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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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출처;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황지우시인은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


  한라산, 영실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길은 오롯이 눈길이었다. 
  바람 없이 차고 맑은 기운만 가득한데 구름은 산을 희롱했다. 쏴아아~ 몰려서 산의 모습을 감추는가 싶으면 어느새 드러내놓곤 하였다. 눈으로도 구름으로도 다 감춰지지 않은 기암절벽은 장.엄.했다. 본디 장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러고저러고 아무런 말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좋을 장엄함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그저 오래보아도 혹하는 풍경으로 장.엄. 했다. 
 

  눈으로 폭신폭신한 구상나무 숲길은 너무 짧았다. 
  아, 짧아서 짧은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 짧은 매혹적인 길이었다. 바쁘지 않다. 정상은 아니어도 좋았다. 
  올레에서 배운 것이다. 놀멍놀멍 아름다운 숲길을 왔다갔다 고요를 즐겼다. 늘 달리면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은 잊어도 좋다. 와랑와랑한 햇볕속의 열무 밭도, 종아리를 성치않게 만들던 모기도, 빨리 달라고 소리치던 성난 손님들도, 반쪼가리가 되어버린 펀드도, 놀면 야금야금 줄어들 통장의 잔고도, 아무런 대책 없는 멀지않은 노후도 잊었다. 나, 여기에 이르기 위해 먼 길 걸어왔으리. 산은 언제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것을.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주어도 은빛, 은빛은 황홀했다. 윗세오름에서 만난 눈보라마저도 황홀했다. 차운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무심한 듯 쳐다보던 까마귀는 눈보라 속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까만색이었다. 우리는 백로더러 까마귀 곁에는 가지도 말라고 배웠다는 것을 녀석은 알까? 제 삶을 불편 없이 충실히 살아가는 까마귀를 검다고, 흉조라고 몰아가는 것은 편견이라고 녀석은 내게 따지러 온 모양이다. 알았다, 까마귀야. 고맙고 고맙구나!

   돌아와서 문장에서 배달된 '눈보라'를 듣는데 윗세오름에서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아니, 더 거친 눈보라에 뺨이 얼얼하게 서있는 느낌이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몇 번을 다시 들어도 같은 말을 한다. 시를 듣는 내내 손이 시리다. 발이 시리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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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고급장정본) - 정진규 시선집
정진규 지음 / 도서출판 시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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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성찬

                        

                                    신달자

                   

 그제는 속초 바다와 저녁 겸상을 했다 밥상에 바닷속 사정 많이도 올라와 있었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싱싱할수록 쫄깃한 물결이 오래 입안에 메아리쳤다 얼마나 파도쳤는지 한입 가득 들어오는 날것들 쫀득쫀득하게 찰지다 바다는 외곬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하느라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렸나 상 위에서도 이빨 사이에서도 철썩 그 한 마디만 되풀이했다 나는 바다의 속만 파먹었다 파도의 아픈 발자국이 우둘우둘 씹혔다 바다가 무거워 허리가 반으로 접힌 붉은 새우는 내 시선이 포개져 더 오므라진다 냅다 입으로 넣어버렸다

 어제는 설악산과 저녁 겸상을 했다 밥상에는 구구절절한 산속 사연들이 올라와 있었다
 명산의 갈비뼈를 거쳐 여기까지 온 풋것들 저마다 접시 위에서 차분히 고개 숙이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고속으로 몸을 키우지 않고 서서히 자연의 속도로 하늘의 질서를 잘 견디어온 귀빈들 그 몸속에 폭풍도 천둥도 뙤약볕도 폭설의 수난도 곰삭은 속도로 서서히 안으로 껴안아 온 것 본다 두 번 생을 살더라도 따라갈 수 없는 필요한 잠언들 잎으로 열매로 뿌리로 낱낱이 접시에 싱싱하게 누워 있다 다 견딘 자의 묵묵한 겸손이 산나물 잎 잎에 배어 있다 입에 넣지 않고 바라만 봐도 산 하나 먹은 것 같다

  오늘은 백담사와 저녁 겸상을 했다 상이 비어 있었다


                           신달자 시선집 [바람 멈추다 (도서출판 시월)] 중에서  

 

