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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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출처;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황지우시인은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


  한라산, 영실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길은 오롯이 눈길이었다. 
  바람 없이 차고 맑은 기운만 가득한데 구름은 산을 희롱했다. 쏴아아~ 몰려서 산의 모습을 감추는가 싶으면 어느새 드러내놓곤 하였다. 눈으로도 구름으로도 다 감춰지지 않은 기암절벽은 장.엄.했다. 본디 장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러고저러고 아무런 말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좋을 장엄함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그저 오래보아도 혹하는 풍경으로 장.엄. 했다. 
 

  눈으로 폭신폭신한 구상나무 숲길은 너무 짧았다. 
  아, 짧아서 짧은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 짧은 매혹적인 길이었다. 바쁘지 않다. 정상은 아니어도 좋았다. 
  올레에서 배운 것이다. 놀멍놀멍 아름다운 숲길을 왔다갔다 고요를 즐겼다. 늘 달리면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은 잊어도 좋다. 와랑와랑한 햇볕속의 열무 밭도, 종아리를 성치않게 만들던 모기도, 빨리 달라고 소리치던 성난 손님들도, 반쪼가리가 되어버린 펀드도, 놀면 야금야금 줄어들 통장의 잔고도, 아무런 대책 없는 멀지않은 노후도 잊었다. 나, 여기에 이르기 위해 먼 길 걸어왔으리. 산은 언제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것을.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주어도 은빛, 은빛은 황홀했다. 윗세오름에서 만난 눈보라마저도 황홀했다. 차운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무심한 듯 쳐다보던 까마귀는 눈보라 속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까만색이었다. 우리는 백로더러 까마귀 곁에는 가지도 말라고 배웠다는 것을 녀석은 알까? 제 삶을 불편 없이 충실히 살아가는 까마귀를 검다고, 흉조라고 몰아가는 것은 편견이라고 녀석은 내게 따지러 온 모양이다. 알았다, 까마귀야. 고맙고 고맙구나!

   돌아와서 문장에서 배달된 '눈보라'를 듣는데 윗세오름에서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아니, 더 거친 눈보라에 뺨이 얼얼하게 서있는 느낌이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몇 번을 다시 들어도 같은 말을 한다. 시를 듣는 내내 손이 시리다. 발이 시리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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