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리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통통 칼질을 하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의 간을 맞추는 남자의 뒷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하루는 친구들과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의 남성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요리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럼 요리사랑 사귀면 되겠네.” 한다.

 “아니, 직업적으로 요리하는 사람 말고…….”

 “그럼 취미가 요리인 남자?”

 “웬 취미? 그냥 삼시 세끼 제 밥을 제 손으로 차려먹는 남자.”

 내 대답에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 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연인들끼리 음식을 해서 상대를 초대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자신이 한 요리를 연인에게 대접하는 자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꽤나 로맨틱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게 하나 있다. 여자들이 차린 밥상은 주로 밥과 된장찌개가 기본이 되는 일상적 요리들이다. 늦잠을 잔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서면 여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밥을 퍼고, 된장찌개 뚜껑을 연다. 그녀가 어떤 성격과, 직업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든 그녀는 일상을 요리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그러나 남자들이 하는 요리는 우리가 집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다. 특별한 날, 비싼 돈을 주고 먹는 음식들, 음식의 맛 보다는 분위기를 먹는 그런 음식들이 등장한다. 스파게티, 스테이크 따위에 와인, 촛불……. 거기에 꽃을 안겨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남자들의 요리는 일상이 없다. 그들의 요리에는 늘 이벤트의 냄새가 난다.




 여자들의 요리는 일상, 남자들의 요리는 이벤트……. 아마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이런 공식들이 자리 잡고 있나 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그의 요리에서 일상의 냄새가 나는 남자다. 적어도 자기 밥상은 자기가 차릴 줄 아는 남자, 일상적으로 먹는 하루 세 끼의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남자, 일터에서 자기가 직접 싼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들러서 장을 보고, 가끔 연인이나 친구를 초대한 날엔 ‘오늘은 동태찌개를 끓여볼까?’ 하는 생각을 할 줄 아는 남자. 나는 그런 남자를 사랑한다.

 

 제 밥, 제 손으로 챙겨먹을 줄 모르는 사람은 평생을 남의 노동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렇기에 요리하는 일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자립노동이 아닌가. 그런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그 즐거운 자립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소외라는 의식조차 하지 못 하고 자라왔다. 평생을 제 밥상 한 번 차려보지 못한 인생이 더 근사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남자들의 뇌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내 눈엔 그런 남자들은 제 아무리 돈 잘 벌어도, 제 아무리 근사한 몸을 가져도, 제 아무리 지적이어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가끔 우스개 소리로 ‘제 밥 제 손으로 차릴 줄 모르는 남자의 말과 글은 믿음이 안 간다.’고 한다. 제 입으로 들어가는 밥을 평생 남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주제에 인간을, 정의를, 평화를 얘기하는 남자들은 좀 우스워 보인다.  




 나는 요리를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요리하는 일이 참으로 소중한 노동이란 가치관을 지닌 남자를 좋아한다. 그 가치관을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도, 남성다움도, 몇 푼의 월급도 무시할 줄 아는 남자를 좋아한다.

 혹시 주위에 그런 비혼 남성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이왕이면 시금치 무침과 된장찌개, 고기 넣지 않은 잡채를 맛있게 잘하는 남자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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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08-2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딸나무님 안녕하세요~ 우리 처음 뵙죠? 페이퍼를 한꺼번에 올리시니까 너무 좋잖아요.^^ 저도 요리 잘하는 남자 좋아해요. 저도(또?) 이벤트성 짙은 것보단 이렇게 동태찌개 한번 끓여봐하는 분들이 더 좋구요. 그러고보니 좀 허기지는데요~

산딸나무 2008-08-2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니에님 반갑습니다.
게으름을 이기고 오랜만에 글 올리니까 이렇게 또 새로운 인연을 뵙네요.
님의 서재에 잠깐 가봤어요.
아, 초록의 대나무들... 너무 멋있었답니다.
눈과 귀가 시원해지네요.

비로그인 2008-08-2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이벤트성의 세가지 요리를 할줄 압니다.
김밥, 햄 볶음밥, 스테이크. 하하
아이들이 좋아하지요.

오랜만입니다. 산딸나무님.
저는 쉬는 중이랍니다. 반가워요..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8-08-2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휴가 때 강진 해남을 지나쳐왔는데
그때 한사님 생각이 잠깐 났어요.
 