 

 시집 한 권에 오만 원, 오만 원, 허걱~ 하루 일당에 근접한 돈이다.
 하여 정진규 선생님의 활판시집이 출간되었을 때도 망설이다 망설이다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신달자 시인의 ‘사막의 성찬’에서 결국 수저 들고 만 것이다.
 그동안 거의 모르고 있었던 시인의 언어가 잘 차려진 밥상이다.
 하루쯤 굶어도 좋게 하는 고봉밥이다.
 오만 원, 하면 비싸다 여겨지지만 시 백편인데 한 편에 오백 원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뜨끔하다.
 절제하고 절제하면서, 다듬고 다시 다듬어서 내게로 온 시 '사막의 성찬'이 오백 원이라니.......
 비만 오면 찾아 들어야 하는 삽이 '삽'이 되어 오백 원이라니.......
 이틀 치의 일당이 날아갔지만 석 달은 배부를 것 같은 뜨거운 고봉밥이 내게로 왔다.
 글자들이 살아서 가슴에, 머리에 콕 콕 먹힌다. 꼭꼭 씹어 먹어야겠다.



  

놋수저

             정진규

 어머니가 쓰시던 놋수저 한 벌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오늘도 놋수저를 꽂는다 제삿날 메 올리는 삽시 (揷匙)가 아니다 어머니의 고봉밥을 어머니의 놋수저로 내가 먹는다 혼령의 밥을 내가 먹는다 어머니는 오늘도 내 밥이시다 죽이 아니라 밥이시다 어머니 가신 뒤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놋수저를 꽂았다 

 

           정진규 시선집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도서출판 시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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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제1회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민음의 시 98
이기철 지음 / 민음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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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과 동행하다

  전쟁의 예고로 흉흉한 날이었다. 노루귀 군락지를 아시는 분의 안내로 노루귀를 보러 가자는 지인의 전화에 집을 나섰더니 전철역엔 반전시위가 한참 중이였다. 역설적이게도 반전시위는 다가온 전쟁을 더욱 예감케 하는 것이어서 공연히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버린다. 확실한 소신으로 반대하는 용기 있는 자세가 부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아닌걸 아니라고 얘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건강 해질 것이다. 명분 없는 반대나 딴지 걸기가 아니라 명명백백한 이론을 앞세울 때는 더욱 그러하다. 역으로 들어서니 화물차에 수 십대의 탱크가 실려서 이동 중이다. 그렇게 가까이, 그렇게 여러 대의 탱크를 한꺼번에 대하고 나니 전쟁이 더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 어마어마한 탱크에 죽어간, 어린 소녀, 미선이와 효순이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바퀴를 보고 있는 착각에 사로잡혀, 어두워지려는 마음이 들지만 세상은 너무도 찬란한 봄이다. 어둠에 맘을 뺏기기에는 너무도 화사한 날씨인 것이다. 찬 기운이 가셔버린 바람에선 더운 기운이 묻어나고 이 햇살에 모든 꽃들은 피어날 것 같기만 하다. 전쟁의 예감도, 이 햇살의 찬란함 앞에서는 맥을 놓고 마는 것이다.

봄길과 동행하다

                       이기철

움 돋는 풀잎 외에도
오늘 저 들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꽃 피는 일 외에도
오늘 저 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종일 풀잎들은 초록의 생각에 빠져있다
젊은 들길이 아침마다 파란 수저를 들 때
그때는 우리도 한번쯤
그리움을 그리워해 볼 일이다

마을 밖으로 달려 나온 어린 길 위에
네 이름도 한번 쓸 일이다
길을 데리고 그리움을 마중하다 보면
세상이 한 번은 저물고 한 번은 밝아 오는
이유를 안다
이런 나절엔 바람의 발길에 끝없이
짓밟혀라도 보았으면

꽃들과 함께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 꽃의 언어로 편지를 쓰고
나도 너를 찾아
봄길과 동행하고 싶다

봄 속에서 길 잃고
봄 속에서 깨어나고 싶다

 

