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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 한 사회생물학자가 바라본 여자와 남자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어릴 때 손이 트지 하기 않기 위해, 손등에 화장품을 바른 것 이외에는 아직 화장이라고는 모르고 사는 내게 지은이는 "남자도 화장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지은이에 대한 명성을 어깨 너머로 앎음앎을 인지 해 온 터이고, 출판사도 내가 나쁘게 보지 않는터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책을 오늘에서야 읽었습니다.
여성의 세기가 온다.
"나는 이 책에서 여성의 세기가 왜 반드시 올 수밖에 없는가, 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그렇다면 그 새 시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물학적 분석(5쪽)"을 한다고 말합니다. 여성의 세기가 반드시 올 수 밖에 없다. 자칫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지만 뭔가 다른 분석이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아울러 그는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그리며, 우리에게 준비운동을 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성의 세기"에 대한 확신이 자칫 환상으로 보여지는 듯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우려 보았습니다. 지은이는 분명 "생물학적 분석"을 통해 "여성의 세기" 도래설을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분석이라는 정의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전공은 사회생물학으로, 처음 그가 발을 들여놓는 시기에는 페니미스트들에게 혼되게 당한 듯 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페니미스트에 대한 경계와 사회생물학에 대한 옹호가 간혹 보입니다. "유전자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주장에서 사회생물학자는 유전과 환경 모두를 본다(8쪽)" 즉 그가 말하는 생물학적 분석은 사회생물학 개념이며, 사회생물학은 유전자의 중요성도 인지하지만 환경과 중시하는 학문입니다. 지은이는 "유전자 + 환경"을 통해 여성의 세기가 옮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지은이의 4가지 시선
이러한 논증은 우선 괄목할 만 한 성장을 듣어보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금녀 구역으로 닫힌 공간이 서서히 붕괴되며, 몇 몇의 여성들이 수석을 하며 여성의 자리를 넓혀 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은이는 여성시대가 그리 멀리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심어줍니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환상은 남성 못지 않은 우월성이 있다는 극단적 대치로 나아갑니다. "x염색체들처럼 서로 바람막이를 해줄 수 있는 유전자 짝이 없다 보니 남성들은 색맹이나 혈우병 등 각종 유전적 장애에 훨씬 더 많이 시달린다. 남성이 어쩌다 이렇게 '쭉정이' 염색체를 갖게 되엇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지만 현대 진화생물학자들은 유전자들간의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63쪽)"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를 비교하면서, "여성의 투자는 이처럼 매 단계에서 엄청나게 신중하다. 값싼 정자를 가능하면 많이 생산해 보다 여러 곳에 투자하려는 남성의 전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68쪽)" 언어적인 문제에 대해서,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언어감각이 월등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은 구태여 과학적 증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으리라(77쪽)" 앞에서 보듯이 그의 논의는 이분법 구조로서,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정설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이러한 우월성은 당연히 여성의 세기가 도래할 증거로써 차용됨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나는 무엇인가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1980년 대에 한창 민주화의 열망이 불꽃같이 타오르던 시기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여, "내가 이 세상에서 직접 만나본 사람 중에서 그처럼 명석한 사람은 없었다(46쪽)"라고 회고하는 우월감(그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윌슨 교수와 쌍벽을 이루는 르원틴 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민벌레 연구를 통해 "졸지에 내가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된 것이다(56쪽)"라는 자부심. 이국 땅에서 임신을 하여, 입덧이 심한 아내를 위해 "금값에 가까울 정도로 비싼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보스턴 시내를 죄다 뒤져도 도무지 구 할 수가 없었다. 사방에 특별주문을 한 뒤 들어왔다는 통보를 받기만 하면 번개같이 달려가 싹쓸이를 하곤 했다. 배를 사러 뉴욕의 한인 가게들로 왕복 10시간 차를 몰기도 몇 차례씩(133쪽)" 한 그는 지극히 가정적이며 애처가이다.
