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서 아이를 하나 낳고 무던히 살아가는 언니가 있다. 그이가 요즘 남편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한다. 남편이 일이 너무 많아서 늘 늦게 들어온단다. 그래서 책 한 권 읽을 시간도, 자신과 대화할 시간도, 아이랑 놀아줄 시간도 없이 찌들려 산단다. 술을 마시고 늦느냐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절대적으로 일이 많은 직업과 너무 성실한 근무태도가 늦은 퇴근의 원인이란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그게 뭐가 문제냐?,며 나만 마음을 다스리면 된대요. 대한민국 남자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요. 근데요, 정옥씨. 나는 정말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돈을 많이 벌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줬으면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 사람과 손잡고 걸어보고 싶어요. 같은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남편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냐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란다.
“남편도 행복하지 않다고 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일 그만 두면 뭐 먹고 살 거냐고, 그렇게 묻는데 정말 할 말이 없데요. 내가 잘못된 걸까요? 인생이란 다 이런 건데 내가 뭘 모르고 철없이 하는 생각일까요?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삶이 너무 싫어요. 이렇게는 하루도 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늘 씩씩하고 당차서 여린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 언니가 말을 쏟아내면서 결국은 눈물을 보인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는 그만의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똘똘하고 귀여운 후배 하나는 늘 웃으면서 ‘데리고 자지도 않을 남자랑 왜 만나냐?’고 한다. 어떤 선배는 ‘돈도 안 벌어다 주는 남자랑 왜 사냐?’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나름대로 만나는 남자의 기준이 있다. 나는 편지 쓸 때 맞춤법이 틀리는 남자, 내가 사용하는 단어를 부연 설명해 줘야 할 만큼 책을 읽지 않는 남자는 안 만난다. 맞춤법이 틀리는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원고 교정볼 때처럼 머리가 아프다. 내 사유를 신나게 얘기하고 있는데 못 알아듣는 눈치면 강의하는 기분이 들어서 딱 질색이다. ‘글과 말이 안 통하는 남자를 왜 사귀냐? 시간낭비다.’고 생각하는 내가 남자를 만나는 까닭은 내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이다.
생활공동체를 이룰 필요가 없는 나의 만남도 이렇게 합당한 까닭이 있는데, 부부가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면 적어도 같이 살아야 할 까닭은 충족시켜 줘야 하지 않을까?. 결혼은 ‘함께 손을 잡고 걸으며 대화하는 남자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와, 결혼은 ‘아이와 아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함께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당장 헤어지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누구 말대로 결혼이 장난이냐?
살다보면 이렇게 참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을 종종 만난다. 삶이 나를 속일 때…….
그럴 땐 일단 엉엉 울고 보자. 삶이 나를 속이는 데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웃기는 소리. 삶이 배신 땡기는 날에는 죽도록 울어야 한다. 억울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한없이 분노하고, 절망하며 통곡하는 울음. 그런 울음을 울고 난 다음에야 문제를 해결할 기운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사니까 너만 마음 고쳐먹고 참으라고? 바보 같은 조언이다. 그렇게 삶이 저지르는 배신을 참고 살아가는 그들이 문제이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혹 그들이 그렇게 살아서 진짜 다 행복하다고 치자. 그러나 그 방식에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이 세상의 보편적 삶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렇게 행복해질 기회를 무시하며 문제를 덮고, 덮고 하다 보면 어느새 좋은 인생은 다 가버린다.
문제가 생기는 건 문제가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혹은 인식하면서도 덮어둘 때이다. 문제를, 그로 인해서 생기는 절망을 두려워하지 말자. 절망은 새로운 희망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