  습관적으로 펴든 얇은 월간지에서 이 시가 튀어나와 찾아가는 그 길의 아름다운 동행을 미리 축하라도 해주지 싶은데,,, 그랬다.
  낯설지만 이미 알고 있는 분의 안내로 찾아간 그곳에는 '봄 속에서 길 잃고 봄 속에서 깨어나고 싶은'소망을 품고 싶은 봄 길이 있었다. 도심에서 멀리 벗어난 것도 아니고 그리 깊은 산 속도 아니건만 조금 걸었어도 깊숙이 파묻히는 안온한 느낌을 그 산은 충분히 갖고 있었다. 한 때 민둥산이었을 거란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나무들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노루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산을 설렘 속에 만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모르고 볼 때의 모든 것들은, 익명성 속에서 단순하지만, 이름을 알고 난 후의 사물은, 얼마나 달라지는지 번번이 느끼곤 한다. 오늘 만날'노루귀'는 어디에도 노루를 닮은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꽃이 지고 잎이 나오는 모습이 도르르 말린 게 노루귀와 같다니...겨울을 이기고 봄을 부른 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진이 아닌 실제의 꽃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이다.

  '길을 데리고 세상을 마중하다 보면 세상이 한번은 저물고 한 번은 밝아오는 이유를 안다'고 시인은 그랬던가!
  손으로 가르켜 준 곳에 눈을 따라가니 앙징맞은 모습으로 낙엽 속에서 수줍게 고개 내민 노루귀는, 살랑살랑 우리를 반기며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10Cm도 안 되는 솜털 보송송한 여린 꽃대를 세우고 하늘거리는 모습이라니...
  담박에 여리지만 완벽한 자세로 태초부터 거기 있었던 듯, 세상을 밝히고 마음에도 활짝 등불이 되어 걸린다. 세상 어떤 등대보다도 환하게.
  내가 그동안 철철이 산을 오르락 거리면서 무심히 밟기도 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지나다녔을 그 길 위에도 노루귀는 그렇게 피어 있었으리. 어디 노루귀뿐이랴! 여전히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많은 꽃들은 그렇게 무심히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고 쓸쓸히 꽃을 피웠다 지리라. 원망 없이 분노 없이 제 몫의 꽃피우기를 멈추지 않을 노루귀를 여기저기 누군가 캐간 흔적이 보인다. 어쩌면 결국은 사람들의 관심이 꽃을, 동, 식물들을 사라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고 얘기를 나누면서 이건 무언지? 저건 무언지? 묻기를 반복한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양지꽃, 봄맞이꽃, 개암나무, 싸리나무... 거침없이 대답하는 두 분의 자연 사랑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 있기에 희망은 남아 있을 것이다.

 

  지치지도 않게 그 작은 꽃들을 바라본다. 하늘거리는 여린 꽃잎의 떨림 만큼이나 삶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그 작고 여린 몸으로도 세상을 맞서 꽃을 피우고 서있는데, 수 천 수 만 배는 될 몸뚱아리를 갖고도 핑계만 가득하니 꽃 피울 일이 아득해져서 더욱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간절한 의지만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행동하지 않고, 춥다고 웅크려 있으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꽃을 피우지 못하리라. 노루귀와 함께 한 봄길 동행에는 '일어서라' '일어서라'속삭임이 귀를 후비고 가슴을 때린다.
  작년보다는 올해, 올해보다는 내년, 그렇게 나빠질 것이 당연한 노루귀가 살아갈 환경, 하지만 내년에도 여기 이 자리에서 다시 감탄 할 그날이었음 좋겠다.
  봄 야생화, 작고 여린 풀꽃들이 주는 수백 수천의 언어들. 그저 주어진 봄이 아니라 몸 전부를 걸고 피어난 꽃송이 있기에 봄 있으니, 깨어나 저 봄 속으로 당당히 일어서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그렇게 계절은 오고 삶은 계속되고 있는 거라고 속삭인다.
  그래.
  눈을 번쩍 뜨고 봄 길과 동행하자.
  이 봄이 지나기 전에 전쟁도 멈춰있기를 바라면서.

