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 간다. 

 자연은 오월을 흐드러진 연두 빛으로 채웠다. 눈길 닿는 곳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이토록 아름다운 오월을 유달리 피곤하게 보낸 사람들이 있으니…….




 이혼을 하고 딸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이혼하기까지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쳤음에도 그는 이혼을 늘 자기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자부한다.

 남편과 함께 살 때는 딸아이에게 ‘엄마처럼 살지 마.’라고 했는데, 지금은 ‘네가 나만큼만 살아내면 좋겠다.’고 얘기한단다. 예전엔 자식이 자기 인생의 ‘희망’이었지만, 지금은 자기 인생의 희망은 자기 자신이고 자식은 단지 ‘기쁨’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남들이 다 하니까 하는 결혼에는 별다른 철학이 필요 없었지만, 남들이 잘 안 하는 이혼을 선택하기에는 철학이 필요하더라고, 그래서 철학을 가지고 살아내는 지금의 삶이 갑절이나 더 행복하다고 하는 그는 정말 멋진 사람이다.

 가끔은 초등학생인 딸과 싸워서 삐치기도 하고, 때로는 밥벌이의 팍팍함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늘 씩씩하게 웃으며 살아간다. 

 

 또 한 친구는 나이 어린 애인과 알콩달콩 동거를 하고 있다. 결혼은 하기 싫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단다. ‘일단 살아보고’가 아니라, ‘평생 이렇게’를 합의한 두 사람에게 그 가정은 결혼식이나, 혼인신고가 대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신뢰가 뒷받침되어 있다. 두 사람은 꽤 잘 어울리는 평생연인이다.




 동갑내기 남편과 아이 없이 딩크족으로 살아가는 친구도 있다. 아이가 가정을 이루는 필수조건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그는 자기 부부는 ‘아이가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이가 없어서 행복한 사람들’이란다. 자신들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해서 현명한 선택을 한 그들의 가정에는 아이의 웃음 대신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늘 집안을 채운다.




 그런데 아이와, 애인과, 남편과 더불어 각자가 꾸민 가정에서 잘 살고 있는 그들은 5월 한 달을 참으로 피곤하게 보냈다. 왜냐하면, 역설적이게도 오월이 바로 ‘가정의 달’이기 때문이다.

 오월 내내, ‘가정의 달’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정상적 가정’이라는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불행’으로 감염시켰다. 겉으로 보기에 조금이라도 불량한 껍데기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이 즈음 특히 기승을 부리는 이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다. 독신가정의 가장이자 주부로 혼자 ‘룰루 랄라’ 신나게 살고 있는 나에게도 이 바이러스는 치명적이었다. 내  껍데기도 불량하기로 치자면 내 친구들과 어금버금하기 때문이다.




 ‘가정의 달’ 오월을 바이러스와 싸우며 피곤하게 보내고 나니, 좀 억울하다.

 도대체 정상적인 가정이 무엇이기에? 가정이란 것이 개인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라면 그 껍데기야 어떻든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 사회는 껍데기만 잘 갖추어지면 그 구성원들이 아무리 불행하게 살아도 ‘정상적’이란 딱지를 버젓이 붙여준다. 가정폭력과, 근친 성폭행, 노인학대 등이 오랫동안 묻혀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정상적 가정’이란 딱지를 떼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제 제발 껍데기에 집착하지 말자. 행복할 수만 있다면 껍데기 따위야 아무려면 어떤가. ‘평범하고 정상적’이란 그 딱지가 과연 내 행복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더 늦기 전에 한번 생각해 보자. 자칫하다간 껍데기 보수공사에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으니.




