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고급장정본) - 정진규 시선집
정진규 지음 / 도서출판 시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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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성찬

                        

                                    신달자

                   

 그제는 속초 바다와 저녁 겸상을 했다 밥상에 바닷속 사정 많이도 올라와 있었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싱싱할수록 쫄깃한 물결이 오래 입안에 메아리쳤다 얼마나 파도쳤는지 한입 가득 들어오는 날것들 쫀득쫀득하게 찰지다 바다는 외곬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하느라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렸나 상 위에서도 이빨 사이에서도 철썩 그 한 마디만 되풀이했다 나는 바다의 속만 파먹었다 파도의 아픈 발자국이 우둘우둘 씹혔다 바다가 무거워 허리가 반으로 접힌 붉은 새우는 내 시선이 포개져 더 오므라진다 냅다 입으로 넣어버렸다

 어제는 설악산과 저녁 겸상을 했다 밥상에는 구구절절한 산속 사연들이 올라와 있었다
 명산의 갈비뼈를 거쳐 여기까지 온 풋것들 저마다 접시 위에서 차분히 고개 숙이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고속으로 몸을 키우지 않고 서서히 자연의 속도로 하늘의 질서를 잘 견디어온 귀빈들 그 몸속에 폭풍도 천둥도 뙤약볕도 폭설의 수난도 곰삭은 속도로 서서히 안으로 껴안아 온 것 본다 두 번 생을 살더라도 따라갈 수 없는 필요한 잠언들 잎으로 열매로 뿌리로 낱낱이 접시에 싱싱하게 누워 있다 다 견딘 자의 묵묵한 겸손이 산나물 잎 잎에 배어 있다 입에 넣지 않고 바라만 봐도 산 하나 먹은 것 같다

  오늘은 백담사와 저녁 겸상을 했다 상이 비어 있었다


                           신달자 시선집 [바람 멈추다 (도서출판 시월)] 중에서  

 

 

 시집 한 권에 오만 원, 오만 원, 허걱~ 하루 일당에 근접한 돈이다.
 하여 정진규 선생님의 활판시집이 출간되었을 때도 망설이다 망설이다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신달자 시인의 ‘사막의 성찬’에서 결국 수저 들고 만 것이다.
 그동안 거의 모르고 있었던 시인의 언어가 잘 차려진 밥상이다.
 하루쯤 굶어도 좋게 하는 고봉밥이다.
 오만 원, 하면 비싸다 여겨지지만 시 백편인데 한 편에 오백 원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뜨끔하다.
 절제하고 절제하면서, 다듬고 다시 다듬어서 내게로 온 시 '사막의 성찬'이 오백 원이라니.......
 비만 오면 찾아 들어야 하는 삽이 '삽'이 되어 오백 원이라니.......
 이틀 치의 일당이 날아갔지만 석 달은 배부를 것 같은 뜨거운 고봉밥이 내게로 왔다.
 글자들이 살아서 가슴에, 머리에 콕 콕 먹힌다. 꼭꼭 씹어 먹어야겠다.



  

놋수저

             정진규

 어머니가 쓰시던 놋수저 한 벌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오늘도 놋수저를 꽂는다 제삿날 메 올리는 삽시 (揷匙)가 아니다 어머니의 고봉밥을 어머니의 놋수저로 내가 먹는다 혼령의 밥을 내가 먹는다 어머니는 오늘도 내 밥이시다 죽이 아니라 밥이시다 어머니 가신 뒤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놋수저를 꽂았다 

 

           정진규 시선집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도서출판 시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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