 

 2003. 3. 25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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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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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요로 내리는 풍경 -백양사   

 

 

 “그렇지요. 벽암과 사천왕과 승병과 의병과 벚나무.”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고맙고 장한 불교에 대한 포상이기도 하고, 그 복원된 절터들이 입지 좋은 산속에 있는지라 군사의 요충지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난세에 충신 나고, 부모가 병들어야 효자가 나듯이, 호되고도 모질게 양대 전란을 겪은 후에야 호국 호법의 염원이 간절해져서,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강렬한 소원으로, 나라와 백성들은 사천왕같이 힘세고 큰 존재가 자기들을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못된 외적은 단칼에 호령하여 물리치고, 나라와 불법은 소중하게 보호하여 주기를 염원하는 마음은 사찰마다 산더미처럼 물밀듯이 밀려들어, 사천왕들은 날마다 태산이 좌정을 한 모양으로 우람하고 용맹스럽게 우뚝우뚝 높아졌다.
 그리고 눈부시게 찬연한 오색단청을 입었다.
 “아까도 잠시 말씀을 드리다가 말았습니다만 임진왜란 이후에 사천왕이 세워진 사찰은 대개 반드시 승군 승병이 일어났던 의병집결소였어요. 그러니 호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임진왜란 때 승군 대장으로 활약하신 부휴선사와 그의 제자 벽암대사를 두고 사람들은 대불과 소불이라 지칭하였답니다. 이분들이 사천왕과 반드시 관계가 있을 법한 것은 묘하게도 제가 다녀 본 절들에 사천왕이 중건된 해가 기록되어 있는 걸 살펴보니. 우연의 일치인가, 벽암대사가 조실로 계실 때 꼭 사천왕을 다시 세우셨더란 말입니다. 간 곳마다.”
 승군과 호국과 사천왕과 식민지의 승려.
 그리고 동경 유학생.
 사천왕 이라면 우선 막연히나마 얼핏 스치며 힐끗 본 인상만으로도 그 어떤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잉걸처럼 이글거리는 눈망울이 툭 불거져 부릅뜬데다 붉은 입에 주먹코. 도무지 우리 마을 주변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아 기이 기괴한 얼굴. 거기다가 괴력을 발휘할 만큼 거대한 몸체. 후려칠 듯 위압적으로 쳐들어 올린 팔과 악귀를 짓밟고 있는 발들이, 꿈에라도 정다울리 없어 보이지만.
 강호는 만감이 착잡하게 뒤엉키는 눈으로 새삼스럽게 사천왕을 올려다본다. 저 힘을 빌려서 지키고 싶었던 것들.
 나라. 불법.  

 웬일인가.
 눈에 눈물이 돈다.
 지나치게 험상궂어 애기 같아 보일 만큼 순진해져 버린 사천왕의 동, 남, 서, 북 얼굴과, 저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몸에 절하여 바친 낱낱의 염원들은, 얼마나 간절한 눈물이었을까.
 더 무섭게. 더 크게. 더 강하게.
 한 점 한 점 붙이고 새긴 그 눈물이 저렇게 엄청난 과장을 넘어서서 그만 무구에 이르러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무서워서 귀엽구나.
 강호는 저도 모르게 스며드는 마음에 스스로 놀라 의아했다.
 “아이고. 나, 저 얼룩덜룩 칠해 논 것만 없어도 덜 무섭겄등만, 왜 사천왕은 저렇게 꼭 뿔겅 푸렁, 벨라도 요상시럽게 왼 몸뗑이에다 무당맹이로 칠갑을 허고 있당가잉? 어매에. 나는 그리로 안 들어갈라네이. 자네 혼자가소. 나는 부처님 전으다 절 허고 불전 바치는 불제자라도, 그 사천왕 앞에는 안 가고 자프네. 뒷모갱이 잡우땡길 것맹이고 잉. 팍 뚜드러 갖꼬 나를 거시랑(지렁이) 맹이로 대롱대롱 들어올려 불면 어쩌 꺼이여? 저 손아구는 솥뚜껑 저리 가라고 큼지막허게도 생겼그만. 아아따아, 심란시러라. 멋 헐라고 저러고 눈은 기양.”
 “어어이구 참. 알았응게 저리 가드라고잉? 넘의 뒷꼭지 딸옴서 무단히 애민 년끄장 부정타게 허지 말고.”
 입이 싸고 말 못 참는 것도 타고난 업인가.] 