 드디어 5월이 간다. 속이 다 시원하다. 오늘 저녁엔 기념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 껍데기는 불량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멋지게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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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26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알라딘으로 돌아와야 겠어요.. 산딸나무님.
나말고는 댓글 올려주는 사람이 없군요.. 하하

저는 또 쉬어야 합니다.
안녕히.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8-08-2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덕분에 늘 무플을 면하지요.
고마워요.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상대를 봐 가며 눈치껏 대답한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만나면 ‘아이고, 제가 아직 좋은 사람이 없어서 결혼을 못했습니다.’라고 둘러대고,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친구들을 만나면 ‘여자들한테는 결혼이 좀 차별적이잖아요. 가부장적 문화도 그렇고, 육아 문제도 그렇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친밀한 사이라면 ‘비혼주의자’라고 솔직하게 얘기를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은 독신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꼭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을 ‘비혼주의자’라고 하진 않는다. 내가 스스로를 ‘비혼주의자’라 부르는 까닭은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내 삶의 방식이 오랜 사유 끝에 행한 적극적 선택이고,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나만의 철학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스물여섯 겨울 즈음, 결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혼이란 게 과연 어떤 장단점을 가진 제도인지, 과연 그 제도가 내 삶에 꼭 필요한 것인지, 그 제도를 선택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지……. 성과 사랑의 본질, 가족의 역사, 결혼 제도의 성립 과정 등에 관한 책을 읽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의 체험담을 듣기도 하며 내 성향과 기질을 분석했다. 그 결과, 스물일곱 겨울에 독신을 선택하고 ‘비혼주의자’임을 선언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기막혀 하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결혼이란 게 나이 차고 좋은 사람 생기면 하는 거지, 애인도 없으면서 그걸 미리 선택 하냐고……. 쓸 데 없는 말을 지껄인다고 언짢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 어려 뭘 몰라서 하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라고 깔보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은 ‘본성’이 아니라 ‘제도’이다. 다수의 인간들이 결혼을 선택한 것은 그 제도가 삶을 영위하는 데 상당 부분 유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약한 사회안전망을 대체하기도 하고, 경제적 불안을 완화해주기도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데도 이점이 있다. 그 뿐인가? 사랑을 매개로 하면 일정 기간까지는 존재적 외로움까지도 덜어주니 이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일지라도 그 제도가 모두에게, 모든 점에서 다 유용한 것은 아니어서 한계도 분명하다.




 결혼이 가지는 치명적 한계는 바로 사랑과 성의 자율적 선택권을 포기해야하는 것이다. 쉬운 말로 바람피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결혼제도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일이 되고 만다. 제도의 한계란 그런 것이다.

 

 비혼주의자로 살면 적어도 그런 한계에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내 평생 사랑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배우자의 조건 따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내 자유 의지를 억압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현실의 삶은 자유 의지만으로 살 수 없단 것을, 제도 내에서 매 순간 타협할 수밖에 없단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는 사람에 대해서만은, 사랑에 대해서만은, 성에 대해서만은 제도적 타협을 용납하기 싫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친구들은 ‘사랑이 밥 먹여 주냐?’며 정신 차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밥’과 무관하다.

 그러나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라 했던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사랑, 바로 그 무용한 사랑이기에 내게는 가장 유용한 가치가 될 수 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오롯이 ‘사람’이어도 되는 삶, 사랑할 자유는 있으되, 사랑해야 하는 의무는 없는 삶, 성실한 노력만이 사랑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인 삶. 비혼주의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끝으로, 이 글을 읽고 비혼주의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얼마나 많은 사랑을 해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라. 배우자의 조건으로 마땅한 학벌, 재산, 직업 따위 다 걷어내고 오로지 자신의 실존만으로 빛나는 남자가 몇이나 눈에 띄는지. 그대의 눈에 보이는 현실이 바로 내 현실이란 말이 답이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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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초롱 2008-04-2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이란, 모든 세상이 나를 버리고 난 후,내 인생의 사막에서 피어나는 한 포기 풀 같은 존재이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순간 인간은 강해지며,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인간은 용기를 얻고,늙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에 늙는 것이라고 합니다.

산딸나무님은 비혼주의자 개념보다 자기만의 삶을 살줄알고, 이 시대에 거의 멸종위기의 몇안되는 순수 로맨티시스트는 아닐런지....

