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가 필리핀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일 년이 될 지,  몇 년이 될 지 기약없이 떠난다기에 보내는 날 잠시지만 눈이 젖고 마음이 아렸다. 

  근데 며칠 뒤 네이트에서 만나 서로 잡담을 주고 받았다. 그 곳에서 있었던 서너날을 미주알 고주알 생중계를 하는데 이건 원, 이웃에 있을 때 보다 더 시시콜콜 잡담을 나눴다. 그러다 보니 보내던 날 내 마음이 괜한 사치와 허영인 양 느껴져 혼자 머쓱해졌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가까운 세상. 근데 그 안 에서 절절한 마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러고 보니 사소한 일에 감동 잘 받기로 지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나조차도 요즘은 지극한 마음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병이 될 지극함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참'이란 수식을 붙일 만한 마음도 그다지 없었던 듯 하다.

 두보가 노래했던 그 마음. '죽어서 헤어지면 슬픔에 목이 메이고, 살아서 헤어지면 가슴은 쓰라리다'는 그 쓰라림 조차 그리운 날이다. 삶이 이토록 무미건조해진것은 분명히 불행이다.

 갖가지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이제는 감정조차도 선택해서 관리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지독한 아픔 따위는 되도록 선택하지 않으려 하다보니 지극한 기쁨과 행복도 모르고 살아갈 밖에.

삶이 좀더 불편해도 좋으니, 구차해도 좋으니, 외로워도 좋으니

기쁨이든, 슬픔이든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든, 모두 다 벗인 양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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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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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끝내주게 재미있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키득거리고 있다. 그런데 그 웃음 소리 가운데 눈물이 계속 흘러내린다.

일본 소설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소설 자체를 거의 읽지 않는데, 감기씨가 은근과 끈기의 성정으로 내 몸에 두 주간이나 들러붙는 바람에 정말 빠져들어 읽을거리가 필요했다.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집에만 들어박혀야 하는 일요일 하루를 위해 산 책이다. 사면서도 실패하지 않을거란 자신은 있었지만 이건 정말 기대이상의 즐거움이다.

간만에 색다른 책읽기의 매력에 함빡 젖어 기분이 너무도 즐거워졌다.

어떻게 보면 흘러간 운동권들의 극단적 반사회의식을 재료로 적당히 웃음거리를 만들어놓은 다른 소설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보이는데 이 책에서 느낀 호감의 정체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시대의 감성을 소설의 바닥에 깔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의 대책없는 말도, 어머니의 우유부단한 모습도, 중학생의 꼬봉 노릇을 하는 친구도, 국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찰과 공무원도 모두 다 나름의 존재 이유와 방식을 인정하는 작가의 시선 때문에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누구보다 극단적 대립 속에 놓여있는데도 그다지 비인간적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국가와 정부가 공공의 선이라고 믿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듯이 아버지의 말대로 정부 따위야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도 삶의 방식이 있는 거다. 

또 하나, 이 책의 매력은 바로 동시대의 코드를 즐길 수 있다는 거다. 고전 작품들이 진한 감동을 주는 이유가 그 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삶의 진리를 훑고 있기 때문이라면, 동시대 작가의 작품들에서 느끼는 감동은 바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일한 감성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단연 첫 손가락이 아니겠는가.

일본의 좌익 학생운동과 한국의 80년대 학생운동은 어딘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물론 더 자세히 들어가다 보면 이질적인 부분이 훨씬 많지만. 하지만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현시욕과 특권의식 따위를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이 느낀다. 그런 것을 느끼는 순간에는 가끔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두 짝이 결국 색깔만 다를 뿐 구성방식이나 구성원들의 사유방식이 너무도 비슷해서 적당한 균형을 이룬다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근데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 있나? 어차피 그런 것도 사회를 구성하고 굴리는 한 부분인데... 그게 뭐 꼭 나쁘게만 해석될 필요있나?

작가가 재치있게 그런 속성들을 콕콕 찝어내는 것 같아서 시종일관 키득키득... 그러면서도 그들을 비난하는 투나 힐난하는 투가 아니어서 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일요일 오후에 읽기에 참 어울리는 소설이다. 결코 가벼워서가 아니라, 세상살이 어차피 무거운데 '무겁지, 무겁지?' 하면서 우울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둘러봐, 저 놈 짐도 무겁고, 저 놈 짐은 너보다 더 무겁네. 어때 네 인생도 살만하지?'하는 조금은 야비한 위로를 건네는 그런 말투 같아서.

근데 그 위로가 어째 너무도 혹해서 나도 남쪽 섬으로 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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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데니스 도에 타마클로에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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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는 참말로 내가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책이었다.