 “벚나무라고요? 일본 국화. 벚꽃?”
 “그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국화를 무엇 때문에 번뇌초 다 깎은 중들의 절집에다 저토록 몇 백 년생 무성하게 진작부터 심어오겠습니까?”
 .......
 “ 절에다 벚나무를 심은 것은 벽암대사였습니다. 이유는 이 벚나무가 곧고도 단단해서 유사시에 병장기로 만들어 쓸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왜병이 쳐들어오면 가차 없이 저 나무를 베어 깎아서. 구국의 무기로 만들려고.”
 “그렇습니까?”
 ........
 “이제 절간의 벚나무 보는 눈이 좀 달라지시겠습니까?”
 하며 불이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범련사 입구 일주문 언저리에 용틀임하는 아름드리 벚나무들 잎사귀, 푸르게 겹겹으로 짙어지는 무리무리가 녹음의 구름머리를 아득히 이루고 있다.

 

   ‘혼불’ 9권에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사천왕을 묘사했다. ‘혼불’을 읽고난 다음, 내가 보는 사천왕의 모습에는 혼을 담아 철필로 글을 써내려간 작가의 시선이 얹힌다. 탄성을 내지르며 꽃으로만 즐기는 ‘사쿠라’ 그 나무를 보는 생각을 다르게 해준 것도 역시 ‘혼불’이었다. 한 편의 서사시로 읽히던 문장들....... 드문드문 그려진다. 책 속에 담긴 역사와 사상과 철학을 통해서 비로소 배우는 것들, 작가의 마음으로, 눈으로, 바라보는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
 그러나 이제는 뿔겅 푸렁 단청도 퇴색해 무서움 보다는 안쓰런 스산함이다. 세월이 가면 간절한 기원들도 변하는가. 죄여서 사무치는 아름다움으로 그려지던 가릉빈가의 날개도 무거워 보인다. 젖지 않은 마음하나 속세를 지나 승의 문을 넘는다. 

 텅 빈 절집 마당.

 초파일이 지난 지 이틀, 절 마당 가득 염원의 연등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설선당, 대웅전, 조사전, 명부전에 둘러싸인 마당은 비에 젖는 학바위 홀로 내려앉아 있다.

 고요한 정경. 아늑하게 멈춰있다.
 풍경이 문득 댕강댕강 맑은 소리로 흔들린다. 쏴아~ 마음도 흔들린다.

 대웅전의 본존도, 설선당 좌탈입망의 서옹선사도, 그를 둘러싼 나무들도 저마다 흔들리며 젖고 있다.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은 곳에서 젖으며 흔들리는 것들, 저마다의 초발심으로 흔들리며 저마다 부처가 되어가고 있을까? 비는 내린다.

 화엄.(華嚴)

 젖어드는 세상도, 나무들도 화엄. 
 비는 세상에 내리고 당간지주에 몸을 기대고 서있는 나는 비에 젖는다. 아무리 비를 막아도 막무가내로 젖는다.  .......젖고 또 젖고, 젖고 또 젖는다.

 발길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맹이 몇 개, 마당에 슬그머니 내려두고 나를 부르는 길을 따라 절집을 벗어난다. 길은 구불구불 산으로, 내 안으로 향한 외길이다. 젖은 발자국을 젖은 길에 남기며 간다.

 2004. 9. 7.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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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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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의 햇빛 속에는