세번째,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지는 부분입니다. 지은이는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사회생물학"을 통해 여성의 세기가 도래함을 풀어간다고... 하지만 즉 그는 여성시대가 옴을 무엇으로 관찰하는가 하면 동물들을 보며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동물들의 이러한 변화가 세기의 변화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년 전 부터 있어왔는데, 지금에서야 이야기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과연 동물들의 행동을 보고 사람, 그 중에서도 절반인 여성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나요? 확신하고 계신다면 참으로 순진하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천둥이 치면 소나기가 오고 방귀가 잦으면 뒷간을 가고 싶은 것은 절대명제이지만 몇 백 년 동안 쌓여온 동물의 행동을 아무런 논리적 근거 없이, "여성시대가 오고 있음의 증거입니다"라고 던지는 화두는 온당하지 못합니다. 동물을 통해 여성의 시대가 도래함을 논증함에 있어서, 그의 글쓰기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일방적 글쓰기가 이루어집니다.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은 언어 문제에 대한 천착이 없이는 철학적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언어가 인식의 수단인 동시에 인식 가능성의 방향을 결정짓는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84쪽)"이라는 점을 인지하며서도 교묘히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씩의 글쓰기를 합니다. "세번째"를 다시 보겠습니다. 그는 분명히 "사회생물학"을 통해 여성의 세기를 말한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익숙함에 낯설음입니다. 그는 자연계에서 이루어지는 역할 분담이나 여성 우위에 있는 관점만 가지고 와서 필요한 부분에 반창고 붙이 듯 붙이고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벤치마킹이나 타산비석을 말함이라면, 벌써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질 징조가 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연계에 대한 환상과는 반대로, 여성의 세기가 옮을 앞서서 말했듯이 금녀의 구역에 여자들이 입성한 점에서 찾고 있습니다. 과연 금녀의 구역이 지니는 의미가 "성역할의 분담 혹은 파괴"일까요? 여기에는 많은 관점의 차이가 있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는 남성 권력 집단에 소수의 여성 권력 집단이 들어갔다는 의미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말에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수의 지적 여성들이,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지 않고 금녀의 벽을 넘었다는 것은 쉽게 모둠에 동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은이는 여성 몇 몇이 금녀의 벽을 허문 이유와 자연계의 동물들이 지니는 행동간에 어떠한 유사점이나 비교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안없는 글쓰기, 누구를 위함인가?
이런 추론적인 글쓰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은, 대안없는 글쓰기를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은이는 "호주제는 생물학적 모순"이라는 소주제에서 호주제 폐지를 찬성합니다. 하지만 대안은 없습니다. 아울러 한 마디 덧 붙이자면 페미니스트나 호주제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정리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나 호주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이 있겠지만 저는 가방끈이 짧아서인지 과연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에 대해 아직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호주제가 한국에서 지니는 당위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도 이해하지 못함은 마찬가지인데, 지은이는 무조건 좋지 않으니 내 말을 듣으라 하는 듯합니다. "언어가 인식의 수단인 인식 가능성의 방향을 결정짓는 수단"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왜 외면했을까요?
이런 점은 의도적인 글쓰기를 한다고 밖에 보여지지가 않습니다. 언어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진 지은이는 간간히, 자기 자랑을 엮어 가면서-(46/56/133쪽), "겨우 열네 살이 된 우리 꼬마는 어려서 우리가 읽어준 그림책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적어도 몇천 권의 책을 읽었다(185쪽)"-그의 논의를 합리화-여성의 거짓말이 언어감각의 우월성 드러내는 기준(77쪽)-한다. 또한 자기 기준적 글쓰기-내가 하면 연애도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씩의 논의, "우리는 가끔 평생 동안 부부싸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노부부를 본다(59쪽)" 하지만 그는 부부싸움을 쫌 해서인지 "부부싸움의 정의를 달리"내린다. "두루 자연계를 둘러봐도 새끼를 돌보는 것은 대개 암컷이다(151쪽)"라는 정의는 "자연계에도 암수가 함께 자식을 키우는 동물들이 있다(156쪽)"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한다. 의도적을 남성 혹은 수컷을 비하하기 위한 글쓰기-"골 빈 수컷(57쪽)", "'쭉정이' 염색체(63쪽)", (반복해서)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를 비교하면서 "여성의 투자는 이처럼 매 단계에서 엄청나게 신중하다. 값싼 정자를 가능하면 많이 생산해 보다 여러 곳에 투자하려는 남성의 전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68쪽)"등은 솔직히 보기에 흉하다.
뫼 높은 자리에 정자를 짓고, 세상을 다 보았다 한다.
이 책은 어렵지도 않습니다. 회사를 갔다와서 저녁 시간에 다 읽었습니다. 편집이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빈 쪽 수가 몇 몇 넘어가고, 아름다움 그림이 텍스트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마 이 모든 편집의 깔끔함에 불구하고 지은이의 글쓰기는 읽기를 어렵게 만듭니다. 좀 더 솔직하지 못하다고 해야하나요? 그는 이미 여성의 세기가 온다는 마르크스적 환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의 논의는 깊이가 없습니다. 언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지닌 그가, 사회생물학적 징조를 통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동물학적 생태를 보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아쉬움만 보였습니다. 더욱이 불편한 것은 그의 논의를 풀어가기 위해 나만 옳다는 글쓰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심심할까봐 나오는 자기 자랑은 차마 지우고 싶은 장면입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보는 것이 아닌, 니가 우리를 억압했으니 이제는 니가 당해바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씩의 투쟁이 과연 여성의 세기에 필요한가라는 점이 듭니다.
그리고 상아탑에 머물러 계시지 마시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와서 현실을 직시하시길 바랍니다. 몇 몇의 고지식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였다 하여 여성의 세기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세기, 여성이 지니는 의미를 재설정하여,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합니다. 몇 몇의 동물을 관찰하고, 현실을 무시한체 여성의 세기아 온다느니, "우리 교육이 그 동안 지나치게 주입식이었으며 경쟁만을 강조하여 흥미를 유발하는데 실패한 것은 사실(178쪽)"이라면서 서울대가 지니는 특권은 교묘히 숨기는 술책은 보기에 정말 부끄러울뿐입니다.