산딸나무 2008-04-28 13:23   좋아요 0 | URL
금강초롱님, 저는 비혼주의자입니다.
자기만의 삶을 살 줄도 알고,
순수한 로맨시스트이기도 하지만
제가 선택한 비혼주의자라는 개념이
그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8-04-2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다는 것이 '일회성'이므로,
갈림 길에서 늘 선택을 해야만 하더군요.
어떨 때는 양쪽을 다해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선택을 유보하는 것도 결국 선택이었고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산딸나무님의 실존적 선택이겠지요.
다만,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지 않고 단정짓는 것은 다소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답니다.
삶이 유한하므로 가능하다면 많은 일을 경험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산딸나무 2008-04-2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저는 스물일곱의 나이가 결코 어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나이에 결혼을 선택하지요.
그들의 선택이 모두 철없는 게 아닌 것처럼 저 역시, 비혼의 삶을 진지하게 선택했답니다.
비혼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랍니다.
비혼의 삶에도 결혼을 선택한 사람들이, 혹은 선택을 유보하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인생 경험들이 넘쳐난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서른여덟의 비혼주의자로, 혼자서 살고 있단 얘길 들으면 처음엔 예의상 ‘능력 있는 골드미스’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술이든 이야기든 한 차례 돌고 나면 슬슬 질문이 이어진다. 그 질문들은 염려라는 꿀을 바른 속된 궁금증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심심한 인생에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여흥거리가 어디 있을까 생각하니 이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성과 나이를 초월해서 사람들이 독신녀에게 던지는 질문 가운데 유독 자주 등하는 단어가 있으니, 다음 지문을 읽고 한 번 맞혀보시라.


 애 둘 낳고 살고 있는 여자친구가 묻는다. 
 “밤에 아프면 약 사줄 사람도 없고, 서러워서 어떻게 하니?” 
 연애에 빠져서 정신없는 어린 여자후배가 묻는다. 
 “혼자 살면 밤에 무서워서 어떻게 해요?” 
 일 때문에 만난 같은 또래의 유부남이 묻는다. 
 “혼사 살면 밤에 외롭지 않나요?”

 초등 1학년 국어 문제 수준인데 설마 못 맞힌 분들은 없겠지? 그렇다. 그 단어는 바로 ‘밤’이다. 사람들은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해서 그녀의 ‘낮’보다는 특히 ‘밤’을 궁금해 한다. 결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밤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혼자 사는 여자의 밤에는 왜 그리 관심이 많을까? 나는 오히려 그게 더 궁금하다.

 하도 이런 질문들을 자주 들어서 하루는 나도 내가 밤에 도대체 뭘 하는지 곰곰이 한번 생각해봤다.

 일주일을 돌아보니 사흘 정도는 집안일을 한다. 
 일을 늦게 마친 날은 청소기를 돌릴 수가 없어서 손으로 방을 쓸고 닦기도 한고, 세탁기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옷가지를 빨기도 한다. 마흔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손목이 시큰거린다. 그리고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24시간 영업하는 마트를 들러 장을 본다. 장바구니에 세탁 세제, 복사용지, 무, 감자 따위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날은 정말 ‘짜증 지대로’다. 그래도 내 몸뚱이를 살아가게 만드는 이런 일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틀 정도는 책을 읽는다. 너무 고상한 척한다고 생각하진 마시길. 반 이상이 만화책이니까.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시간을 더없이 사랑한다. 

 그리고 하루는 이런 저런 관계의 사람들을 만난다.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 친구들, 함께 밴드를 하는 언니 동생들, 내 밑바닥까지 알고 있는 내 가족들……. 까칠한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주는 이들에게 늘 고맙다.

 그리고 나머지 하루는 나를 만난다. 가끔씩 달빛이 부서지는 봄밤, 동네를 한바퀴 걷기도 하고, 비가 촉촉이 내리는 밤은 두보의 시를 떠올리며 사유에 잠기기도 한다. 내가 가장 아끼는 시간이다. 이 시간만은 오롯이 실존의 자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실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만나기 어려운 인물은 대통령도, 인기스타도 아니다. 그건 바로 자신이다. 명함이 말해주는 나, 돈이 말해주는 나, 관계가 말해주는 나가 아닌 진짜 실존의 자아를 만나본 적이 언제인가? 아니,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그런 나를 만난 적이 있기는 한 걸까?

