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9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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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요로 내리는 풍경 -백양사   

 

 

 “그렇지요. 벽암과 사천왕과 승병과 의병과 벚나무.”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고맙고 장한 불교에 대한 포상이기도 하고, 그 복원된 절터들이 입지 좋은 산속에 있는지라 군사의 요충지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난세에 충신 나고, 부모가 병들어야 효자가 나듯이, 호되고도 모질게 양대 전란을 겪은 후에야 호국 호법의 염원이 간절해져서,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강렬한 소원으로, 나라와 백성들은 사천왕같이 힘세고 큰 존재가 자기들을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못된 외적은 단칼에 호령하여 물리치고, 나라와 불법은 소중하게 보호하여 주기를 염원하는 마음은 사찰마다 산더미처럼 물밀듯이 밀려들어, 사천왕들은 날마다 태산이 좌정을 한 모양으로 우람하고 용맹스럽게 우뚝우뚝 높아졌다.
 그리고 눈부시게 찬연한 오색단청을 입었다.
 “아까도 잠시 말씀을 드리다가 말았습니다만 임진왜란 이후에 사천왕이 세워진 사찰은 대개 반드시 승군 승병이 일어났던 의병집결소였어요. 그러니 호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임진왜란 때 승군 대장으로 활약하신 부휴선사와 그의 제자 벽암대사를 두고 사람들은 대불과 소불이라 지칭하였답니다. 이분들이 사천왕과 반드시 관계가 있을 법한 것은 묘하게도 제가 다녀 본 절들에 사천왕이 중건된 해가 기록되어 있는 걸 살펴보니. 우연의 일치인가, 벽암대사가 조실로 계실 때 꼭 사천왕을 다시 세우셨더란 말입니다. 간 곳마다.”
 승군과 호국과 사천왕과 식민지의 승려.
 그리고 동경 유학생.
 사천왕 이라면 우선 막연히나마 얼핏 스치며 힐끗 본 인상만으로도 그 어떤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잉걸처럼 이글거리는 눈망울이 툭 불거져 부릅뜬데다 붉은 입에 주먹코. 도무지 우리 마을 주변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아 기이 기괴한 얼굴. 거기다가 괴력을 발휘할 만큼 거대한 몸체. 후려칠 듯 위압적으로 쳐들어 올린 팔과 악귀를 짓밟고 있는 발들이, 꿈에라도 정다울리 없어 보이지만.
 강호는 만감이 착잡하게 뒤엉키는 눈으로 새삼스럽게 사천왕을 올려다본다. 저 힘을 빌려서 지키고 싶었던 것들.
 나라. 불법.  

 웬일인가.
 눈에 눈물이 돈다.
 지나치게 험상궂어 애기 같아 보일 만큼 순진해져 버린 사천왕의 동, 남, 서, 북 얼굴과, 저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몸에 절하여 바친 낱낱의 염원들은, 얼마나 간절한 눈물이었을까.
 더 무섭게. 더 크게. 더 강하게.
 한 점 한 점 붙이고 새긴 그 눈물이 저렇게 엄청난 과장을 넘어서서 그만 무구에 이르러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무서워서 귀엽구나.
 강호는 저도 모르게 스며드는 마음에 스스로 놀라 의아했다.
 “아이고. 나, 저 얼룩덜룩 칠해 논 것만 없어도 덜 무섭겄등만, 왜 사천왕은 저렇게 꼭 뿔겅 푸렁, 벨라도 요상시럽게 왼 몸뗑이에다 무당맹이로 칠갑을 허고 있당가잉? 어매에. 나는 그리로 안 들어갈라네이. 자네 혼자가소. 나는 부처님 전으다 절 허고 불전 바치는 불제자라도, 그 사천왕 앞에는 안 가고 자프네. 뒷모갱이 잡우땡길 것맹이고 잉. 팍 뚜드러 갖꼬 나를 거시랑(지렁이) 맹이로 대롱대롱 들어올려 불면 어쩌 꺼이여? 저 손아구는 솥뚜껑 저리 가라고 큼지막허게도 생겼그만. 아아따아, 심란시러라. 멋 헐라고 저러고 눈은 기양.”
 “어어이구 참. 알았응게 저리 가드라고잉? 넘의 뒷꼭지 딸옴서 무단히 애민 년끄장 부정타게 허지 말고.”
 입이 싸고 말 못 참는 것도 타고난 업인가.] 

 “벚나무라고요? 일본 국화. 벚꽃?”
 “그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국화를 무엇 때문에 번뇌초 다 깎은 중들의 절집에다 저토록 몇 백 년생 무성하게 진작부터 심어오겠습니까?”
 .......
 “ 절에다 벚나무를 심은 것은 벽암대사였습니다. 이유는 이 벚나무가 곧고도 단단해서 유사시에 병장기로 만들어 쓸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왜병이 쳐들어오면 가차 없이 저 나무를 베어 깎아서. 구국의 무기로 만들려고.”
 “그렇습니까?”
 ........
 “이제 절간의 벚나무 보는 눈이 좀 달라지시겠습니까?”
 하며 불이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범련사 입구 일주문 언저리에 용틀임하는 아름드리 벚나무들 잎사귀, 푸르게 겹겹으로 짙어지는 무리무리가 녹음의 구름머리를 아득히 이루고 있다.

 

   ‘혼불’ 9권에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사천왕을 묘사했다. ‘혼불’을 읽고난 다음, 내가 보는 사천왕의 모습에는 혼을 담아 철필로 글을 써내려간 작가의 시선이 얹힌다. 탄성을 내지르며 꽃으로만 즐기는 ‘사쿠라’ 그 나무를 보는 생각을 다르게 해준 것도 역시 ‘혼불’이었다. 한 편의 서사시로 읽히던 문장들....... 드문드문 그려진다. 책 속에 담긴 역사와 사상과 철학을 통해서 비로소 배우는 것들, 작가의 마음으로, 눈으로, 바라보는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
 그러나 이제는 뿔겅 푸렁 단청도 퇴색해 무서움 보다는 안쓰런 스산함이다. 세월이 가면 간절한 기원들도 변하는가. 죄여서 사무치는 아름다움으로 그려지던 가릉빈가의 날개도 무거워 보인다. 젖지 않은 마음하나 속세를 지나 승의 문을 넘는다. 

 텅 빈 절집 마당.

 초파일이 지난 지 이틀, 절 마당 가득 염원의 연등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설선당, 대웅전, 조사전, 명부전에 둘러싸인 마당은 비에 젖는 학바위 홀로 내려앉아 있다.

 고요한 정경. 아늑하게 멈춰있다.
 풍경이 문득 댕강댕강 맑은 소리로 흔들린다. 쏴아~ 마음도 흔들린다.

 대웅전의 본존도, 설선당 좌탈입망의 서옹선사도, 그를 둘러싼 나무들도 저마다 흔들리며 젖고 있다.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은 곳에서 젖으며 흔들리는 것들, 저마다의 초발심으로 흔들리며 저마다 부처가 되어가고 있을까? 비는 내린다.

 화엄.(華嚴)

 젖어드는 세상도, 나무들도 화엄. 
 비는 세상에 내리고 당간지주에 몸을 기대고 서있는 나는 비에 젖는다. 아무리 비를 막아도 막무가내로 젖는다.  .......젖고 또 젖고, 젖고 또 젖는다.

 발길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맹이 몇 개, 마당에 슬그머니 내려두고 나를 부르는 길을 따라 절집을 벗어난다. 길은 구불구불 산으로, 내 안으로 향한 외길이다. 젖은 발자국을 젖은 길에 남기며 간다.

 2004. 9. 7.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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