 

  언제부터인가 나를 보고 애국자가 아니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역질이 나도록 싫어하는 나로서는 애국자라는 말이 오히려 모욕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 까닭을 듣고 보니 너무 어이가 없다. 

 그들은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았으니 애국자가 아니란다. 출산율이 바닥을 기고 있는 이 시대에 아이를 쑥쑥 낳아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는 게 국민 된 자의 도리인데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여자라서 그렇단다.




 비혼주의자로 살면서 온갖 편견들을 만나봤다. 살림이라곤 손도 까닥할 줄 모른다, 똑똑한 척하면서 제 잘난 맛에 산다, 남자한테 모질게 차인 기억이 있을지도…….

 그런데 이제는 결혼 안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애국자가 아니라니. (정말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보는군.) 처음엔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야길 진지하게 강론하는 사람들을 몇몇 만나고 나니 억울해서라도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육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은 우리 어머니를 종종 할머니로 착각하기도 했다. 어머니로 봐서는 자식 여섯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내 또래 친구들은 70년대 태어난 세대이다 보니 자매, 형제들이 둘, 많아봤자 셋인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새 학년이 시작되면 늘 가정환경을 조사하는 시간이 있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던 그 무식한 인권유린에 마음을 다치지 않은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주 몇 회 섹스를 하는지 묻는 것 보다 더 낯 뜨거운 폭력이었음에도 당시는 선생님이 묻는 대로 순순히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부모님이 두 분 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보신 것도, 집에 냉장고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바로 자매, 형제의 수를 묻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자매, 형제가 하나인 사람, 둘인 사람, 셋인 사람까지 묻고는 “손 안 든 사람?”하고 덧붙였다. 그러면 보통 서넛 정도 손을 드는데, 넷이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있으면 아이들은 모두 “우와!” 하며 놀란다. 그런데 내가 “여섯이요.” 하면 반 전체가 술렁인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학교 곳곳을 장식하던 시절이었으니, 아이들의 놀람이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되고, 하루 종일 부끄러워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 아이를 많이 낳는 여자는 무식하고, 교양 없는 여자였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국가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그런 반애국적인 여자가 바로 내 어머니였던 것이다.

   

 아이를 많이 낳았다는 까닭으로 내 어머니와 내가 당했던 정신적 수모가 아직도 생생한데, 그 국가가 이젠 아이를 낳지 않는 나를 보고 교양 없고 이기적인 여자 취급을 한다.

 국가는 늘 여성들의 삶을 그렇게 통제해왔다. 전쟁이 일어나서 남자가 모자라면 일터에서 일하는 씩씩한 어머니를 극찬하며 바깥으로 내몰고, 남자들의 일자리가 모자라면 조신한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떠받들어 올려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게 마치 여성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란 듯 꾸미면서.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결혼, 모범적 가정, 성실한 직장인의 모습은 어쩌면 국가와 자본이 만들어낸 매트릭스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만들어진 행복에 내 삶을 끼워 맞추며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가슴으로 꿈꾸는 일이다. 모범 답안의 행복을 거부하고 내 오감으로 체험하는 행복을 찾아서 떠나는 길, 그 길에서 찾은 삶만이 진짜 삶이다. 그것이 결혼이든, 독신이든, 아이 열을 낳아 키우는 삶이든, 낳지 않고 사는 삶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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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지금보다 더 집중했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 삶에 간섭하거나 부러워하거나 질시하거나 하기에는..
시간이 너머 아깝지요.
시간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암만해도 개인주의자인 모양입니다. 하하



산딸나무 2008-08-2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주의자는 타인을 존중할 줄 알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사님은 개인주의자가 맞을 것 같은데요^^
 

  

 결혼해서 아이를 하나 낳고 무던히 살아가는 언니가 있다. 그이가 요즘 남편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한다. 남편이 일이 너무 많아서 늘 늦게 들어온단다. 그래서 책 한 권 읽을 시간도, 자신과 대화할 시간도, 아이랑 놀아줄 시간도 없이 찌들려 산단다. 술을 마시고 늦느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절대적으로 일이 많은 직업과 너무 성실한 근무태도가 늦은 퇴근의 원인이란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그게 뭐가 문제냐?,며 나만 마음을 다스리면 된대요. 대한민국 남자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근데요, 정옥씨. 나는 정말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돈을 많이 벌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줬으면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 사람과 손잡고 걸어보고 싶어요. 같은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남편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냐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란다.