어린 사슴을 닮았다는 섬의 햇빛은 따가웠다.
녹동항에서 배로 오 분이면 닿을 수 있는 섬이지만
수심을 알 수 없는 마음의 물결을 건너야만
이를 수 있는 곳, 그 가깝고도 먼 섬에
상처 입은 사슴들이 살고 있었다.
그 섬의 햇빛 속에는
다른 데서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녹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햇빛을 다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시체를 해부했던 검시실을 막 나왔을 때
쏟아지는 햇빛이 무어라 외치는 것처럼 들렸을 뿐이다.
몽당손으로 그물을 잡고 둘러선 소년들이
파닥이는 물고기 몇 마리를 소출로 내놓은 모습도,
뗏목하나에 의지해 바다로 뛰어들었던 남자도,
세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꽃수를 놓던 노파도,
길 양쪽으로 갈라선 채 손 한번 잡지 못하고
눈으로만 피붙이를 만나야했던 어미의 흐느낌도,
여든네 명의 목숨을 불태웠던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들도,
없는 것처럼 없는 것처럼 살아오지 않았던가.
바다 저편에서 단지 제 고통에 겨워 읊조리지 않았던가.
굉음처럼 따가운 햇빛 아래
다리 붉은 게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길 잃은 게가 숨어든 숲그늘,
썩어가는 손으로 전지해놓은 나무들은 아름다웠다.
두 다리가 없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걸어가는 처녀의 웃음소리,
나는 햇빛 속으로도 그늘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나희덕의 ‘그 섬의 햇빛 속에는’ 전문. 시집 ‘사라진 손바닥’-

  지하철 안에서 몇 번째 앞을 지나가는 흰 지팡이를 모른 척 고개를 박고 있었다. 창에 걸린 햇살 하나, 시어로 박힌다. 3년 전 소록도 중앙공원의 나무의자에 앉아 있을 때 까무룩 지나가던 빛 화살이었다. 잊고 있던 그 여행길, 어린 사슴의 섬. 그곳에서 머문 네 시간이 살아난다.

 24년 전의 시간들이 거기 놓여있었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만났던 중 2때 소록도는 너무나도 강렬하게 남아서 정말로 보았을까, 의심스럽게 했다. 어쩌면 책이나 영상으로 각인된 이미지는 아닐까 싶은 기억의 환청에 오래 시달렸다. 붉은 벽돌의 건물들과 대비되던 푸른 이미지들....... 처음 만난 바다는 낮에도 밤에도 푸르게 으르렁거렸다. 티 없이 잘 가꾸어진 잔디는 만지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았다. 더펄거리는 내 머리보다 더 잘 손질된 나무들의 푸름은 박제되어 있었다. 소독약이 놓여있던 우물물도 까닭 없이 푸르렀고 그 모든 것을 비추는 8월의 하늘은 더 할 수 없는 푸름이었다.

 그래서 찾아간 길. 이제는 가도 가도 황톳길을 만날 수 없고 문둥이라는 말도 찾을 수 없지만 여전히 멀고 먼 섬. 몸보다 마음이 멀어서 다가 갈 수 없는 먼 나라. 아직도 당신들만의 천국이었다.

 터무니없이 밝은 햇살은 푸름은 더 푸르게 했고 붉은 벽돌을 더 붉게 했다. ‘국립소록도병원’의 흰 건물 앞마당,  활기 가득한 자원봉사자들과 무심한 듯 잡담을 나누고 있는 휠체어들 사이에도 빛은 고르게 쏟아져서 눈이 부셨다.

 그리고 거기, 몽당손들이 강제로 가꾼 아름다운 중앙공원을 오래 걸어 다녔다. 6000평 푸름 속을 핏빛의 심정으로 같은 길을 걷고 걷다가 만나던 보리피리 시비에 내리던 빛에 잠시 눈감아야했다. 사랑과 박애정신을 배우던 어린 시절도, 욕망의 벽과 벽으로 고립된 그 때에도, 내 머리위에 내리던 8월의 뜨거운 햇빛은 기억을 오롯이 되살려주었다. 격리되고 유폐된 삶의 흔적들이 붉은 벽돌로 서럽게 상징되던 어린 날의 가르침을 실체로 인정했다. 나무 한 그루만도 못한 목숨과 삶이 문둥병이라는 천형으로 거기 버려져 있었다.

 그것들을 생각하던 시간들이, 그 빛 화살 하나하나가 시어들 속에서 빛의 속도로 가슴에 꽂힌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어린 사슴들의 소리 없는 처절한 절규를 듣는다. 내 안에서부터 아직도 진행형인 유배를 만난다.

 나는 햇빛 속으로도 그늘 속으로도 들어 갈 수가 없었다.

 2004. 11. 28.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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