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제1회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민음의 시 98
이기철 지음 / 민음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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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봄길과 동행하다

  전쟁의 예고로 흉흉한 날이었다. 노루귀 군락지를 아시는 분의 안내로 노루귀를 보러 가자는 지인의 전화에 집을 나섰더니 전철역엔 반전시위가 한참 중이였다. 역설적이게도 반전시위는 다가온 전쟁을 더욱 예감케 하는 것이어서 공연히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버린다. 확실한 소신으로 반대하는 용기 있는 자세가 부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아닌걸 아니라고 얘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건강 해질 것이다. 명분 없는 반대나 딴지 걸기가 아니라 명명백백한 이론을 앞세울 때는 더욱 그러하다. 역으로 들어서니 화물차에 수 십대의 탱크가 실려서 이동 중이다. 그렇게 가까이, 그렇게 여러 대의 탱크를 한꺼번에 대하고 나니 전쟁이 더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 어마어마한 탱크에 죽어간, 어린 소녀, 미선이와 효순이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바퀴를 보고 있는 착각에 사로잡혀, 어두워지려는 마음이 들지만 세상은 너무도 찬란한 봄이다. 어둠에 맘을 뺏기기에는 너무도 화사한 날씨인 것이다. 찬 기운이 가셔버린 바람에선 더운 기운이 묻어나고 이 햇살에 모든 꽃들은 피어날 것 같기만 하다. 전쟁의 예감도, 이 햇살의 찬란함 앞에서는 맥을 놓고 마는 것이다.

봄길과 동행하다

                       이기철

움 돋는 풀잎 외에도
오늘 저 들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꽃 피는 일 외에도
오늘 저 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종일 풀잎들은 초록의 생각에 빠져있다
젊은 들길이 아침마다 파란 수저를 들 때
그때는 우리도 한번쯤
그리움을 그리워해 볼 일이다

마을 밖으로 달려 나온 어린 길 위에
네 이름도 한번 쓸 일이다
길을 데리고 그리움을 마중하다 보면
세상이 한 번은 저물고 한 번은 밝아 오는
이유를 안다
이런 나절엔 바람의 발길에 끝없이
짓밟혀라도 보았으면

꽃들과 함께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 꽃의 언어로 편지를 쓰고
나도 너를 찾아
봄길과 동행하고 싶다

봄 속에서 길 잃고
봄 속에서 깨어나고 싶다

 

  습관적으로 펴든 얇은 월간지에서 이 시가 튀어나와 찾아가는 그 길의 아름다운 동행을 미리 축하라도 해주지 싶은데,,, 그랬다.
  낯설지만 이미 알고 있는 분의 안내로 찾아간 그곳에는 '봄 속에서 길 잃고 봄 속에서 깨어나고 싶은'소망을 품고 싶은 봄 길이 있었다. 도심에서 멀리 벗어난 것도 아니고 그리 깊은 산 속도 아니건만 조금 걸었어도 깊숙이 파묻히는 안온한 느낌을 그 산은 충분히 갖고 있었다. 한 때 민둥산이었을 거란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나무들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노루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산을 설렘 속에 만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모르고 볼 때의 모든 것들은, 익명성 속에서 단순하지만, 이름을 알고 난 후의 사물은, 얼마나 달라지는지 번번이 느끼곤 한다. 오늘 만날'노루귀'는 어디에도 노루를 닮은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꽃이 지고 잎이 나오는 모습이 도르르 말린 게 노루귀와 같다니...겨울을 이기고 봄을 부른 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진이 아닌 실제의 꽃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이다.

  '길을 데리고 세상을 마중하다 보면 세상이 한번은 저물고 한 번은 밝아오는 이유를 안다'고 시인은 그랬던가!
  손으로 가르켜 준 곳에 눈을 따라가니 앙징맞은 모습으로 낙엽 속에서 수줍게 고개 내민 노루귀는, 살랑살랑 우리를 반기며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10Cm도 안 되는 솜털 보송송한 여린 꽃대를 세우고 하늘거리는 모습이라니...
  담박에 여리지만 완벽한 자세로 태초부터 거기 있었던 듯, 세상을 밝히고 마음에도 활짝 등불이 되어 걸린다. 세상 어떤 등대보다도 환하게.
  내가 그동안 철철이 산을 오르락 거리면서 무심히 밟기도 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지나다녔을 그 길 위에도 노루귀는 그렇게 피어 있었으리. 어디 노루귀뿐이랴! 여전히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많은 꽃들은 그렇게 무심히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고 쓸쓸히 꽃을 피웠다 지리라. 원망 없이 분노 없이 제 몫의 꽃피우기를 멈추지 않을 노루귀를 여기저기 누군가 캐간 흔적이 보인다. 어쩌면 결국은 사람들의 관심이 꽃을, 동, 식물들을 사라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고 얘기를 나누면서 이건 무언지? 저건 무언지? 묻기를 반복한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양지꽃, 봄맞이꽃, 개암나무, 싸리나무... 거침없이 대답하는 두 분의 자연 사랑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 있기에 희망은 남아 있을 것이다.

 

  지치지도 않게 그 작은 꽃들을 바라본다. 하늘거리는 여린 꽃잎의 떨림 만큼이나 삶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그 작고 여린 몸으로도 세상을 맞서 꽃을 피우고 서있는데, 수 천 수 만 배는 될 몸뚱아리를 갖고도 핑계만 가득하니 꽃 피울 일이 아득해져서 더욱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간절한 의지만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행동하지 않고, 춥다고 웅크려 있으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꽃을 피우지 못하리라. 노루귀와 함께 한 봄길 동행에는 '일어서라' '일어서라'속삭임이 귀를 후비고 가슴을 때린다.
  작년보다는 올해, 올해보다는 내년, 그렇게 나빠질 것이 당연한 노루귀가 살아갈 환경, 하지만 내년에도 여기 이 자리에서 다시 감탄 할 그날이었음 좋겠다.
  봄 야생화, 작고 여린 풀꽃들이 주는 수백 수천의 언어들. 그저 주어진 봄이 아니라 몸 전부를 걸고 피어난 꽃송이 있기에 봄 있으니, 깨어나 저 봄 속으로 당당히 일어서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그렇게 계절은 오고 삶은 계속되고 있는 거라고 속삭인다.
  그래.
  눈을 번쩍 뜨고 봄 길과 동행하자.
  이 봄이 지나기 전에 전쟁도 멈춰있기를 바라면서.

 

 2003. 3. 25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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