 또한 매우 강력한 상실이었다고 생각한다. 외현화하는 소비주의 사고방식-구매하라, 쇼핑하라, 지출하라-의 폭발적 확산과 페미니즘의 가시성과 추동력 감소가 어쩌다 발을 맞추어 진행된 것이다. 그로인해 거짓 약속이 공기를 한층 더 무겁게 했고, 욕망의 정의들이 가장 바로잡기 어려운 방식들로 왜곡되었다. 또한 시각까지 왜곡되었다. 페미니즘에 낀 짙은 망각의 안개에 가려, 권리와 전인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씁쓸한 사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시기를 회상하면굶기가 만들어주던 구조와 통제감을 포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안정감을 뿌리 깊이 뒤흔들었는지 떠오른다. 내 몸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일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졌다. - P282
2세대 페미니즘은 아주 짧은 기간이나마 그 패러다임을 폭파했다. 2세대 페미니즘은 여자들에게 욕망의 온전한 어휘들을, 욕망이라는 주제에 대한 여자들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언어-편협한 견해 대신 폭넓은 견해를 물질적 비전 대신 사회적 비전을, ‘립스틱‘이나 ‘바닥 광택제‘ 대신 ‘권리‘와 ‘권한‘ 같은 단어를 제공했으며, 그 생각을 널리 알릴 확성기를 제공했다. 1980년대에 자취를 감춘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언어가 지닌 힘, 그 언어를 형성한 여성의 분노와 초점이 지닌결합력, 그리고 그 힘이 만들어낸 두터운 공동체 의식과 자매애 말이다. - P284
가짜 신들에게 매달리던 희망을 바른 길로 이끌고, 초점을다시 자신의 마음으로 돌리고, 자신의 개인적 고통을 더 큰 맥락에서 보는 법을 배우고, 몸과 정신을 연결하게 되는 것. 말할 것도 없이 이런 것이 혁명적 작업의 본질이며, 그 일에는언제나 프레임을 다시 짤 수 있는 언어의 잠재력이, 통찰을 촉진하고 사실들을 재배열하며 낡은 패러다임을 무너뜨릴 언어의 능력이 필요하다. - P307
그 일을 위해서는 소비주의에, 여전히 남성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엄격하게 구축된 기업문화와 정치 문화에,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깊이 새겨진가정들에 정면으로 충돌해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 비전은 좀처럼 포착되지 않아 잘 논의되지 않을 수도 있고, <글래머>나 <레드북>에는 존재하지 않는 비전일 수있으며, 외현화하는 문화의 요란한 소음 때문에 분별해내기가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은 분명히 만들어진다. 비록 그 비전이 넓은 사회적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을 수있지만, 무엇이 효과 있고 무엇이 적합하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의하는 일에서, 즉 개인적 정치에서는 분명 변화를 일으킨다. 어느 교회 지하실에 모여 허기와 포만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던 한 무리의 여자들, 굶기를 재정의한 패션모델, 상담 - P310
실에 앉아 감각성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닦아가는 심리 치료사와 내담자, 홀로 강물 위에서 스컬을 하며 강함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한 사람. 공적인 전쟁터들이 오늘날에는 사적인 전쟁터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두 전투에 적용되는 역학은 대체로 동일하다. 무엇이든 당신을 몸과, 자신과, 다른 여자들과 연결하는 것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수 있다. 무엇이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빈 곳을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 P311
그러나 음식이 있기 전에 먼저 눈물이 있다. 체중의 수치가 그힘을 잃으려면 우리는 먼저 그만큼 강력하고 오래된 무언가를느껴야 한다. 나는 거식증을 놓아보내고 애도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뚜렷이 기억한다. 그것은 거식증이 주던 예측 가능하지만헛된 안전함의 상실 때문에 우는 것이며, 이는 사실 자기 자신, 바로 그런 안전함을 필요로 하며 굶는 것 외에는 안전함을확보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끼는 불쌍하고 겁먹은 자신 때문에 우는 것이다. 내게 그 일은 상담치료중에 일어났던 것같은데, 구체적인 기억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 애도에 대한 감각기억은 남아 있다. 굶기를 그만두고 초창기에 - P315