 “남편도 행복하지 않다고 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일 그만 두면 뭐 먹고 살 거냐고, 그렇게 묻는데 정말 할 말이 없데요. 내가 잘못된 걸까요? 인생이란 다 이런 건데 내가 뭘 모르고 철없이 하는 생각일까요?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삶이 너무 싫어요. 이렇게는 하루도 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늘 씩씩하고 당차서 여린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 언니가 말을 쏟아내면서 결국은 눈물을 보인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는 그만의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똘똘하고 귀여운 후배 하나는 늘 웃으면서 ‘데리고 자지도 않을 남자랑 왜 만나냐?’고 한다. 어떤 선배는 ‘돈도 안 벌어다 주는 남자랑 왜 사냐?’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나름대로 만나는 남자의 기준이 있다. 나는 편지 쓸 때 맞춤법이 틀리는 남자, 내가 사용하는 단어를 부연 설명해 줘야 할 만큼 책을 읽지 않는 남자는 안 만난다. 맞춤법이 틀리는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원고 교정볼 때처럼 머리가 아프다. 내 사유를 신나게 얘기하고 있는데 못 알아듣는 눈치면 강의하는 기분이 들어서 딱 질색이다. ‘글과 말이 안 통하는 남자를 왜 사귀냐? 시간낭비다.’고 생각하는 내가 남자를 만나는 까닭은 내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생활공동체를 이룰 필요가 없는 나의 만남도 이렇게 합당한 까닭이 있는데, 부부가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면 적어도 같이 살아야 할 까닭은 충족시켜 줘야 하지 않을까?. 결혼은 ‘함께 손을 잡고 걸으며 대화하는 남자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와, 결혼은 ‘아이와 아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당장 헤어지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누구 말대로 결혼이 장난이냐?




 살다보면 이렇게 참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을 종종 만난다. 삶이 나를 속일 때…….

 그럴 땐 일단 엉엉 울고 보자. 삶이 나를 속이는 데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웃기는 소리. 삶이 배신 땡기는 날에는 죽도록 울어야 한다. 억울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한없이 분노하고, 절망하며 통곡하는 울음. 그런 울음을 울고 난 다음에야 문제를 해결할 기운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사니까 너만 마음 고쳐먹고 참으라고? 바보 같은 조언이다. 그렇게 삶이 저지르는 배신을 참고 살아가는 그들이 문제이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혹 그들이 그렇게 살아서 진짜 다 행복하다고 치자. 그러나 그 방식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이 세상의 보편적 삶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렇게 행복해질 기회를 무시하며 문제를 덮고, 덮고 하다 보면 어느새 좋은 인생은 다 가버린다.




 문제가 생기는 건 문제가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혹은 인식하면서도 덮어둘 때이다. 문제를, 그로 인해서 생기는 절망을 두려워하지 말자. 절망은 새로운 희망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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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과 손잡고 걸어보고 싶어요.'
자연스러운 소망입니다. 남편이거나 아빠라면 그렇게하지요.
의무감이아닌 순전히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서요.
일때문에 아내의 손을 잡아주지 못하거나, 아이와 놀지 못한다면
일할 필요가 없지요.
저는 일이라는 것이 놀기 위해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은 일, 집은 집..
일보다야 아이들과 노는 것이 백배쯤 재미있지요. 하하

'편지 쓸 때 맞춤법이 틀리는 사람'
저도 안 친합니다. 역시 대화가 힙들겠지요.
하하. 공감합니다.


산딸나무 2008-08-29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그 이야기를 하고 나니
친구들이 저한테 메일이나 편지를 잘 안 쓰는 후유증이 좀 있어요.
 
아빠 가려워 - 들이 아빠의 아토피 육아기
김충희 지음 / 청년사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일상’이란 말에는 무의미함과 나른함이 공존한다. ‘삶을 살아간다.’는 말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말에 더 가까운 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 삶이 잠겨서 떠가는 듯한 느낌……. 그러나 예술가는 그 일상 속에서 새로운 시간을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고, 감동을 길어 올린다.