 짬 없는 일상과 틈 없는 관계에 질식하기 직전인 나를 만나면 나는 늘 외롭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외로움과는 다른,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살아가는 본연의 외로움이다.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상대적 외로움, 존재적 외로움, 상실의 외로움이 아니라, 나를 느끼는 사람만이 가지는 절대적 외로움, 실존적 외로움, 충만한 외로움이다.

 그렇기에, 혼자 사는 여자의 밤은 가끔 외롭다.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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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4-1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워서 행복하시다. 하하..
저는 50이 넘은 소위 완전한 아저씨인데도 종종 외롭답니다.. 하하
실존적 외로움에 한표!!!


산딸나무 2008-04-1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누구에게나 실존적 외로움을 느낄 권리는 있답니다.
나이, 성, 삶의 방식과는 상관 없이요.
저도 님의 외로움에 한 표 드리죠.^^

2008-04-17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7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금강초롱 2008-04-1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정호승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 간다는 것은 외로움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길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라
갈대숲속에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씩 하느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산 그림자도 외로움에 겨워
한번씩은 마을로 향하며
새들이 나무가지에 앉아서 우는것도
그대가 물가에 앉아있는것도

그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 간다는 것은 외로움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그대 울지마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아! 외로움이란 나에게 있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너무 익숙하기에 그냥 무시하고, 아무렇지도않은듯, 별일 없는듯, 어쩌면 나에겐 너무 사치스런 감정인냥 그냥 그렇게 그럭저럭 버티며 지금까지 여기까지....

실존적인 외로움이란 결국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의 본성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을 아름답게 승화시킬 의무가 있겠죠. 님과같이, 그 외로움이 행복으로 다가온다니, 다행이네요,진심으로 행복이 가득하길!

산딸나무 2008-04-2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언제였던가? 아마 지난 해 가을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함께 운문사자연휴양림에 가서 하루를 쉬다 오려고 차를 몰고 청도를 넘어갈 때였다.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혼자서 중얼거리셨다.

 “하이고, 전쟁 때 여그를 넘어서 갔는데.”

 구불구불 이어진 고개를 넘느라 운전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어서 나는 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조금 있다, 재를 다 넘어서 너른 들판 사이 난 작은 강줄기를 따라 차를 몰고 있을 때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여그다가 천막 치고, 솥 걸고, 다 그래 살았는데, 우째 그래 안 죽고 다 살았는가 몰라.”

 순간,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란 것과, 어머니의 연세가 여든을 바라보고 계시니, 당연히 전쟁을 겪은 세대란 것과, 내 어머니의 전쟁도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삶 속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현재진행형의 과거’구나 싶은 깨달음이 스쳤다.

 때로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마치 공포영화의 공식처럼. 그 날도 책이나 영화에서 만나던 익숙한 전쟁이 내 어머니의 삶이 되어 오히려 너무도 낯설게 다가왔다.




 이 기억이 떠오른 까닭은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이 ‘전쟁과 여성의 삶’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참으로 낯설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이 년 만에 다시 잡게 되었다. 두 번째 읽는 책임에도 이 년이 지나는 동안 내 사유가 들어선 새로운 산길에서 만나는 책이라서 또 다른 깨달음에 즐겁게 빠져들었다. 그런데 줄 그어가며 읽었던 다른 어떤 글귀보다 강하게 마음을 붙드는 장면이 있었으니 기예프의 전승 기념탑에 대한 선생의 깨달음이었다.

 힘들게 탈환한 고지에 깃발을 꽂는 병사들의 모습 따위에 익숙한 우리에게 두 팔을 벌려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맞는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 탑은 전쟁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는 장면.