느끼던 광란이 서서히 조용하고 집요한 슬픔으로,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허함으로, 마치 어떤 무거움이 만물의 모서리로 기어들어와 꿈쩍 않고 버티고 있는 것처럼 쇼핑으로도술로도 어떤 집착으로도 몰아낼 수 없는 허함으로 바뀌어가던몇 년에 대한 감각기억이. - P316
울었다. 그날 오후에는 울지 않았다. 시간은 늪처럼 흘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일분일 분을 힘겹게헤치고나가, 평소와 똑같은 무감각한 집중력으로 사과와 치즈조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바로 이 기억이 그 서글프고 금욕적인 존재에 대한 애달픈 비통함으로, 그리고 너무도 어리둥절한 상실감으로 나를 가득 채웠다. 그 강철 같은 방어벽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끈기로 버텨내는 능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분명 무서웠지만, 그와 함께 기이한 슬픔도 느꼈다. 마치 굶기를뒤로하고 떠난다는 것이 어떤 씁쓸하지만 필수적인 위안에,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깊디깊게 신뢰할 수 있었던 자기 보호의한 방법에 작별 인사를 고하는 일인 것처럼. 치료사가 물었다. 거식증이 당신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했던건가요? 그것으로부터죠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건 바로 그 허함, 바로 그 절망과 실망의 강도, 바로 그 눈물, 항상 가까스로 흘리지 않고 버텨냈고 부인했고 굶음으로써 쫓아버렸던 그 눈물, 한마디로 슬픔이었다. - P318
슬픔은 통찰에 완강히 저항한다. 나는 불안과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조각들을 끼워 맞춰 퍼즐을 완성할 수 있고, 어디까지가 문화이며 어디까지가 몸과 자아로부터의 소외인지 깔끔한 선을 그어 구분할 수 있으며, 내 거식증의 역사를 이루는각각의 조각들에 대한 근원을 이런 순간과 저런 순간으로, 이런 교훈과 저런 메시지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할 수도 있다. 이모든 것의 저변에 슬픔이 흐르고 있다. 슬픔은 대지처럼 깊이자리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롭게 떠도는 듯하고, 욕구의 문제를끌어당겨 거기에 강렬하고 독특한 빛을 비추는 아주 신비로운힘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모든 개별적 갈망은 그 이글거리는 빛을 받으면 흐릿해져 구별할 수도 없게 된다. 거식증은나를 이런 슬픔의 감정에서 보호해주지 못했고, 거식증에서회복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 P319
"욕망은 절대 파괴되지 않는 영구성을 지니고 있다. 욕망은소멸하지 않는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그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일에는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추구와 갈망의 조건인 허기의 경험과, 일시적 만족을 줄 수는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추구와 새로운 갈망에 밀려나고 마는 채워짐의 경험 사이에 감도는 긴장을 처음부터 지닌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 P320
프로이트는 인간의 ‘죽음의 본능‘에 관해 썼다. 이 말은 실제로 삶을 끝내고 싶다는 바람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들어 있음 직한 그 초기의 마취 상태와도 같은 지극한 행복의상태를, 원함과 존재함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완전한 평온함과 안도감의 상태를 되찾고 싶어하는 갈망과 더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그 상태로돌아가기도 하지만-음악이나 리듬이나 일이나 섹스에 완전히 몰입할 때, 마약을 하거나 술을 마실 때, 기도에 완전히 몰입할 때, 혹은 둥글게 만 몸을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딱 붙이고 반쯤은 잠들고 반쯤은 깨어 있는 상태로 누워 있을 때 우리는 그 상태에 들어간다-더 영구적인 상태로서는 이미 상실된 상태이며, 단지 그 상태에 대한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뒤섞이고 바래고 희석된 채로 우리의 영혼 속에 접혀 들어가 있을 뿐이고, 그마저 언젠가는 그저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것으로, 속삭임처럼 희미한 아픔으로, 무엇인가가 실로 빠져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만 남게 된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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