 만화 가운데도 그러한 작품들이 많다. 연인들의 ‘뻔하고도 뻔한’ 만남과 헤어짐, 청소년기 아이들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하루하루,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들,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들……. 살아가면서 누구나가 한 번쯤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그 일상 속에서 그들은 자기만의 세상과 철학을 발견한다.




 ‘들이 아빠의 아토피 육아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아빠, 가려워’는 아토피를 앓고 있는 딸을 키우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책을 여는 순간,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특히 아토피를 가진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모두가 자기 이야기라고 무릎을 치며 공감했을 일상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엄마, 아빠에게 늘 ‘가여워.(가려워)’란 말을 달고 사는 딸아이는 처음엔 그냥 예쁜 ‘내 새끼’였다. 그러나 부모는 그 아이를 통해서, 그 아이의 병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그 세상엔 병과 싸우는 다른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있고, 병들어가는 환경이 있고,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이 부른 재앙들이 있다.




 환경파괴가 가져온 재앙은 가장 무자비한 폭력이다. 그 폭력이 무차별적으로 모든 생명체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 이미 그러하지만, 더 지독한 진실은 그 폭력이 가장 어리고, 가장 여린 생명체를 먼저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말이 그 진실을 고스란히 옮겨낸다.




 “나에게 아토피는 지구의 피부입니다. 세계의 많은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고 소외된 인간 삶의 존엄성과 자연을 복원하라는 준엄한 채찍질입니다. 우주에 맞닿은 아이들의 피부에 이러한 교훈이 고스란히 닿아 있습니다. 사람과 지구는 함께 가렵습니다.”   




 ‘예술이 세상을 바꾸는 무기’라는 말에 거친 이미지의 그림과 교훈조의 건전가요들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당신이 이 만화책을 덮으며 만나는 세상과 진실에 눈 돌리지 않는다면 그 말은 여전히 당신에게서부터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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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토피는 체질성 질환이므로..
외부 환경에 악화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근본 원인은 환자 자신의 내부(자가면역질환)에 있습니다.
환경 탓만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공기 맑은 땅끝에도 역시 아토피 환자는 존재한답니다.

아토피와 지구환경의 연계.. 다소 과한 논리전개인가 합니다.


산딸나무 2008-08-26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토피 환자가 늘고 있는 것에 대한 좀 더 근본적 해석이 아닐까 싶은데요...
 
기생수 애장판 1~8(완결) 세트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이 100분의 1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100분의 1이 될까?’

 누군가 문득 생각했다.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기생수(奇生獸)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도 그 누군가가 되어서 생각해보자. 오랜 고민 없이도 쉽게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인간이란 종적 유대감만 없다면,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제거해야할 첫 번째 적은 바로 인간이 아닐까?




 이와아키 히토시는 그 답에서 이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다. 인간만 없다면 지구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생명답게 나고 죽을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지구를 위해 인간을 죽이는 유전적 본능을 지닌 생명체가 없으리란 법도 없지 않겠나.

 그러나 앞뒤가 딱 맞아 들어가는 이 전개에서 정작 인간들만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종이 자신들에게 품고 있는 적의(더 정확하게 말하면 ‘적의’라기 보다는 생명으로서 마땅한 유전적 본능)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무언의 답은 ‘너희들은 언제 자연을 유린하는데 까닭을 붙였던가.’이다. 까닭 없이 무감각하게 자행되는 폭력 앞에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는 순간, 인간들은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지, 생명이란 무엇인지 사유하기 시작한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만만치 않은 답은 읽는 이의 몫이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도 넓은 의미의 생명이고, 자연이라는 실마리를 남겨둔다. 다윈의 진화론을 긍정하는 사람들과, 부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회의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식으로 해석 가능한 결론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책을 덮고 나면, 인간이란 생물을 이 땅에 이토록 번성하게 한 ‘인간다움’이란 유전자에 확대경을 바짝 들이미는 작가의 능력에 절로 탄복하게 된다. 이 작품이 일본에 연재되기 시작한 해가 1989년이니, 얼추 20여 년 묵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세월의 흔적이 없다. 예리하고 번득이는 철학은 갓 길어 올린 물처럼 차갑고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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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수..
애니메이션으로 봤는데 저에게는 좀 징그럽던데요. 하하

산딸나무 2008-08-2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에니메이션은 못 봤는데...
만화책도 장난 아니게 끔찍한 장면들이 많아요.
그래도 워낙에 그런 만화에 익숙하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