 나 역시 그 장면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니,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은 땅덩이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자유를 적들로부터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용감한 영웅들의 영웅담이 아니라... 오로지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여성들이, 어머니들이 전쟁에 대해 말해주는 유일한 진실이 아닐까?




 <이 여자, 이숙의>를 다음 날 바로 잡은 것도 아마 그 진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마음이 나를 부추겼기 때문일 터이다. 빨치산 사령관의 아내로, 딱 6개월간 함께 살았던 남편을 평생을 사랑하며 살았던 한 여인의 삶. 대단한 사랑이라고 추앙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사랑이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붙들어야 했던 종교였음을 이해하기에. 그러나 자식을 키우며 살아남아야한다는 당연한 본능이 사랑보다, 사상보다, 위대함을 읽었다.

 그 어떤 남성 지식인이 이토록 진솔하게 삶의 알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혜린의 <불의 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모임에서 읽고 토론을 하려고 뽑아 놓은 책이었는데, 내 사유가 이렇게 흐르고 있다보니 이 작품 역시 여성 주인공들의 삶과 그 삶을 뒤흔드는, 농락하는 전쟁과 운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그 어떤 여성도 운명에 농락당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고 확신했다. 악의 화신 ‘카라’조차도.

 여성들은 어떤 운명이 자기에게 닥쳐도 받아들이고 이겨낸다. 삶이 아무리 구차해도, 사랑하는 이를 보기 위해 살아남고, 살아남기 위해 사랑하고... 

 죽음은 운명에 지는 것이 아니다. 좌절이 운명에 지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 앞에서도 늘 희망을 품어내는 것이 아닐까?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왜 이리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자본의 욕망과, 사상과, 종교와 손잡은 운명이 우리의 삶을 농락해도 인간은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우리의 어머니가, 생명의 기원인 여성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희망하는 여성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세상, 자식들 땜에 살았지.”

 내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 의미가, 그 말의 무게가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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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2008-04-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산딸나무님 어머님께 현철 콘써트 표라도 한장 선물하고 싶네요
 

   

좋은 동화는 아이들의 삶을 그대로 녹여냅니다. 아이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학교……. 그 모든 것들이 동화의 소재입니다. 때로는 그들이 꾸는 꿈만으로  판타지의 세계가 창조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들은 여간해서 동화의 소재가 되지 못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천사라는 틀 안에 가두어서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 천사들이 사는 세상은 천국이 아닌 현실입니다. 그래서, 여기 아이들의 상처를 감싸 안는 따뜻하고 용감한 동화 두 편을 소개합니다.

[슬픈 란돌린]  가트린 마이어 글 아네테 블라이 그림, 허수경 옮김 문학동네어린이


  어린이들이 가족 안에서 당하는 성폭력의 진실은 꼭꼭 닫혀진 문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인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걸고 증언하고 싸워온 우리의 용기있는 자매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주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지식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훌륭한 성교육 지침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책은 어린 시절, 어떤 형태로든 성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왔던 우리시대 성인여성들을 위한 치료서입니다. 란돌린과 브리트가 울음과 고통으로 고민했던 날을 보내며 친구인 이웃의 아줌마를 찾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삶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을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하나 더 꼽고 싶습니다. 바로 어린이 성폭력의 실체를 정확하게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저씨가 성기를 꺼내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브리트의 옷을 벗기고 성기를 만지는 장면 따위, 정확하게 성폭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존에 추상적인 묘사에 그쳤던 그림책에 비하면 아주 진일보한 책입니다. 그 그림들을 통해서 작가의 사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운하의 소녀] 티에리 르냉 지음, 조현실 옮김

 

  이 책의 지은이는 두 딸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인지 성폭력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두 명의 생존자가 등장합니다. 미술선생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력은 당하는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담임선생님인 여성입니다. 담임선생님 역시 사춘기 시절 삼촌에게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의식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성폭력이 어떤 논리와 잣대로 피해자를 억압하는 지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작품입니다.

‘넌 어떤 순간에도, 그 사람에게 몸을 준 게 아니야. 절대로. 그 사람이 네 몸을 훔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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