막연한 미지의 땅이던 그 곳에 사람들이 살았다. 너무도 당연한 그 사실이 왜 이리 낯설게 느껴졌을까?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분노, 그들의 행복, 그들의 절망... 그것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면서  처음 접하는 아프리카 역사에서 전율을  경험했다.

시종일관 담담하게 그 곳에 살았던, 살고 있는, 살아갈 사람들의 목소리를 옮기는 지은이는 아마 이런 나의 전율을 예상했을 게다. 그래서 자신이 미리 맛본 그 감정을 우리에게 다시 느낄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잣대로 함부로 잴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그 고귀한 꿈이 아프리카의 역사를 읽고 나니 온 몸으로 전해온다.

부디 그들이 이 책에서 '상상한' 그 과거의 역사 속에서 '기억할' 미래를 만들어 내기를. 그래서 언젠가는 그 미래가 현실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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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0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 읽어봐야겠어요. 딸한테도 권하고..
담아갑니다.^^

산딸나무 2007-03-0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가르치는 고등학생들에게 권했어요.
'표지 짱 예쁘제?' 하면서... ^^
 

 설 연휴 마지막 날, 같이 밴드를 하는 친구들과 술을 한잔 하는 자리가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나이 얘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설 쇠었고, 떡국 한 그릇 먹었으니 이제 몇 살이지?’ 하면서 서로 나이를 셈하고 있는데 가장 나이 어린 친구가 새해 들어 스물여덟이란다.

 삼십대 후반인 나와 사십대를 막 접어 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일제히

 “와, 좋은 나이네.”

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스물여덟. 정말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끔 만드는 아름다운 나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맹랑한 친구가 태연하게 받아치는 말이

 “서른일곱도 좋은 나이에요.”

 

 그래, 올해 내 나이 서른일곱이다. 근데 그 친구의 말은 나이 많은 선배에게 예의상 던지는 답일 테지만, 사실 나는 그 표현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내 나이를 그저 ‘좋은’이란 수식어로 꾸밀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더할 수 없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서른일곱을 사랑한다.

 내 판단에 스물여덟은 ‘좋은 나이’일 수 있지만 서른일곱은 ‘사랑해야 하는 나이’이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 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 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 황지우 ‘뼈아픈 후회’ 가운데

 

 황지우 시인이 몇 살에 이 시를 썼나,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삼십 대에 접어든 뒤부터 한 살씩 더 먹으면 늘 이 시가 떠오른다. 내가 떡국 한 그릇 먹으며 나이 한 살 더하는 것은 결국 나를 사랑했기에 그 가슴에 사막을 떠안아야 했던 사람들의 덕이다. 나로 인해 가슴 한 구석 무너져 내린 사람들, 내 에고로 인해 마른 바람에 신음해야 했던 사람들……. 그들 덕에 나는 오늘 또 이렇게 나이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빈말이라도 “그 나이만큼 안 보이세요.”하면 나는 뜨끔해진다. 어려보이는 껍데기에 열광하는 세상에서 칭찬이랍시고 건넨 그 말은 나를 아프게 한다. 혹시 나도 ‘나이 먹음’이 단순히 생물학적 노화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부류였던가? 그게 기쁜 말일 수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 감히 그게 어떤 값을 치르고 얻은 나인데 그걸 깎아 먹는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감당해 준 찢기고 무너지는 아픔의 대가. 어떻게 감히 그 상흔들을  욕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게 속한 것이지만 내 몫이 아닌 것. 나이란 결국 그런 것 아닌가.


 이상하게도 진행 중인 사랑은 상처 입은 밤으로 기억되지만, 지나 간 사랑은 내가 입힌 상처들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상처 덕에 그 사랑은 지워지지 않고 내 삶의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십대의 방황을 가슴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내신 내 어머니, 이십대의 열정을 함께 울어준 친구들, 그리고 모진 내 에고로 인해 그 누구보다 뜨거운 사막을 견뎌냈을 내 첫사랑, 삼십대 접어들어서도 여전한 내 독단과 과욕으로 인해 피 흘렸을 동료들, 그 모두를 떠올리는 게 내가 더해가는 나이를 내게 새기는 방식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누군가의 나이 듦 역시, 내 가슴의 한 구석을 폐허로 만들면서 진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내 사랑이 그 가슴에 사막을 만들기도 했지만 또한 오아시스를 만들기도 했다는 것. 그런 위안마저 없다면 서른일곱 이 나이가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사랑스런 서른일곱 내 나이, 올해도 나이 값 잘 하며 살고 싶다.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번듯한 직장을 잡고……. 그런 나이 셈이 아니라 정말 다른 이의 상처를 볼 줄 아는 나이 값을 하고 싶다.

 내 나이의 값을 치른 것은 내가 아니니. 그 셈을 기꺼이 감당해 준 것은 나를 더 많이 사랑했던, 그래서 더 많이 상처받았던 바로 그들이란 걸 기억하면서.


 새해, 떡국 한 그릇 먹으면서 내 나이 듦을 위해 기꺼이 가슴 속에 사막을 내어 그 길을 가로질러 건너 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덕분에 또 이렇게 한살 잘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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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2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오늘아침 정말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열게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아침 좀 우울해서 이 나이 먹도록 왜 이러나 싶었거든요^^
나이값, 다른 이들의 가슴에 사막을 떠안기고 먹었네요, 저도요^^
덕분에 저도 한 살을 의미있게 먹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산딸나무 2007-02-2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올린 글에 이렇게 빨리 얘기를 덧붙여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혜경님의 올 해가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한 해 되시길 빌어요.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 파일
한학수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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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황우석 사태가 터졌을 때,  난 세상과 엇나가는 내 상식에 생애 처음 느끼는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황우석 선생의 연구가 온 나라를 흥분시키고 있을 때, 나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난자 채취의 위험에 대해서, 생명공학연구의 윤리법에 대해서, 성체줄기세포연구등 조명받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 여성의 인권을 팔아 장애인의 희망을 살 수 있다는 이 미친 논리에 대해서  부담없이 말을 던졌다. 부담없이 말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게 모두에게 당연한 상식이라고 아무 의심없이 믿었기 때문이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그의 말에 '저거 미친 놈 아냐?'라고 첫마디를 내뱉았다. 일본의 군국주의, 독일의 나치즘이 다시 과학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걸 보면서 '저 사람은 손재주는 능할지 모르지만 사유의 능력을 빵점이구나.' 싶었다. 손재주도 없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랬다. 나는 그의 말 하나하나가 좀 우스웠고, 어설펐기에 언론의 일방적 찬사가 좀 역겨운 정도였다. 그래서, 피디수첩 방송을 전후로 해서 난자채취 과정의 비윤리성이 드러나면서 나는 '저 분위기 파악 못하는 인간이 역시 사고 치는구나.' 정도의 감정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 난 다음날, 피디수첩이 돌을 맞고, 온 국민이 담당 피디들을 매국노라며 분노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아연실색... 나는 정말 할말을 잃었다. 분위기 파악 못한 건 황선생이 아닌 바로 나였던 거다. 사람들에게 이 사태에 대해서 말을 걸기가 겁이 났다. 설득 불가능! 도대체 내가 어디 다른 세상에 살다 온 거 아닌가? 아니면 우리집만 빼놓고 수돗물에 약 탔나?

  내 상식이 모두의 상식일 거라고 겁없이 깐죽대다가 완전히 박살난 기분! 그건 진실이 무엇이고 간에 다수의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는 사고를 가진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뒤 여러가지 해석들을 갖다 대면서 국민들의 정서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지금도 2% 부족 상태이다. 

  물론 황 선생과 맞장 뜬 담당 기자들의 가슴조림에 갖다 대지도 못할 충격이지만 내 삶에서는 가장 섬뜩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이렇게 다시 책으로 보면서 온갖 희비가 교차했다. 제보자와 양심적 과학자들, 학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 그리고 진실을 찾는 참언론인의 모습이 주는 감동에 온 몸이 떨렸다. 또,  온갖 인간군상들이 자기에게 조금 더 이익이 되는 길을 찾으려고 머리 굴리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모습 모두가 날 것 그대로 인간이려니 싶었다.

  무지는 독이다. 하지만 독은 때로 치료약이 될 수도 있다. 황선생의 희대사기극에 놀아난 우리의 무지는 독이기도 하지만 이 독은 한국사회에 큰 약으로 작용하리라 믿는다. 그 독이 나에게도 크나큰 치료약이 되었듯이. 지식이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는 오만. 내가 옳기 때문에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오만, 한국 사회의 진보가 그래도 꽤 쓸만해서 조선일보가 써내는 소설같은 기사들에 속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오만... 나의 이런 오만이 다수의 정서에서 나를 너무도 멀리 떨어트려 놓은 게 아니었던가.

  다수가 옳다는 게 아니라, 다수의 정서를 읽고, 그 정서의 근원을 공감하지 못한다면 소수의 생각은 영원히 소수일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이다. 

  끝으로 나에게 그 큰 깨달음을 주기 위해 일상의 행복을 기꺼이 희생한 제보자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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